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희랍의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세계(코스모스)는 수의 상호관계에 의하여 정돈되어 있을 때 그 존재가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음악의 화음(chord)과 불협화음(dischord)을 수의 조화와 그렇지 못한 부조화에서 생기는 현상으로 보았고, 사람이 건강하고 그렇지 못함도 건강과 아픔의 비율로 설명하려 했으며, 날씨가 흐리고 비가 내리는 것도 맑음과 흐림의 수적비율을 근거로 설명하려고 했다. 따라서 모든 존재를 수의 상호조화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수적비율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근본 법칙인 셈이다. 존재를 규명하는데 수(數)를 원리로 취하든, 모든 존재를 가능케 하는 발판을 근거로 하든 자신의 삶에 확실한 무엇이 있다는 것은 귀한 일이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이 지나면 교회와 성도들은 십자가를 중심에 두고 걸어가던 고난의 걸음을 뒤로한 채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기 쉽다. 이는 십자가가 그들의 삶에 중심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십자가가 모든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도 않기 때문이다.
목회현장도 예외는 아닌 듯하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면 한없이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평생을 붙잡고 걸어가도 후회하지 않을 근본원리가 과연 자신의 목회여정에 있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다. 주님을 알지 못하고 살아간 세상의 철학자들과 사상가들도 자신의 이론과 신념에 일생을 걸었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
그리스도의 제자요 목회자로 부름 받은 자에게 그 출발점은 당연히 주님의 말씀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 말이다.(마 16:24)
누가는 이 말씀을 기록한 후에 제자가 되는 것에 필요한 계산에 대하여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첫째는 망대를 세우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둘째는 일만의 군사를 거느린 임금이 이만의 군사를 거느린 임금과 싸우기 전에 먼저 승산이 있는 싸움인지 생각할 것이라고 하였다. 미리 생각하고 계산하는 일이 없이 따라가면 끝까지 갈 수 없고 승산이 있는 싸움인지 아닌지 미리 계산하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르면 주님을 바라보고 끝까지 달려가지 못한다. 어느 순간 주님보다 돈을 추구하고 정치적인 힘을 의지하며 자기존재를 규명하는 기준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영적전쟁이며 승리를 위한 계산도 필요하다. 이 계산에는 내가 변수가 될 수 없고 오직 주님이 승리의 변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활주일을 지나면서 잠시 어긋난 길에서 방황했더라도 주님 앞에서 다시 계산해보자. 지금 나의 싸움이 승산이 있는 전쟁인지 말이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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