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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와 회복의 길로 나갑시다(호 1:2~9)

회개

by 김경호 진실 2021. 9. 27. 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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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돌아와 회개할 때 회복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음이니라”(호 1:2)


오종영 목사(대전 영성교회)
존 맥아더 목사의 <주님 없는 복음>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한다 해서 모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불신자들도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거짓 고백을 할 수 있다. 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닌데도 속아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값싼 은혜와 쉬운 믿음이라는 왜곡된 복음이 교회의 순결을 망치고 있다. 그 결과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완화시키는 일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며, 무엇이든 구원 얻는 믿음으로 여기는 부패한 포용주의가 따라왔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거부만 아니면 무엇이든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려는 것 같다. 현재의 복음주의가 만든 크고 뚜렷한 가장자리는 의심스러운 교리를 가진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일을 거역하는 마음을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포용하고 있다.”

그러면서 존 맥아더 목사는 종교지도자들에게 거듭남을 요구하시는 요한복음 3장의 예수님과 니고데모 간의 만남에 대한 해석을 시도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사와 장로들의 가치관과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복음적인 가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상징을 잃어버리고 종교인의 삶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큰 혼돈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만큼 이념과 종교적인 혼돈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이 혼돈은 교회 생태계와 성도들의 삶을 급격히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일상적인 삶은 물론이고, 교회와 노회, 총회, 연합기관의 사역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념과 사상의 대립, 신학적 해석에 관한 독선 및 종교적인 편협은 사회적인 현상을 뛰어넘어 정치적인 이슈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화되고 있는 현상들로 인해 교회의 지형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도 깊습니다. 이런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문득 오늘 본문의 호세아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충격적인 하나님의 요구와 선언

본문의 주인공인 호세아는 주전 8세기 북왕국(이스라엘)에서 태어나 남쪽(유다) 나라에서 예언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희한한 요구를 하십니다. “창녀를 취해서 아내를 삼고, 부정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겁니다.

기가 막히고 충격적인 말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런 요구를 하실 수 있는가? 선지자를 창녀와 결혼하라니요. 아마도 오늘날 어느 목회자가 창녀를 아내로 맞아들였다면 그는 온갖 비난 앞에 직면해야 하고 성직자의 삶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더욱 수긍하기 힘든 충격적인 명령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고멜’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분과 삶이 창녀와 같고, 음탕한 고멜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가, 교회가, 성도들이 집단적으로 하나님에게서 떠난 모습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이기도 합니다.(2절) 그래서 하나님은 “너를 긍휼히 여기지 않겠다.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스르엘’ 하나님이 흩으시다

그뿐만 아니지요. 이런 음란한 여인과 결혼했는데, 현숙한 신부로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호세아의 아내 고멜은 습관적으로 남편을 떠나 다른 남자와 도망을 갔으니, 이런 환경에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했던 호세아의 아픔을 이해하십니까? 이 호세아의 아픔은 다름 아닌 바로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고멜의 배신과 죄로 일관된 삶은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며, 우리 자신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멜을 통해 낳은 호세아의 아들에게 충격적인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라는 뼈아픈 이름으로 지칭하도록 하셨는데, 이 세 개의 이름들은 신앙인들에게는 불행한 이름들입니다. 여기서 ‘이스르엘’은 ‘하나님이 흩으신다’는 뜻입니다. 즉,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흩어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온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으니 너희는 하나님 백성으로서 부적격자들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버리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교회가 흩어짐의 위기 속에 던져진 것은 어쩌면 국가의 책임도 있고, 정치적 이념의 희생의 산물이라는 적절한 핑계도 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성도의 본질을 망각하고, 보신주의 신앙으로 일관하면서 영적으로 무사안일의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변화에 해답이 있다

코로나19와 함께 한국교회는 사회적인 도전과 정치적인 파고 속에서 혼돈을 거듭하고 있으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념과 사상의 대립 속에서 교회와 기독교인으로서 선명한 정체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물질주의와 물량주의에 묻혀 선지자적 사명을 애써 외면해 보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를 향한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제한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마태복음 5장 5절의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란 부분에서 ‘온유’라는 의미를 두 가지로 해석했습니다. 첫째는, ‘사나운 말을 길들이는 것’이요, 둘째는 ‘화를 낼 때와 안 낼 때를 구분해서 화를 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두 가지 해석에 근거한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규정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은 온유의 덕목을 입 다물고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사회적인 이슈와 세속적인 공격 앞에 몸을 사리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당한 의분이 필요하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르엘’에서 ‘이스라엘’로 변화해야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없이는 교회를 향한 소망이 없고, 대한민국의 미래도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 묘한 것은 ‘이스르엘’은 ‘흝으신다’는 의미도 있지만, ‘심는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다시 심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열매 맺는 삶을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전히 ‘이스르엘’이라는 불명예스런 모습으로 남아 있다면 민족의 희망, 교회의 희망이 없습니다. 변화가 전제되지 않은 회복과 희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두려운 것은 아들을 낳았는데, ‘로루하마’(긍휼히 여기지 않겠다)와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라니 기가 막힙니다. “너는 내 새끼가 아니다”라는 극도의 실망과 분노가 여기에 실려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바로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회복의 길

그렇다면 우리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관계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와 사회 환경이 회복되기 전에 목사가, 장로가, 성도가 먼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의 눈물을 통한 관계회복을 이루어야 합니다.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구체적이고도 유일한 회복의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한 두목을 세우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손을 맞잡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성도와 성도가, 노회와 총회가, 한국교회가 한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혼돈의 파고를 넘어서 회복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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