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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학

by 김경호 진실 2021. 11. 12.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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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10:1-11)

                                                                                                                   (2004.2.22. 주일. 열린교회)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중에 광야에서 수많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가운데 광야의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잊어버릴 수 없이 중요한 교훈으로 다가온 것은 예배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하나님의 예배를 주관하게 하였는데 (레 8-9장; 민 3:1-3),

아론의 첫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된 제사를 드린 까닭에 여호와 앞에서 나온 불로 죽임을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억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본문 외에도 다음과 같이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레 16:1)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민 3:4) "나답과 아비후는 시내 광야에서 다른 불을 여호와께 드리다가 여호와 앞에서 죽었고 무자하였더라".
(민 26:61)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여호와께 드리다가 죽었더라".
(대상 24:2) "나답과 아비후는 그 아비보다 먼저 죽고 아들이 없었더라".

이런 반복적인 진술은 나답과 아비후의 잘못된 제사가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경고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는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들의 제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의 제사는 무이 잘못되었습니까?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의 오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본문을 정확하게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정확한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아 그 위에 향을 두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렸더라". 이 말씀에서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에 세 가지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첫째로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왔다는 것이며 (1a), 둘째로 그 안에 불을 담아 그 위에 향을 두고 다른 불을 드렸다는 것이며 (1b), 셋째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렸다는 것입니다 (1c). 이제 아래에서 이 세 가지 문제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합시다.

1. 인간적이었다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1a)라는 말에서 찾아낼 수 있습니다. 본래 분향은 아침과 저녁에 두 번 드리게 되어있었습니다. "아론이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정리할 때에 사를지며 또 저녁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출 30:7-8). 그런데 본문에 의하면 나답과 아비후는 아침인지 저녁인지는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으나 제각기 한 번 씩 분향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분향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은 나답이 자기의 향로로 분향을 했고, 다른 한 번은 아비후가 자기의 향로로 분향을 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였겠습니까? 최소한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답과 아비후가 제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각기 분향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분향하는 일에 부주의했던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분향하는 데 부주의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직후에 아론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8-10).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은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나답과 아비후에게 이런 실수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답과 아비후는 회막에서 봉사하기 전에 포도주와 독주를 마심으로써 자신들에게 주어진 분향을 부주의하게 되었고, 마침내 두 번 연거푸 분향을 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는 건전한 정신과 준비된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에게서 건전한 정신과 준비된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제사장으로 세우시면서 몸을 깨끗이 씻고 옷을 갖추어 입을 것을 요구한 것은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레 8:1-9). 이 때문에 예배자가 몸을 거룩하게 하고,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입니다 (롬 12:1-2). 오늘날 예배하는 성도들은 술 취하는 것 뿐 아니라 세상에 취해서도 안됩니다. 마음과 몸을 오직 하나님께 고정시키는 사람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제각기 분향을 한 둘째 이유는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이 최고의 신분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에서 교만이 발동했다는 것은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론의 두 아들이 여호와 앞에 나아가다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형 아론에게 이르라 성소의 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무시로 들어오지 말아서 사망을 면하라" (레 16:1-2).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들어갈 뿐입니다 (출 30:10). 그것은 심지어 아론에게도 해당되는 일이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죽은 직후에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아론에게 경고를 주었다는 것은 나답과 아비후가 바로 이 문제에 걸려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각각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제사장인지를 보이기 위하여 제각기 향로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분향으로 최고의 신분을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특별한 접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J.Hartley, Leviticus, WBC 4, 131). 이것은 영적 교만입니다.


예배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예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연약하고 비천한 자라는 것을 전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예배가 사람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세리와는 다르게 사는 것과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내는 것을 자랑했던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유혹이 우리에게 언제나 가까이 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이용해서 우리를 드러내려는 심보를 물리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보다 내가 칭찬을 받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가 인간의 실력을 과시하기 위한 장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셋째로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분향을 한 것은 경쟁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만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이라는 교만한 마음은 결국 경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나답이나 아비후 둘 중에 한 사람이 이런 교만을 발동하니까 다른 한 사람도 덩달아 편승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경쟁관계입니다. 나답과 아비후가 분향하는 일에서 경쟁을 했다는 것은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라는 표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후에 고라의 반란사건에서 아론과 고라가 이와 똑같은 행동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각기 향로를 취하여" (민 16:18). 이들은 교만으로 말미암아 제각기 경쟁적으로 분향함으로써 결국 제사는 통일성 없는 제사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은 예배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해져야지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지 사람들이 경쟁하기 위하여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는 사람을 경쟁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버려야 합니다. 예배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는 경쟁자가 아니라 동반자이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나답과 아비후의 예배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주의와 교만과 경쟁으로 얽혀진 예배였습니다. 예배에서 인간적인 것을 얼마나 배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2. 불법적이었다

둘째로 나답과 아비후의 예배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그 안에 불을 담아 그 위에 향을 두고... 다른 불을 드렸다" (1b)는 것입니다. 본문은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 을 드렸다고 진술함으로써 문제점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이 한 마디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무엇보다도 그것은 불을 담는 방식이 달랐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이후에 고라의 반역을 치리하는 과정에서 아론이 분향하는 방식이 설명되는데, 이것을 본문과 비교해보면 문제점이 무엇인지 쉽게 드러납니다.

아론과 고라: "그들이 각기 향로를 취하여 그 위에 불을 담고 향을 그 위에 두고"
민 16:18; 참조. 17:11 [개역 16:46 ]).


나답과 아비후: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고"


이 두 사건에서 한 가지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고라와의 경쟁에서 아론은 불을 향로 위에 ( ) 두었는데, 나답과 아비후는 불을 향로 안에 ( ) 두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라와의 경쟁에서 아론이 사용한 향로가 판처럼 납작한 것 (fire-pan)이었던 반면에, 나답과 아비후가 사용한 향로는 독처럼 깊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나답과 아비후는 본래 사용해야 할 향로와 다른 향로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도구가 달라지니 결국 방법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구와 방법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재료도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드디어 "다른 불"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단에서 피운 불을 향로에 담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레 16:12-13). 이 말씀은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레 16:1과 12를 연결해서 읽을 것). 그러므로 다른 불이라는 것은 번제단에서 취한 불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분향하기 위한 불의 출처가 문제시되고 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도구와 방법 뿐 아니라 재료와 관련해서도 완전히 다른 방식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경쟁적인 마음 때문에 제멋대로 제사의 방식을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배에 자신만의 새로운 것을 도입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는 새로운 예배방식을 도입하기 위하여 이방인들의 제사방식을 참조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들의 종교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런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특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의 지도 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기려고 했던 것에서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출 32장). 그렇다면 나답과 아비후는 이방인의 제사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식을 제멋대로 바꾸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불법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 예배에 대한 무서운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께서 다른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 "너희는 그 위에 다른 향을 사르지 말라" 출 30:9).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하여 신기하고 짜릿한 것을 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거룩함을 받으시고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 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3).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된 도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입니다. 이것은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들을 통하여 거룩함을 얻으시고 정결함을 얻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배가 얼마나 화려하냐, 얼마나 웅장하냐, 얼마나 편리하냐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예배가 과연 거룩하냐, 과연 정결하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을 정리하시면서 아론에게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원한 규례라" (8-9)고 말씀하신 후에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리라" (10)고 부연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도 주의해야 할 사항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를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인위적이고 세속적인 방식들을 무분별하게 도입합니다. 우리는 마치 화려한 찬양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웅장한 건물에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기쁨을 얻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군의 찬양가운데 계시다면 (계 5:11-12), 우리가 드리는 찬양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늘에 거하신다면 (행 7:48), 우리가 짓는 예배당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얼마나 화려하냐보다 얼마나 거룩하냐가 중요하고, 얼마나 웅장하냐보다 정결하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예배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거룩함보다 화려함을 추구하고, 정결함보다 웅장함을 추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종교는 세속화되고 인위적이 될수록 화려하고 웅장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3. 불신적이었다

마지막으로 본문은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를 설명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명하지 않은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렸다" (1c)고 말합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에서 드러난 마지막 문제점은 여호와의 명령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불은 하나님의 명령과 관계없는 불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불신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외면한 행위였습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왜 분향을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해야 하는가, 우리가 분향방식을 창안해내면 안되는가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그들은 독창적인 분향방식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지혜를 짜내고 재능을 발휘하고 경험을 살려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지혜와 경험과 재능을 한껏 사용해서 분향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생각을 우선시한 것입니다.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를 따르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드리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가 아니라 (롬 12:1-2) 자기가 기뻐하는 제사가 되었습니다.


예배행위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바른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비록 우리의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시하게 보이고, 원시적으로 생각되고, 답답하게 여겨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예배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놓친 예배는 그 자체가 이미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예배는 외면적으로 아무리 그럴싸하게 보여도 하나님께 열납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상 나답과 아비후의 제사는 외면적으로 볼 때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호와 제사에 필요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추었습니다. 향로, 불, 분향. 그들은 심지어 여호와 앞에 나아가서 분향을 했습니다. 나답과 아비후의 예배는 외면적으로 볼 때 너무나도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외면한 예배는 비록 그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라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외형은 신앙적이지만 내용이 신앙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결론

나답과 아비후의 사건은 예배와 관련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교훈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성경을 통해서 다시 예배에 관한 교훈을 받습니다. 바른 예배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좁은문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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