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의 신앙 갈등
김진영목사
(서울중앙교회)
<불신자와 연애>
“정말로 착하고 성품이 좋은 사람인데,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을 하면 안됩니까?” 결혼을 앞둔 형제 자매들에게서, 때로는 대학생인 형제 자매들에게서 듣는 심각한 고민입니다. 결혼을 앞두고 이런 고민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상담하는 형제나 자매들은 신앙생활을 진지하고 열심히 하는 형제와 자매들입니다.
한 젊은 부부의 가정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연애를 할 때, 자매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었지만, 형제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으나 신앙생활은 전혀 하지 않았고 예수님에 대한 지식도 믿음도 없었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자매가 형제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다고,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형제는 큰 놀람과 충격 속에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교회에 출석하여 학습교육을 시작했습니다. 1대1로 진행하는 20주간의 학습 교육과 또 20주간의 세례교육을 받는 동안 그 형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결혼하여 지금은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간절히 기도했던 자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형제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듣게 되었습니다.
<불신 배우자와 결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자매가 불신자인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본인에게도 참으로 힘든 결정이었고, 그 자매를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착하고 좋은 남편이지만 불신자이기 때문에, 자매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이 한집에 같이 사는 차원이 아닙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한 몸, 한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일주일 동안, 직장에서 힘들고 분주하게 살았습니다. 남편은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평일에 할 수 없었던 부부만의 시간, 여가와 쉼, 간단한 여행, 부모님이나 친지 방문 등의 일들을 하고 싶어하는데, 아내가 일요일마다, 무조건 나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일년 내내 한 주일도 빠짐없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 참석뿐 아니라, 평일에 있는 교회의 소그룹 모임이나 성경공부 모임, 기도모임 등에 참석하겠다고 집을 비우는 일은, 아무리 착하고 좋은 성품의 남편이라 할지라도 감내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착하고 성품이 좋은 남편이라 할지라도 이런 생활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부부에게 자녀가 태어나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대학입시라는 중대사를 앞두고, 고3인 자녀에게 일요일에 학원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불신 남편이 흔쾌히 동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결혼생활은 부부가 삶의 모든 분야에게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동일한 삶의 목적과 방향을 함께 공유하면서 함께 길을 걸어가는 과정입니다. 같은 가치관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쉽지 않은 길입니다. 본질적으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삶의 근본적인 목적과 방향이 다른 부부간의 갈등과 아픔은 당사자가 아니고는 함부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정말로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결혼을 하면 안됩니까?” 오랫동안 교회 안에 있었던 문제이며 고민입니다. 교회는 지금도 오해와 비난을 받습니다: “정말로 나를 사랑해주는 착하고 좋은 사람인데, 단지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반대하는 것은 교조적인 태도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전히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착하게 살려는 사람과 같은 방향의 길을 걸어가는 것은,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결혼 생활은 같은 믿음, 같은 삶의 목적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 부부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자기 부인과 때를 따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은혜와 비밀을 남편과 아내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며 배우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민족들과 혼인을 금한 것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느냐?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느냐? 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믿음의 삶으로 나아가든지, 아니면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타협의 자리에서,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상태에 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완전한 배교의 형태로 나온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배교와 우상숭배는 언제나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타협된 신앙의 모습으로, 즉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는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상숭배는 전심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리에서 떠나, 하나님과 우상을 나란히 놓고,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구약 교회는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는 우상숭배로 인해 실패했습니다. 교회는 불신결혼의 영적 도전과 어려움을 교인들의 삶을 통해 익히 보고 경험했기에, 교인의 불신결혼에 대해 끊임없이 염려하며 경계합니다.
<배우자와 신앙 수준의 차이>
교회의 어떤 여집사님이 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집사님의 감사 제목은 “남편이 십일조 헌금하는 것을 허락해 준 것을 감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교인마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교인에게 같은 구원의 은혜, 같은 십자가의 은혜를 주시지만, 그 은혜에 대한 감사는 교인마다 다릅니다.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어린아이가 감사하는 마음이 장성한 자녀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듯이, 장성하고 성숙한 교인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초보적 신앙 단계에 있는 교인의 감사와 다릅니다. 그 집사님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함께 믿음으로 살고 싶은 자신의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께 십일조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이해와 동의를 얻기까지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쉬운 과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여러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남편의 마음과 허락을 얻었고, 본인이 원하던 십일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고 허락해 준 남편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감사의 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태신앙으로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신앙적 차이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을 보고 경험했습니다. 불신자이거나 혹은 신앙생활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배우자로 인한 부부간의 신앙적 갈등은 다양합니다. 교회의 건축이나 선교를 위한 특별 헌금을 드리는 경우, 배우자 몰래 헌금한 것으로 인해 갈등하고 다투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때로는 분노한 배우자가 교회에 직접 찾아오거나 전화를 통해 교회와 목회자에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신앙 수준으로 인해, 가장 가깝고 친근해야 할 부부 관계가 긴장과 다툼으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교회 봉사에만 열심인 배우자>
친구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그 여집사님은 교회에서 남달리 헌신적인 봉사와 수고를 하는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과 자녀는 신앙생활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에 관심이 없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기회를 얻어 그 집사님의 집을 심방하였습니다. 남편과 대화를 통해 들은 내용은 의외였습니다. 목사님이 보았던 교회에서의 여집사님의 모습은 누구보다 봉사에 헌신적이고 다른 교인들을 섬기며 돌아보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집에서 경험한 집사님의 모습은, 교회에서 모습과 달랐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남편과 자녀에게 많은 잔소리를 하는 아내요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은 친구 목사에게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나는 아내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일하는 것이 좋습니다. 아내가 교회에 가 있는 동안 최소한 우리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아내가 지금처럼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뜻밖의 사실에 충격을 받고 고심하던 목사님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집사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사는 것은 교회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사랑과 존경을 받는 아내와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임을 성경 말씀을 따라 권면하였습니다. 그리고 심방을 통해 들은 남편과 자녀가 생각하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말씀했습니다. 가족들의 생각과 목회자의 권면을 들은 그 집사님은 그날 이후로 자신의 생활과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교회에서 다른 교인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 이상으로 가정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잔소리와 비난을 중단하고, 교회에서 교인을 섬기는 것처럼 남편과 자녀를 섬기며 봉사하는 아내와 어머니의 모습으로 회개하며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너무도 감사하고 기억에 남은 일이었기에, 친구 목사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신자로서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함께 갑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먼저 섬겨야 할 이웃은 언제나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을 섬기고 돌아보는 일을 하지 않은 채, 교회의 일에 먼저 뛰어드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성경은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먼저 자기 가족을 잘 돌아보며, 가족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 사람을 교회의 장로로, 집사로, 직분자로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이단에 빠진 배우자>
몇 년 전의 일입니다. 대학시절 선교단체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선후배 사이였습니다. 믿음 안에서 결혼하여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자녀들을 키우며 신앙생활,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인가 아내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꼈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경제적인 지출이 아내에게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아내는 돈을 헤프게 쓰는 사람도 아니고 사치하거나 명품을 구입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사는 사람이였기에 의구심이 계속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남편은 아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단에 빠졌음을 뒤늦게 발견했습니다. 아내의 돈 씀씀이가 많아진 것은 이단과 관련된 지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선교단체에서 함께 신실하게 믿음 생활을 해 왔기에, 아내가 이단의 가르침에 빠져서 교회와 신앙을 저버리고 이단에 빠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충분히, 넉넉하게 생활할 수 경제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단과 관련된 일에 지출이 많아지면서 남편이 신용불량이 될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비록 지금은 이단에 빠져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아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여러가지 어려움과 경제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들이었습니다. 이단에 빠진 아내의 권유와 강권에 의해 믿음 생활을 잘하던 자녀들도 점차 교회를 떠나 이단에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아내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 또한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가정을 지키기 원하는 남편은 큰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이단에서 보호하고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은 분명했습니다. 모든 것을 이단의 가르침대로 움직이고 가정과 심지어 자녀들까지 이단으로 데리고 가는 아내를 보면서, 남편으로서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한 현실적인 조치로 취해야 했습니다. 이혼을 해야 하는가?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내는 아무런 제약 없이 남편의 직업과 직장을 이용하여 이단이 원하는 대로 가정의 물질과 시간과 자녀들까지 이단으로 데리고 갈 것인데, 남편으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불신인 배우자와의 갈등이 아니라, 같은 믿음을 가지고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하던 배우자가 뜻밖에 이단에 빠짐으로 인해 가정에 큰 시련이 왔습니다. 아내는 이단에서 돌아올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인내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자녀들까지 이단으로 데리고 가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남편은 한결같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와 아이들의 영혼을 이단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남편이 취할 수 있는 길은 제한적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의 현실, 목회의 현장>
목회 현장에서 직면하는 교인들의 영적인 갈등과 고민은, 몇 가지 공식이나 원리들을 적용하고 제시하는 것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효과가 없다거나 무익하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원리를 전하기 이전에, 그 문제로 인해 고민하는 교인의 개인적인 상황과 형편뿐 아니라 각 사람의 믿음과 신앙의 정도를 먼저 살피고 이해해야 합니다. 진리를 전해야 하지만, 진리를 선포하고 제시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원리들이나 가르침들 역시 구체적인 아픔과 갈등 속에 있는 교인들의 형편과 심정을 깊이 살피고 공감하는 가운데, 그 기반 위에 성경의 원리와 교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개인적인 상황과 영적 상태에 무관하게 단순히 모범 답안, 정답을 제시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려움과 고난 중에 있는 교인들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인내하고, 함께 고민하고 격려하는 곳입니다. 교회는 정답을 제시하는 학원이 아니라, 고난과 슬픔 중에 있는 교인들과 함께하고 위로하는 성도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모태신앙, 교회를 오랫동안 출석한 교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교인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의 하나님,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동시에 한 번의 결정적인 잘못과 죄, 중대한 실수를 오랫동안 기억하시고 보복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믿음으로 행하고 잘한 일들에 대해 은혜와 축복을 주시지만, 동시에 결정적인 잘못과 심각한 죄를 끝까지 잊지 않으시고, 이제는 소원한 관계 속에서 무관심한 듯 멀리서 나의 어려움과 고통을 바라보기만 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상, 죄를 미워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며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이상,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며, 돌이키며 회개하는 죄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죄를 미워하시되,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구속의 역사와 구원의 은혜는 불가능합니다.
왜 불신자와 결혼을 했느냐? 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배우자를 만났느냐? 왜 배우자가 이단에 빠지는 일이 벌어졌느냐? 어려움에 처한 형제와 자매를 위로하고 돕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에 주위의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있는 교인입니다. 우리의 영적 갈등의 근원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생각, 하나님에 대한 나의 신앙적 이해와 믿음에 따라 나의 신앙적 고민의 본질과 갈등의 깊이와 크기, 그리고 방향이 결정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책망과 비판의 하나님이십니까? 위로와 긍휼과 회복의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에게 사랑과 정의는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서로를 세웁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하나님의 용서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께서 다른 옷을 입고 나오시는 것입니다. 죄인과 죄는 같이 있지만 구별됩니다. 하나님은 죄를 한없이 미워하시되 죄인을 한없이 긍휼히 여기십니다. 죄를 미워하신다고 죄인까지 끝까지 미워하시거나 버리지 않습니다.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다고 해서 죄까지 용납하고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의 회복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우리와 같은 상황과 문제 속에 있었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 7:12-16)
결혼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라기 보다 거룩입니다. 결혼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이라면 결혼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으며, 때로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결혼에 만족하고 머물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의 자리로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더 행복하게 살 수도 있지만, 우리가 온몸으로 경험하는 사실은 결혼하지 않은 교인은 결혼한 교인이 체험하는 거룩의 은혜를 결코 체험하거나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으로 부르십니다. 거룩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죄와 타락으로 상실하고 잊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고 회복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결혼 생활의 어려움은, 우리가 경험하는 부부간의 모든 갈등과 아픔은 우리를 거룩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갈등의 상처가 크고 고통의 골이 아무리 깊을지라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뜨겁게 안아주시고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불신 배우자, 신앙적 수준과 관심이 다른 배우자, 이단에 빠진 배우자,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갈등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은 거룩을 말합니다. 행복보다 거룩을 먼저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개인의 거룩보다 타인의 거룩을 먼저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우리의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하면서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몇 가지 원리를 교조적으로 주장하지 않습니다. 모범 답안만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하라고 조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거룩입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자리, 내가 처한 환경에서 거룩을 추구하십시오. 나의 거룩이 아니라 배우자의 거룩을 먼저 추구하십시오. 긍휼하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보시고 나의 신음을 들으시고 자신이 은혜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시고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갈등이 없는 부부는 없습니다. 갈등의 종류와 깊이가 다를 뿐, 모든 부부는 갈등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불신 배우자나 신앙의 차이가 현저한 부부나 성숙한 믿음을 가진 모든 부부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남편들이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당신의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아내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아내들이여,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의 남편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부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부간의 갈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불신 배우자, 신앙의 수준이 맞지 않는 배우자, 성격과 취향이 너무도 맞지 않는 배우자로 인한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과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남편과 아내는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갈등의 본질은 배우자와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순종하는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가? 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 갈등과 고통, 행복과 불행까지 다 붙잡아서 하나님의 거룩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욥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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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예배: 청교도로부터 배우기 (1) (0) | 2020.08.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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