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보이신 ‘나를 내어주는 사랑’이 영원한 행복입니다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도 이미 있었느니라”(전 1:10절)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
이 세상을 살면서 열심히 살 수 있는 이유는 ‘행복은 나 하기 나름’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면 삶의 터전도 흔들립니다. 그런데 나보다 더 신실한 분들 중 힘들게 사는 분들이 있고, 나보다 훨씬 못된 것 같은 자들 중에 평안을 누리는 걸 보게 됩니다. 그러면 참으로 오늘 내가 누리는 평안과 고난이 전적으로 나에 의한 것인지, 행복이 나 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맞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전도서는 이런 현실에서, 맥 빠진 채 막막해 하거나 이기적 쾌락주의에 말려들지 않고 평안을 누리며 사는 길에 관해 집요하게 질문하게 하는 책입니다.
전도자는 자신의 남은 인생에 미련을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살았고, 더이상 하고 싶은 게 없을 만큼 충분히 해 본 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내린 삶의 결론이 ‘헛됨’이라고 단정합니다. 삶은 수증기 같이 헛되어 무언가 있는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사라지는 임시적인 무엇 같습니다. 삶을 제대로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삶이 대단해 보이건 그렇지 않건, 세월은 모든 것을 쓸어가 죽음 저 편으로 떨어뜨립니다.
아담의 둘째아들 아벨의 이름은 본래 헤벨입니다. 옳은 자가, 옳으신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행한 것 때문에, 옳지 않은 자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 당한 허무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아벨 이후 온 땅은 허무한 수수께끼들로 충만합니다. 물론 헛되지 않은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자만이 모든 게 헛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헛되지 않은 것을 찾지 못한 자는 모든 게 헛되다는 말조차 헛된 것을 알기 때문에, 헛되다는 말을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따라서 모든 게 헛되다는 선언은 진실로 헛되지 않은 것을 찾으려는 열망이 있느냐, 참으로 가치 있는 걸 찾았느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선언으로 모든 게 헛되다는 진단을 보충합니다. 해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그게 그거입니다. 코로나19 기간 중 우리는 최근 수년간 거의 볼 수 없었던 새 하늘을 보는 기쁨을 누렸지만, 사실 그 하늘은 옛날에 항상 봤던 바로 그 하늘일 뿐입니다.
동시에 그 하늘 아래에서는 하루 종일, 1년 내내, 일생, 검게 그을린 피부 사이로 고된 노동의 주름이 패이고 패인 주름 사이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그 사이에 손톱은 닳아 없어지고 손마디는 마대자루처럼 거칠어지고 허리는 구부러져 작은 노동에도 삭신이 쑤시는 얼굴이 단 한 순간도 감추어진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루 반나절 불어댄 태풍에 1년 농사가 망가지고, 한 순간 사고로 모든 걸 쏟아 부었던 자식을 잃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조바심을 내고, 자기가 하는 일보다 중한 건 없는 것처럼 다른 모든 걸 희생시키면서 바빴지만, 대체 무엇을 남겼는지 묻게 됩니다. 전도자가 묻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초조한가? 왜 그렇게 불안한가? 왜 그렇게 가까운 이들 눈에서 눈물 빼거나 몸을 망가뜨리면서 그 일을 하려는 것인가? 왜 그 물건에, 그 음식에, 그 땅에, 그 시간에, 그 사람에게 그토록 집착하는 건가? 그래서 뭐가 남을 것 같은가? 과연 무엇을 새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가끔 서울 테헤란로의 마천루 사이, 강남 최고급 아파트 단지 사이를 지날 때, 부러움에 지지 않으려고 중얼거립니다. ‘이 빌딩, 저 집 주인도 곧 바뀔 거야’. 스스로 생각해도 치사하고 얄궂지만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화려한 건물은 여전해도 그 안에서는 사고 질병 노환으로 끝없는 세대교체가 일어납니다. 마음만큼은 여전히 20대인 60대 안에는 어떤 서운함이 있지만, 60대가 2~30대를 향해 “너희들도 곧 따라 올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서운함 때문이 아니라 그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새 것은 속히 옛 것이 됩니다.
방금 전에 뜬 해가 눈 몇 번 깜박이니 저 편으로 넘어갑니다. 여름인 줄 알았는데 금방 겨울이고, 새해 인 줄 알았는데 어느새 연말입니다. 시간의 무상함에 공감 못할 자가 없습니다. 기회가 나에게 온 줄 알았는데 바람처럼 언제 저 쪽으로 돌아 나갑니다. 우린 끝없이 예측하고 싶어 하고 미래 전문가들에게 의지하지만 그들도 잘 모르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 삶은 끝없이 끝을 향해 달리지만, 아무리 달려도 의미와 목적을 배부르게 성취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끝없이 흐르고 쉬지 않고 소멸할 뿐입니다. 나만 불행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다 불행하거나 불행해질 예정입니다. 뭔가 이룰 줄 알았는데 막상 열어보니 별 게 없습니다. 결국 새 것도 없고 영구적인 만족도 없습니다. 피곤만 쌓여가고, 삶은 예측할 수 없다는 것만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본문 12~15절 말씀에 따르면, 전도자는 힘과 완력 대신, 지혜와 지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구부러진 백성의 마음은 펼 수 없었고, 국고를 아무리 풀어도 가난한 백성을 책임질 수는 없었습니다. 전도자가 누구보다 큰 자라는 것도, 비견될 존재가 없는 지혜자라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클수록, 더 많은 지혜와 지식을 가질수록, 더 배고팠고 더 번민에 빠졌습니다. 많이 알수록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사실만 더 확실히 알게 되어 절망했습니다. 알고자 하는 것에는 끝이 없다는 것과, 세상은 더 이상 ‘행복은 나 하기 나름’이라는 논리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만 확실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해 아래 꽂혔던 눈을 들어 해를 지으신 분을 향하지 않고서는 어디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에 따라 우리는 물어야만 합니다. “해 아래서 살아가는 모든 헛됨을 인정하면서 오늘을 산다는 건 무슨 뜻인가”라고 말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우리는 오늘 내가 있는 자리에 대해 제대로 정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오늘 어떤 이유로든 가정이나 예배당에서 예배드리는 자리에 앉아 있다면, 그 자리는 허무를 느껴야 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허무를 관통하는 빛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자기 몸을 던져 마련하신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새 것을 옛 것으로 퇴화시키는 세상에 새 약속으로 오셨습니다. 새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새 삶을 사는 새 존재로 빚으십니다. 우리가 매순간을 영원한 새로움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곧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향하게 하셨습니다.
가수 이문세는 <옛사랑>에서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고 노래했지만, 그것은 실상 지겨웠던 그 사랑마저 절절하게 그립다는 징징거림입니다. 사랑은 지겨워도, 그립고, 옛 사랑이어도 새롭습니다. 사랑만이 결코 영원히 지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랑의 지겨움을 말했던 그의 노래는 이렇게 마무리 됩니다. “옛 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있네”
2013년에 나온 영화 <스틸라이프>는 고독사한 분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22년차 공무원 ‘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고독사한 분들은 친인척이나 친구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개 공무원들은 지인찾기를 그만두고 시신을 화장해서 땅에 묻는 간결한 과정으로 장례식을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바로 자신이 고독사할 처지에 가까운 주인공인 노총각 존은 일일이 수소문하여 먼 곳에 있는 가족, 친구까지 찾아 장례식에 초대합니다.
결국 일처리가 너무 느려터진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은 후, 교통사고로 허무하게 죽습니다. 존이 죽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장례식장에 찾아오는 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존이 장례를 치러주었던 고독사했던 이들이 무덤에서 나와 존의 무덤을 둘러싸고 애도를 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감독의 애절한 호소가 묻어나는 장면입니다. 나와 너를 넘어, 과거와 현재를 넘어, 삶과 죽음을 넘어, 혼자 쓸쓸히 죽어갔던 모든 이들을 모이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만 한다는 겁니다. 세상에는 그런 힘이 반드시 작동해야 한다고, 죽음조차 뛰어넘는 환대의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고 외치고 싶었던 겁니다.
진실로 허무와 죽음을 넘어 영원까지 닿는 행복은 나를 내어주는 사랑뿐입니다.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으신 그 사랑으로 찾아오신 주님의 아름다우심을 알아가는 동안, 그 사랑으로 함께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행복이 나 하기 나름’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는 현실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비밀입니다. 그 비밀이 우리의 일상으로 입증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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