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한 인생 밑바닥서 창조자의 빛 발견할 때 행복합니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전 2:24)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우리는 “그때 눈치 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했더라면 좋았을 걸”이라며 후회하지만, 반대로 “그때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예를 들어, 제 경우에는 남 눈치 안 보고 잘한 것들 중 으뜸은 ‘교회 개척’이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었던 것들 중 으뜸은 중국선교사 파송을 앞두고 강남 대형교회 부목사로 들어갔던 거였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잘못한 그것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장 잘 한 것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 삶은 너무 빨리 합리화하지 않아도 되는, 이런 모순 속을 걷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모순의 그늘 아래서도 ‘모종의 만족’을 찾고자 애를 씁니다. 쾌락과 웃음을 위해 향락을 탐닉합니다. 머리를 써서 순간적 쾌락에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참고, 공적 사업을 펼쳐 존재감의 성취를 구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장황한 축제의 쾌감을 누리면서도, 싸구려 취급을 받지 않을 만큼의 탁월한 지혜와 당당한 재산도 소유합니다.
때로 우리는 이런 인생이 부럽지만 전도자의 결론은 또 다시 ‘허무’입니다.(3~10절) 그러니 우리는 해볼 것 다 하고나서 헛되다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도 있으면 좋겠다는 갈망으로 부아가 납니다.(1~2절, 11절) 세상이 대장동 개발 특혜사건에 관심이 뜨거운 이유는 경제정의의 열망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는 누릴 가능성이 없는 특혜를 그들은 다 누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다 누려 본 사람의 진짜 처절한 비참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바람피운 사람이 “그것이 말짱 헛것”이라고 말할 때, 그가 바람피운 이유로 얼마나 잔혹한 대가를 치렀고, 또 치르고 있고, 또 계속 치러야만 하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하는 중에 그 말을 하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행동으로 이미 너무 많은 이들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었고, 수많은 관계를 깨뜨렸고, 무엇보다 맑은 양심에서만 솟구치는 용기를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허무 쪽에서도, 쾌락 쪽에서도 허무에 도달하고야 맙니다. 허무의 지속은 쾌락을 초대하지만, 쾌락은 또 다시 허무에 삼켜집니다. 쾌락은 접촉의 반복을 통해 더 강한 자극으로 우리를 노예화하고, 그 와중에 우리 몸과 영혼과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허무는 이렇게 내 존재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지만, 세대가 변한다고 해도 결코 극복될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12절)
물론 지혜가 미련함보다 낫다는 건 분명합니다. 지혜자는 머리에도 눈이 있어 어두움에서도 헤쳐 나갈 길을 볼 수 있지만, 미련한 자는 흑암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형사고가 터지고 대책 없는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간에는 지혜자와 우매자의 구분은 사라지고, 또 다시 허무입니다.(13~17절)
힘을 다한 수고 끝에 내 뒤에 남는 모든 것은 뒤에 올 누군가의 손에 고스란히 넘겨지지만, 그가 내 자식이라고 해도 허무를 향한 불안은 감추기 어렵습니다. 전도자가 솔로몬이라면, 그의 한탄은 고스란히 아들 르호보암을 통해 현실이 되었습니다.(18~22절) 일생 초조해하고 근심하며 불안을 이기며 죽어라 일했지만, 대체 뭘 하며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시간이 닥치면 온 몸과 마음은 피곤에 찌들고, 밤마다 싱숭생숭 잠은 오지 않습니다.(23절)
하지만 허무에서 허무로 이어지는 허무가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위로의 빛이 간간히 우리 어깨 위로 내려앉습니다. 아끼는 가족, 맘 편한 친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내 손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진짜 행복을 위한 단서가 발견되는 시간입니다. 노동을 통해 먹을거리를 얻고, 그것으로 먹는 기쁨과 생명력을 얻어 노동에 다시 임하는 일생의 반복에는 지치지 않는 기쁨의 신비가 있습니다. 특히 음식은 생명을 빛나게 하는 힘이고, 기쁨의 원천이고, 감사의 샘물입니다.
무엇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들은 예외 없이 내 수고의 산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땅과 하늘과 바람과 햇빛과 온갖 에너지들이 작동하는 위대한 우주의 이야기에 나를 참여시켜주는 셈입니다. 음식은 고스란히 감사의 결정체입니다. 다시 말해, 먹고 일하는 일상에서, 모든 것을 의미있게 하는 하나님의 영원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겁니다.(24~25절)
물론 이 때 우리는 결과주의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누가 결과적으로 지혜와 지식과 기쁨을 누린다고 해서 그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누가 결과적으로 자기에게 속했던 것들을 다 빼앗겼다고 해서 그가 곧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인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지식과 지혜로 배부르게 살다가 화려한 장례식으로 일생을 마무리 하는 자들이 많고, 하나님을 진실히 섬기면서도 법적 모순, 누군가의 탐욕이나 지독한 이기심 때문에 정직한 노동의 결과물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도했더니 이렇게 응답되었다”는 식의 간증은 언제나 혼자서만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별로 기도한 것 같지 않은데 놀랍게 응답받고, 죽어라 기도했는데도 응답받지 못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 말씀처럼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은 옳습니다. 하지만 이때 열매는 어떤 삶의 결과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처했든지 하나님 뜻을 발견하려고 몸부림하는 질문들을 통해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신적 성품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로 알리라는 말씀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에 참여하여 서로 함께 잘 어울려 사는 존재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결과주의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나를 통해 무엇을 남기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모든 여정을 통해 내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기억에 남는 존재가 되느냐 하는 문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인생의 고통은 잊혀짐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창조자요 영원하신 왕에게 영원히 사랑하고 함께 할 자로 기억된다는 게 진실이라면 우리는 살 수 있고,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것 같은 현실에서도 견디고 이기는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은 현실에 대한 지독한 실망 끝에서 얼굴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꿰뚫어 보는 동안 지독한 실망감에 허덕였던 사람이야말로 자신이 이런 현실에서 하나님의 대답을 느끼게 하는 존재로 부름받았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도서 주석가 다니엘 프레데릭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녀로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를 탐구하는 일에 우리 자신을 실천적으로 던짐으로 삶의 위협과 좌절에 대하여 답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자신이 첫 번째 응답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변화된 존재로 누군가 곁에 있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물로 받았지만, 동시에 나 자신이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모 가수는 요즘엔 그나마 꽤 정상에 가까운 활동을 하는 중인데, 사실 이 분은 객사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마약 전과 5범으로 감옥 출입을 반복했고, 해외 도피에 정신병원 입원이 이어졌습니다. 그에게 찰나적 쾌락과 파괴적 삶은 뗄 수 없는 동반자였습니다. 하지만 두 번이나 헤어졌던 아내가 여전한 남편 걱정으로 요양원에 강제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고, 2011년에는 그야말로 제대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자기 아내에게 말했습다. “뭐하러 나 같은 놈한테 이렇게 잘 해주나? 당신 갈 길을 가라!” 그때 그의 아내의 답은 단순하여 강력했습니다. “사랑하니 모른 채 못하겠다.” ‘너를 사랑하므로 홀로 둘 수 없겠다’는 그녀의 말 한마디가 모씨의 인생을 리셋시켰습니다. 그는 아내와 재결합 후, 얼마 전에는 “나는 이제 마약 대신 가족들의 사랑을 먹고 산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의 원형이 내 안에 사시는 자로 부름받았으므로 진짜 행복의 길을 모르지 않습니다. 동시에 이미 알게 하신 참 행복의 길로 한 걸음을 내딛으면, 곤고한 순종의 날들을 뚫고 그 길을 행복하게 걷게 하시는 그의 신실한 동행을 맛보게 될 거라는 진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면 됩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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