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부활의 감동을 매일 거룩한 삶으로 이어갑시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요 5:14)
강송중 목사(서울남교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질병은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하고도 어려운 고난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질병의 고통에 신음하며 아파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많은 분들이 투병 생활 중에 있으며, 온 교회가 마음을 다해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투병 중에 있는 모든 분들에게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의 손길이 함께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오늘날 현대의학의 발달은 놀랍습니다. 이전에는 치료하지 못했던 많은 질병들도 의료진의 헌신적인 수고와 노력 덕분에 현재 많은 환자들이 회복과 치료의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모든 병을 다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의학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질병도 더욱 발달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만큼 오늘날도 수많은 질병들이 건강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 되시는 주님의 도움의 손길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7가지 표적 중에서 세 번째 표적입니다. 요한복음은 일곱 개의 표적을 매우 의도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표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며(2:1~11), 두 번째는 가버나움에서 죽어가는 왕의 신하를 고치신 표적이며(4:46~54), 세 번째는 오늘 본문의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입니다.(5:1~9) 그리고 네 번째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의 표적이며(6:5~14), 다섯 번째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오신 표적이며(6:16~21), 여섯 번째는 예루살렘에서 눈먼 자를 치유한 표적이고(9:1~7) 마지막 일곱 번째는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1~14)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인생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모습과, 둘째는 우리를 고치시고 회복시키시고 치유하시는 주님의 모습. 그리고 세 번째는 이런 치유의 손길을 통해 우리를 모든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권세에서 구원하시는 주님에 대해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시는 주님입니다.
유대인의 명절을 맞이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는 2만~3만 명 정도가 된다고 성경학자들은 추론합니다. 그러다 명절이 되면 그 인구는 5만~10만 명까지 늘어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명절의 분위기를 생각해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가족 친척들이 함께 모여서 즐거워하는 명절에, 오히려 이런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하지 못해서 더욱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양문이라는 말은 양들이 출입하는 문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에는 여러 개의 출입문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성전제사에 쓰는 양들이 출입하는 문을 양문(The Sheep Gate)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양문 옆에는 자비의 집 또는 은혜의 집이라는 의미의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1860년대의 발굴에 의하면 베데스다에는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고, 중앙의 한 개의 행각과 가장자리에 4개의 기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예수님 탄생 200년 전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 성전에 물을 공급하고자 하는 목적과 종교적 의학적 치료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이곳에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예수님 당시에는 많은 환자들이 이곳에 모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명절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이고 즐거워하는 때에, 이런 즐거움에 전혀 참여할 수 없어 더욱 외롭고 소외된 어려운 처지에 있는 병자들을 일부러 찾아 가신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십니다. 때로는 우리 자신이 주님께로 나아갈 힘조차도 없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따뜻한 손길과 말씀으로 우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 주시며 다시금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때로는 아내를 통해, 남편을 통해, 그리고 가족들과 친척 친구들을 통해 주님은 우리를 먼저 찾아오셔서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는 치료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으로 찾아가신 주님은 제일 먼저 38년 된 병자를 만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성경은 이 병자의 이름이나 가족, 친구 등 관해서는 아무 것도 기록하고 있지 않고 단지 38년 된 병자라는 점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누운 것을 보시고 오랜 기간 동안 투병 생활 중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병색이 완연해 죽음도 멀지 않아 보였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에게 주님은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왜 주님은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오랜 병으로 고생한 환자가 낫고자 하는 마음을 몰라서 하는 질문일까요? 이 질문은 주님의 사랑과 관심이 담긴 따뜻한 물음입니다. 그 병자가 자신의 마음을 열고, 자신의 아픈 마음을 토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질문인 것입니다. 치료는 여기서부터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질문에 환자는 마음의 고통들을 토로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물에 넣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한탄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내려간다고 신세타령을 하면서 마음의 문을 엽니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과거에도 해결할 수 없었으며, 현재도, 그리고 미래에도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배려해서 먼저 그를 연못에 넣어줄 사람은 없으며, 자기 자신도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왜 이 환자의 투병생활이 38년이라는 사실을 명기하고 있을까요?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에 광야를 방황한 기간이 4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그 기간은 38년이 된다고 성경학자들은 계산합니다. 이 병자의 상태는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를 치료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있었으며, 또한 누구에게도,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환자는 모든 인간의 실존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희망도 사실은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이 다른 사본에는 기록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괄호로 표시하고 있습니다.(3~4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에 모든 희망을 걸고 긴 세월을 기다려 왔습니다. 믿을 수 없는 헛된 희망 속에서 살아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자신 앞에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는 구원자가 서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조차도 깨닫지 못하며, 자신의 헛된 희망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헛된 희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코 자신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에 모든 희망을 두고 있으며, 우리 앞에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치료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이 진정한 희망이요, 회복과 치료의 길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구원하시는 주님의 모습입니다.
질병으로부터 놀라운 치유를 받은 환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갑니다. 아마 기쁜 마음으로 가족을 향해 뛰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치유 받은 병자에게 힐문합니다.
인간의 완고함과 위선은 놀랍습니다. 38년된 병자의 치유는 보지 못하고, 자리를 들고 가는 모습은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38년의 긴 병에서 고침을 받은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말할 수 없는 감격과 기쁨 가운데서 가족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런 감격은 보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웃들이, 공동체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도 충분하지 않을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그가 안식일의 율법을 어긴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그를 다시 만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가 되시며, 안식일의 완성자가 누구인지를 그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치유를 받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질병의 치유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구원받은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과 성금요일 부활주일을 지난 지금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날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날마다 사망권세에서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며 오늘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강송중 목사(서울남교회)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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