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결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황영철 목사
(성의교회 담임)
신자의 결혼에 대한 책까지 썼지만 결혼에 대한 원고를 부탁 받고 난감했다. 결혼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는 없고, 하라고 해야 하긴 하는데, 하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사회의 상황인 까닭이다. 누군가 ‘어쩌다 어른’이라고 말했지만, 어쩌다 어른이 되었든 맘 먹고 어른이 되었든, 청년들이 결혼을 두려워하는 사회가 되도록 방치한 책임은 결국 어른의 몫이다. 차라리 내가 지금 결혼을 앞둔 20대 청년이라면 자신만만하게 결혼하라고 권하겠지만, 60대 중반을 넘기고 이 사회의 현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결혼의 현실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고 젊은이들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 아마 최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년이면 결혼한 지 40년이 되는데, 40년 동안의 결혼생활을 통해서 배운 것이 하나 있다면 결혼은 고생이라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보니 그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6-19) 이것이 우리가 사는 현 세상의 현실이므로 결혼이 행복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다.
원래는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먹지 말라는 나무의 열매를 덜컥 먹고서는 이런 꼴이 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자식이 자식을 죽이는 꼴을 봐야 했다. 노아는 손자와 그 후손을 저주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아내를 아내라고 부르지 못했고, 적어도 기록된 두 번의 경우 눈 뻔히 뜨고 자기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빼앗길 뻔했다. (기록되지 않은 이런 경우가 더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삭은 믿었던 아내와 아들의 모략에 속아서 원치 않는 아들을 축복했으며, 야곱의 가정에서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던 레아의 설움은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게다가 요셉의 일로 야곱이 겪어야 했던 마음 고생을 상상해 보라. 다윗의 가정, 호세아의 가정 기타 등등, 어느 가정이 행복했던가? 이들이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타락한 세상에서 행복한 결혼 같은 것은 없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으면 행복해질까? 물론 그렇지 않다. 결혼이든, 비혼이든, 독신이든, 행복하기 위해서 한다면 이미 번지수가 틀린 것이다.
나는 믿는 사람이지만 그 고생을 하나도 면제받지 못했고, 내가 아는 모든 믿는 사람들도 그 고생을 면제받지 못했다. 믿는 사람의 결혼이 믿지 않는 사람의 결혼보다 행복하리라는 말에 속지 말라. 똑같이 타락한 사람들이고, 똑같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행복은 무슨 행복. 청교도들은 이 세상에서 행복할 것을 처음부터 포기한 사람들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러면 사람은 왜 결혼하는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하라고 하셨으니 하는 것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증거가 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뭐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결혼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대려면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한다. 성격적인 이유, 사회적인 이유, 심리적인 이유, 역사적인 이유, 철학적인 이유, 미래학적인 이유, 심지어 성경적인 이유까지 들이대면서 결혼을 하지 않을 이유를 정당화해야 한다. 왜 그런가? 자연스러운 일을 부정하려니 그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로 지음받은 사람은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세상을 관리해야 한다. 이건 사람들의 본능에 새겨진 규칙이다. 사람들은 배우지 않아도 때가 되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거 부인하기가 그렇게도 어려워서 그 많은 이론이 동원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왜 결혼했을까? 첫째, 나는 당시에 내가 아는 성경 지식에 의해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건 굳이 성경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일반은혜의 빛에 의해서도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둘째, 나는 아내를 미친 듯이 사랑해서 계속 함께 하고 싶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나 힘들어서 만나면 자정을 넘겨 헤어지기가 일쑤였다. 지금 생각하면 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혼을 해서 무엇을 얻었을까? 그리 크게 얻은 건 생각나지 않는다. 그래도 한두 가지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인류에 두 명의 구성원을 공급함으로 인류의 존속에 이바지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목적의 일부를 이뤘으니 마음이 뿌듯하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에 두 명의 백성을 공급했다. 이것은 인류의 구성원 두 명을 공급한 것 이상으로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 외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우리 부부는 채워야 할 고생의 양을 채웠고 부부 싸움도 많이 했다. 물론 남모르는 기쁨도 많았다. 그래서 우리의 부부생활은 특별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모든 부부가 겪는 일을 그대로 겪었다. 나는 이것을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 평범한 결혼 생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자녀들이 주는 기쁨이 크다. 부모 말 안 듣고 바락바락 대들던 두 아들이, 여전히 투박하지만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하는 어리숙한 일들은 그간의 모든 고생을 능가하는 보상이 된다. 지나고 나니 도리어 미안한 마음이 남을 뿐이다.
그런데 아주 독특한 경험 하나는 하고 있다.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이 어떻게 세 분이면서 한 분이신지, 그들 사이의 사랑의 결합이 어떤 것인지를 훨씬 생생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지난 40년을 돌이켜 보면 세월이 지남에 따라 부부의 관계가 새로운 단계로 들어가곤 했다. 앞으로도 얼마나 더 살지 모르지만 훨씬 새로운 단계로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성삼위 하나님 사이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좀 더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될 것이다. 뭐 이런 일은 결혼을 해 본 사람의 이야기이니 결혼하지 않을 사람들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결혼에의 부르심에는 신앙에의 부르심과 유사한 면이 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실 때에 놀랍게도 아무런 행복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확실하게 약속하신 것은 박해와 죽음이었다. 세상에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결혼을 명하실 때에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성경을 인용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한 결혼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신자에게 결혼하라 하신다. 그 결혼 생활에도 고생과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졌을 때는 전혀 별다른 경험을 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과는 다른 형태의 독특한 경험이다. 성경이 즐겨 사용하는 말은 기쁨이다. 고난과 죽음을 기뻐하면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이것을 결혼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은 결국 고난이다. 하지만 결혼을 했을 때 그 모든 것을 기쁨으로 경험할 수 있다.
혼자 살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고난이지만, 둘이 함께 살면서 경험하는 고난과는 다른 고난이다. 기쁨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둘이 살면서 느끼는 기쁨은 경험하지 못하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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