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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의 자서전(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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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호 진실 2021. 10. 13. 09:20

본문

가장 작은 자도 위대한 하나님 역사에 우뚝 세우십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오성수 목사(원주중앙교회)
우리는 자신과 관련된 글을 쓸 때는 남다른 신경이 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가 자기 자신에 관한 글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아마도 마태는 이 부분을 기록할 때 신경이 쓰였을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는, “나를 따르라”고 불러주셨다고 합니다.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에 대해 어떤 분은 마태가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불러주셨다고 해석하시더군요. 그래서 우리도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각자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은 올바른 명제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두고, 그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불러주셨다고 하는 것은 해석학적으로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마태가 “내가 열심히 내 할 일을 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셨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 글을 기록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비난을 받던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앞잡이라 취급받았고, 사회경제적으로는 도둑놈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은 그 자체가 죄악시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되고 읽힐 무렵, 누구도 마태가 자기의 일을 충실히 하니까 주님께서 그를 주목하고 불러주셨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태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불러주셨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내가 술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돈을 벌려고 담배를 팔고 가짜 양주를 팔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나를 불러주셨다”라는 식으로 이해를 해야 맞습니다. 이런 점에서 마태는 먹고살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며 죄인의 삶을 살았던 나를 주님께서 불러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를 부르실 때, 마태는 감격해서 주님을 위해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주위의 아는 친구들을 초청했는데, 직업이 세리이므로 당연히 세리들이 많이 왔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명색이 랍비 행세를 하는 예수께서 어떻게 세리와 어울리느냐?”라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할 때, 마태는 어떠했을까요?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까요? 받지 않았을까요?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존경받고 칭찬받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마태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기도할 때에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던 상황입니다.(눅 18:11) 이런 점에서 본다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난할 때 마태는 송구스럽고 죄책감에 시달려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하~13) 

모두가 나를 세리라고 경멸하고 죄인이라 멀리할 때,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죄인이요 세리인 나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오셨다고 말입니다.

마태가 이 글을 기록하면서 얼마나 감동했을까요? 누구보다도 제자의 자격을 갖춘 저 바리새인들을 부르지 아니하시고, 세관에 앉아 몹쓸 일이나 하는 나 같은 자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같은 나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던 세리인 나를 불러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마태는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4절을 보십시오. 거기에는 영광스런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마태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소개하면서 다른 제자들은 그냥 이름만 썼습니다. ‘어부 베드로’, 이렇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차례에 와서는 ‘세리 마태’라고 기록합니다. 왜 마태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자신의 과거 신분을 기록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결코 자랑스러운 직업이 아닙니다. 지금이야 세무 관련 일을 하면 좋은 직장을 가졌다고 하겠지만, 예수님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 일하는 민족의 반역자요, 세금을 착취하는 죄인이라고 인식되었습니다.

장관, 대법원장, 큰 회사 중역, 문학박사, 유명 대학교 교수, 이런 것이라면 몰라도,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그런 직업을 가졌던 것을 굳이 밝힐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태복음의 첫 독자들이 이 부분을 읽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도무지 여기에 끼여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일까요? 세리인 마태입니다. 그런데 왜 마태는 자기 이름 앞에 세리라는 부끄러운 호칭을 붙이는 것일까요? 이것을 통해 마태는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세리인 자신을 주님께서 불러주심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두 사도라는 영광스러운 반열에 도무지 낄 수 없는 존재임에도 주님께서 자신을 불러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 15:9~10상) 우리의 삶에서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교만하게 되고, 남을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왜 불평하고 원망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죄인인 자신을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지를 말하고 싶어서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세리 마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 같이 천대받고 미움받던 세리도 12사도의 반열에 오르게 하셨다면, 여러분도 얼마든지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통해서 계속 이것을 말하고 싶어 했습니다. 죄인을 불러주신 주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태의 마음!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열두 사도들의 이름에 ‘세리 마태’라는 이름이 기록된 것은 우리를 향한 도전이기도 합니다.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을 때 주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현실과 타협한 마태입니다. 돈에 대한 탐욕으로 눈이 멀어서 그렇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세리 노릇하는 그 자리에서 불러주셨을 때, 마태는 일어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세리인 자신의 이름이 영광스럽게도 열두 사도의 반열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아무리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남들로부터 조롱받는 처지에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귀하게 사용하시고 여러분을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세리 마태의 이름이 열두 사도들의 이름에 적혀 있음을 보면서, 오늘 나의 이름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태처럼 주님께서 죄인인 나를 불러주시고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의 은혜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사 내가 조금 부끄럽다고 해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일이라면 그 부끄러움도 개의치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우리가 결단해야 할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죄인의 대명사로 취급되던 세리인 마태를 부르신 사건 속에서, 아담 안에서 죄인된 모든 사람을 찾아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것은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신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동일한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성도라 하는 아무개가 세상을 사랑하며 행하고 있는 것들을 다 보시고” 계십니다.

돈을 위해서 동족을 버리고, 돈을 위해 거룩함도 버리고, 말씀도 예배도 버렸던 마태! 주님께서는 이러한 마태를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태가 있어야 할 자리가 그곳이 아님을 아시고는 “나를 따르라”며 부르셨습니다. 마태가 주님의 부름 앞에 “아멘”하며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마태를 들어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으로 세워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행적이라는 위대한 복음서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마태를 우뚝 세워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죄인인 나를 불러 회개케 하려고 오신 그분으로 인해 감사합시다. 예수님을 좇았던 마태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한 것들을 버리고 거룩한 주님을 위해 힘 있게 결단하며 일어서기를 바랍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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