무엇이 그리스도인 부부를 흔드는가?
- 흔들리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
김영경 교수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얼마 전, 한 방송사에서 종영한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 시청률이 28.4%(닐슨코리아 조사)로 비지상파 역대 최고를 기록하며 1위를 차지했다. 필자도 상담을 하는 사람이다 보니 부부의 세계를 어떻게 표현할지 그것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은 어떨지 등등 호기심을 가지고 관심 있게 시청하면서 시청률 높이기에 기여하였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에 대한 반응도 그러하듯이 시청자들의 반응도 다양하다. ‘막장 드라마다’, ‘청소년 자녀에 대한 배려가 배제되었다’, ‘역시 비혼이 속 편하다’, ‘한국적인 현실감이 부족하다’, ‘심리묘사가 놀랍다’ 등 시청률 못지않게 평가도 다양하다. 물론, 이곳에서 드라마의 줄거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에서 묘사된 부부의 감정선! 제3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부만의 그 복잡 미묘한 감정이 대사와 함께 현실감 있게 표현되는 장면 장면이 정말 놀라울 정도였다. 드라마라기보다 상담 현장에서 접하는 또 한 쌍의 부부였다.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부부!
아마 이 표현을 보고 놀라는 분들도 적잖게 있을 것 같다. 정말 이런 부부가 있다고? 그냥 드라마 아냐? 라며 믿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부부가 기독교인들 중에도 있다면 교인들은 어떤 반응을 할까? 이에 대해 통계적으로 조사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더 놀라거나 부정을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더 놀라거나 부정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리스도인 부부는 뭔가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말 다를까?
통계청(2019) 보고에 의하면 결혼은 2015년(302,828건)부터 계속 감소하여 2019년 239,159건에 이르렀고, 이혼 건수는 2015년(109,153건)이후부터 줄어드는 듯하였으나 2018년부터 다시 증가하여 2019년 110,831건에 달하고 있다. 이혼평균 연령이 남편은 48.7세, 아내는 45.3세이고, 이혼 건수는 40대가 32.9%로 가장 높고, 그 다음이 30대 25.5%, 50대 22.6% 순으로 나타났다. 결혼은 줄고 있는 것에 반해 이혼율은 증가하고 있고 대체적으로 중년인 40-50대 이혼율이 높은 것은 왜일까? 한창 열정적으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30대는 왜 이혼이라는 것을 선택할까? 요즘처럼 늦은 나이에 결혼했으면 더 재미나게 알콩달콩 살아야 하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이들은 무엇 때문에 이혼이라는 것을 선택할까?
2017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성격 차이가 43.1%로 가장 높고, 기타와 미상이 각 20%, 8.4%로 합하면 28.4%인데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이혼 사유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제문제로 인한 이혼은 10.1%, 배우자의 부정과 가족 간 불화로 이혼했다고 드러난 경우는 각각 7.1%씩, 정신적· 육체적 학대가 3.6%다. 연령대별로도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 성격 차이라는 것이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명확하게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기독교인들은 또 어떨까? 필자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중년의 시기를 위기와 갈등의 시기라고 자주 표현한다(Jung, Levinson). 이에 반대하며 오히려 성숙의 시기로 보는 학자(Vaillant, 1979)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머릿속에는 ‘중년=위기’라는 공식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문화 콘텐츠에서 다루는 주제가 이러한 공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러한 공식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냥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 아닌가?
실제로 중년의 시기는 인생 후반기를 준비하는 때다. 자녀들의 성장으로 인해 자녀 양육에 집중되었던 에너지가 남게 되면서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게 된다.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자신의 모습의 변화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외모와 신체적 변화가 눈에 크게 들어오게 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의 대상에서 제외됨을 경험하게 되면서 급 엄습하는 외로움과 억울함은 정서적 혼란을 가져오기에 충분하다. 맘을 추스르고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으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와 계획을 세우기 위해 도전도 하면서 중년의 성숙을 위한 시도를 하지만 예전처럼 자신감도 부족하고 밀려오는 씁쓸함에 혼자 고민을 하는 시간들! 그때가 바로 위기의 시간이다.
누군가와 고민을 나누기도 쉽지 않고 용기 내어보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배부른 고민’이라는 핀잔만 없어도 다행이라 하겠다. 혼자 해결해 보고자 하는 마음으로 자기성장과 개발을 위해 선택한 모임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지지와 관심은 자신의 빈 공간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누구의 엄마나 아빠가 아닌, 누구의 아내나 남편이 아닌, 무거운 책임감을 지고 돌보고 챙겨야 하는 사람이 아닌 온전히 나로 수용되고 돌봄 받는 순간! 윤리도 신앙도 무장해제 되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게 된다.
한 40대 여성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안정된 결혼생활을 하고 있지만 자신의 정서는 점점 메말라가고 있고, 주부로 살아가면서 자신의 꿈도 재능도 모두 사라지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그러다 삶의 활력소를 찾기 위해 참석한 모임에서 만난 남성으로부터 따뜻함과 설렘을 경험하게 되면서 혼동에 빠지게 되었다. 머리는 멈추라고 하지만 가슴은, 식었던 심장은 더 뛰게 되면서 마음(감정, 정서)의 소리에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녀의 집 근처로 이사 온 그 남성과 깊은 관계까지 가게 된 여성은 시간이 흐를수록 죄책감과 자괴감에 빠져 상담실을 찾아오긴 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 그 사람이 너무 좋고 함께 하는 그 순간이 행복하기에 그 행복을 조금만 더 누리면 안 되냐며 애절한 표정으로 필자를 바라봤던 그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필자는 여기서 고민이 된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그렇지! 마음의 소리는 죄의 목소리고 잘못된 선택을 하게 하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이 중요해”라며 마음의 소리, 감정의 소리, 정서를 가볍게 여길 뿐 아니라 죄의 잣대로 보게 될 것 같아 염려가 된다. 사실 이를 가볍게 생각해서 이러한 사단이 나는 것인데도 말이다.
30대는 또 어떤가? 중년에 비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 솔직하게 표현하는 편이지만 문제는 표현만 익숙하지 경청하고 공감하며 수용하는 면에서는 서툴다. 그래서 서로에게 쏟아내기 바쁘다보니 배우자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 진솔한 소통이 되기보다는 일방적인 표현으로 서로가 상처를 받게 된다. 30대 부부가 상담을 신청했는데 이혼을 위해 온 것은 아니지만 자녀가 태어나기 전에도 부부싸움 중에 흔히 있던 일이긴 했지만 이제 겨우 한 돌이 지난 자녀가 보는 앞에서 육탄전을 벌린 후, 부모의 싸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울고 있는 자녀를 바라보며 더 이상 이러한 일이 반복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상담을 받으러 온 부부이다. 이들이 상담실에 와서 쏟아내는 이야기는 자신이 너무 힘들고 지쳤으며 배우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며 자신에게 요구만 한다는 것이었다. 중년들처럼 묵혀두기보다는 바로바로 쏟아내고 내 상처가 더 큼을 주장하기 바쁘다. 내 아픔을 크게 느끼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상처를 듣고 보살필 여유가 적다. 그런데 이보다 더 우려되는 부부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이해하면서 자신이 성숙하게 품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부다. 상대는 숨이 막히고 있는데도 말이다.
30대 후반의 한 여성이 부부상담을 요청하였다. 남편이 홀어머니 밑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성장했기 때문에 학력이나 경제력에서도 조금 더 앞선 아내인 자신이 알코올 중독과 우울 성향이 있는 남편을 이해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직장과 가정 모든 일에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려움이 생겨서 한계에 부딪힌다면 아마 아내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혼을 요구한 것은 아내가 아니라 남편이었다. 잘난 척하며 거룩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아내를 더이상 참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성숙하게 수용하는 행동이 상대에게는 조종이고 통제였던 것이다. 30대도 역시나 정서적 소통이 안 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소통!
정서적 소통!
몸의 소통!
이혼 사유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이유가 성격 차이인데 이 또한 소통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사람의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차이를 좁힐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소통이다. 그런데 정서적 소통, 몸의 대화에 대해 건강하게 표현하고 반응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배우질 못했다. 오히려 감정이나 몸의 반응은 부정적이고, 수준 낮은 것이기 때문에 잘 통제해야 하고 표출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으로 배워왔다. 슬프고, 화나고, 억울하고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차단하고 있다 보니 어떻게 건강하게 표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못하게 된다. 어쩌다 표현해보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채 거칠게 표출되다보니 남는 것은 상처뿐이다.
몸의 욕구도 마찬가지다. 부부간의 몸의 대화를 위해서는 자신뿐 아니라 상대의 몸의 반응에 대해 민감하게 알아야 하고, 그것을 느끼고 표현하면서 소통해야 하는데 상대는커녕 자신에 대해서도 차단하거나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불통으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그리스도인 부부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며, 위에서 언급한 사례도 모두 그리스도인 부부의 이야기이다. 이는 일반 성도뿐 아니라 목사를 비롯하여 항존 직분자 부부에게서도 나타난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리스도인 부부에게서 더 심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소위 말하는 ‘거룩’, ‘성숙’을 강조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감정과 성을 너무 부정적이고 미성숙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이로 인해 오히려 감추고 억압하고 통제하기 때문에 한계치에 다다르게 되면 비집고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부부의 세계를 흔들어 놓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밖으로 드러나야 밝은 빛을 통해 자세히 보고 다듬어져서 건강하게 표현되고 소통할 수 있게 할 텐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보니 부부 상담을 할 때마다 늘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크다.
하나님!
감정과 성은 정말 수준 낮고 부정적인 것인가요?
이것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건강하게 표현하고 소통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닌가요?
이는 하나님을 뵈면 여쭤보기로 하고 이번 기획기사에서는 필자의 글을 시작으로 해서 배우자의 부정, 부부 경제, 성생활, 노년의 부부생활, 사별, 부부를 위한 상담기술, 부부의 신앙 갈등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그리스도인 부부의 세계에서 배우자의 부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접근해야 하는지 실제로 계속 증가하고 있는 이혼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뿐만 아니라 부부의 몸의 대화인 성생활과 고령화로 인한 노년의 부부생활 및 사별에 대한 애도 등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또 어떻게 적용하고 그리스도인 부부에게 안내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그리스도인의 부부의 세계도 여느 부부처럼 예외 없음을 기억하고 본 기획기사들을 읽는 순간 다른 부부를 떠올리기보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점검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부부의 신앙 갈등 (0) | 2020.07.21 |
---|---|
도대체 결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0) | 2020.06.30 |
이렇게 행복한 부부로 살라 (창 2:18~25) (0) | 2020.05.25 |
콕 집어 알려주는 가정예배 가이드 (0) | 2020.05.21 |
밀레니얼 세대, 가정은 변했다 (0) | 2019.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