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다한 의사’ 실천으로 보여주셨다
장기려 박사
해마다 12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럴이 울려 퍼질 때면, 나는 25일 성탄절 새벽에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와 그분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멘토이신 할아버지는 기독교인이며, 조국이 낳은 외과의사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의사로 살다 가신 한국의 슈바이처, 성산 장기려 박사이다.
‘말기 암 환자에게 계속 약물 치료를 해야 하나? 편안한 여생을 준비할 시간을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수술 중 전이된 암세포를 어디까지 절제해야 하나?’ 나는 이러한 중요한 결정의 순간마다 ‘할아버지라면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를 생각해 보곤 하는데, 그럴 때면 의외로 쉽게 해답을 얻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 치료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1968년 설립한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오늘날 대한민국 의료보험제도의 기틀이 됐다.
할아버지는 내가 의대에 합격하자 그동안의 노력을 칭찬해 주시면서 의사로 살아가는 삶에 평생 가르침이 될 3가지 당부를 해주셨다.
첫째로 ‘항상 공부하고 노력하는 의사’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지켜본 할아버지는 늘 책을 읽고 계셨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뿐 아니라 의학서적, 학술논문 등 항상 책과 가까이하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이 가르침은 나에게 아무리 자신 있는 수술이라도 수술 전 관련 내용을 다시 확인하는 습관을 만들어주었다.
둘째로 ‘환자를 불쌍히 여기는 의사’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의사가 되고 전공의 과정을 지내는 동안에도 나는 이 말의 뜻을 진심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문의가 되어 내 이름을 걸고 수술을 하면서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쇠약해진 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의료진에게 맡긴 환자들을 보면서, ‘환자를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더욱 정확한 진단을 가능하게 하고, 진심을 담아 그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의료인으로서의 조언 외에 할아버지께서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봉사하는 삶’이다. 생활 전체가 늘 성경에 바탕을 두셨지만, 그 중에서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실천은 기독교인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장기려가 남긴 수많은 명언들은 지금도 여러 후배 의료인과 신앙인들의 삶에 지표가 된다.
할아버지는 어릴 적 독실한 신앙을 가진 증조할머니의 영향을 받아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성장하셨다. 증조할머니는 매일 ‘우리 금강석(할아버지의 아명)이 잘 자라서 하나님나라에 크게 쓰이는 일꾼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를 해주셨다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늘 내 손을 잡고 그 똑같은 문장으로 기도해주셨다.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던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할아버지는 둘째 아들(나의 아버지)과 단둘이 월남 후 부산에 정착하셨다. 그 와중에도 부산에 계실 때는 부산 산정현교회, 그리고 서울에 올라오시면 서울 산정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셨다. 주일예배 후에는 함께 신앙생활을 해 온 송리섭 장로님, 김형로 장로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셨다. 그만큼 산정현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어느 인터뷰에서 할아버지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알고 있느냐?”라는 질문에 “내가 이곳에서 아프고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면, 북한에서도 누군가 내 식구들을 잘 돌봐 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고 말씀하셨다.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하셨지만 마음속으로는 하나님께서 북에 있는 가족을 잘 지켜주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7년 할아버지를 추모하는 동료 및 제자, 뜻을 함께하는 산정현교회 성도들이 모여 장기려 박사의 나눔 정신을 이어가자는 마음으로 ‘장기려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그 후 청십자의료보험협동조합에서 이름을 따서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국내 노숙자 및 사회적 약자를 위한 의료선교를 시작하였고, 지금까지 23년째 이어가고 있다.
장기려 박사가 생전에 사용한 수술대).
등촌동 차상위계층을 위한 장기려무료진료소 운영을 비롯해, 2010년부터는 단순히 약만 나누어주는 의료선교에서 벗어나 국내 최초로 돈이 없어 죽어가는 암 환자들을 위한 의료봉사팀을 구성해 매년 캄보디아 프놈펜의 헤브론병원에서 암환자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약 350명의 갑상선암과 유방암 환자들이 새로운 삶을 얻었다.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의 의료지원을 받은 소외계층을 총 집계하면 약 2만 명에 달한다.
할아버지는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로서 많은 재물을 모아 후손에게 남겨주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소중한 유산을 내게 남겨주셨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베풀면 그 은혜가 결국 나와 내 가족에게 돌아온다는 교훈이었다.
환자들의 상태를 꼼꼼히 기록한 친필 노트.
그동안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을 맡아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부딪힐 때가 많았지만, 포기하려 할 때마다 기적처럼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 나타났다. 올 한해 코로나19로 대다수의 NGO 단체들이 활동을 중단했지만,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은 행정안전부 서울시 한국농어촌공사 등 정부기관 뿐 아니라 많은 후원자들의 지원 속에 중증장애인 및 의료혜택을 받기 힘든 분들에게 의료지원을 이어갈 수 있었다.
소외된 이웃에게 내미는 나의 손길은 그저 작고 미미할 뿐이다. 하지만 뭉쳐진 후원자들의 힘은 늘 내게 기적과 감동을 보여주었다. 내년에는 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베푸신 삶의 파장이 나비효과와 같은 힘을 발휘해 소외계층에 대한 관심과 배려, 남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 지역과 사회 전체에 퍼져나가길 소망해 본다.
파란 십자가의 기수, 장기려
실질적 의료보험제도 실시 등 긍휼 실천 ‘귀감’
성산 장기려 박사는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와 경성 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평양연합기독병원(기홀병원) 외과과장과 평양도립병원 원장을 지냈다. 1943년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 설상절제수술을 성공하며 널리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고인이 일생을 바쳐 가난한 이웃들을 섬긴 부산 초량동에 세워진 장기려기념관.
1948년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 임직해 섬기던 장기려는 6·25전쟁 발발 후 가족과 남쪽으로 피난길에 오르지만, 안타깝게도 본인과 차남 가용 단 둘만이 월남에 성공했다. 부산으로 내려온 장기려는 UN군의 지원으로 천막을 짓고 진료를 시작한다. 피난민과 행려자들을 섬기기 위해 설립한 이 병원은 훗날 고신대복음병원으로 발전한다.
특히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장기려가 행한 온갖 긍휼의 실천은 오늘날까지 인술의 귀감이 되고 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병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이라 할 수 있는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설립했으며, 얼마 안 되는 병원비조차 감당할 수 없었던 환자들이 조용히 도망칠 수 있도록 일부러 병원 뒷문을 열어두었다는 일화들도 전해온다.
스스로는 옥탑방에서 청빈한 삶을 고집하면서 이웃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푸는 존재였던 그에게는 ‘한국의 슈바이처’ ‘이 땅의 작은 예수’ 같은 별명들이 따라붙었다.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이, 1979년에는 ‘아시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막사이사이상 등이 그에게 수여됐다.
간질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 생명의전화 등 각종 사회봉사활동에도 앞장섰던 그는 1995년 12월 25일 별세했다. 마석 모란공원에 조성된 묘비에는 생전의 유언에 따라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란 글귀가 새겨졌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성산장기려기념사업회와 블루크로스의료봉사단을 조직해, 고인의 실천적인 신앙과 아름다운 삶을 계승하고 있다.
장기려 장로를 교회 역사상 커다란 보배 중 하나로 여기는 산정현교회(김관선 목사)는 올해 고인의 25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사업을 계획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 취소됐다. 부산 초량동에는 ‘장기려기념관’이 세워져 그의 고귀한 생애를 증언한다. (051)468-1248.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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