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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이 밝히는 개혁주의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학

by 김경호 진실 2022. 9. 15.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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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www.daehaak.org ) 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1. 예배의 정의와 요소 그리고 요 4:24

1.1. 예배의 정의

개혁교회는 개혁신학과 그것이 표출되는 예배와 성도의 삶으로 차별성을 확보해야한다. 바른 차별성이 확보될 때 개혁교회가 제도화 되었다느니, 화석화된 무미건조한 것이라느니 하는 오해와 불평이 소멸될 것이다. 개혁교회는 항상 개혁해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16세기 교회 개혁의 정신에 입각한 지속적인 개혁이 신학과 예배에 적용될 수 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사제 중심의 형식적인 천주교의 예배도 아니며, 개인의 뜨거운 감정을 중시하는 인간 중심의 오순절 계통의 예배와 다르다.

예배는 구약의 경우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행한 봉사(service)와 관련된다. 이것이 우리의 공예배(public service)에 해당한다. 교회 직분의 역할이 드러나는 장(場)이 주일의 예배와 모임이며, 그 중 공예배는 모든 성도의 삶의 절정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과 그의 언약 백성(영적인 의미에서 천사와 이미 죽은 자들도 포함하여)과의 천상의 만남이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시간이다(히 12:22).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개혁교회의 예배는 ‘언약적 예배의식’(covenantal liturgy)의 특징을 가진다(참고 판 도른, 1994:16).

1.2. 예배의 요소

예배로의 부름, 복의 선포, 말씀과 계명의 낭독, 말씀의 선포 등은 하나님 편에서(a parte Dei) 내려오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을 부름(votum), 신조의 고백, 기도(설교전의 회개기도, 설교의 조명을 위한 기도, 목회-감사기도)와 찬송, 회개 그리고 헌금은 교회가 하나님께(a parte homini) 올려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은 순전히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올려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는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신 쌍방적인 교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은 성경의 모든 언약이 종주권적 성격처럼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것이지만 사람을 그 파트너로 삼아서 순종을 요구하는 쌍방적인 것이라는 사실과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배의 하나님 중심성이다. 구약 성전의 모든 기물과 그 위치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만들어지고 배치되었다.

말씀은 설교자의 신변잡기에 관한 담론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언약적 구원 계시의 선포이다. 찬양은 인간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강복선언(benediction)은 기도가 아니라, 언약의 백성을 예배에 부르신 3위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이며, 복을 주사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이다.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도록 비는 것이다.

대체로 개혁교회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은 흐름을 가진다(판 도른, 1994:27-28):

1. 개회

(a) 예배로의 부름(이를 위해 시 124:8절을 읽는 것을 1574년의 도르트 총회에서 결정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부름 인간이 하나님 보다 먼저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발생하지만, 실제 하나님의 환영 말씀을 읽기에 이 부분에서도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고 계신 것이다. 설교자 혼자서 한다면 회중을 등지고 한다. 그러나 성도 전체가 같이 할 수 있다 판 도른, 1994:32-33, 39; 이것 보다 먼저 설교자와 찬양대가 강단으로 행진함으로써 보좌로 나아감을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회중도 이 시간 잡담하지 말고 조용히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배를 사모해야 한다)

(b) 강복선언(고전 1:3; 계 1:4-5; 혹자는 '축복 인사'라고 부르는데 바람직한 용어인지 의문이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이 우리를 복된 교제로 부르심이다 이 시간 회중은 눈을 뜨고, 승천 시에 손을 들고 축복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탕자를 맞이하시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야 한다. 판 도른, 1994:35)

(c) 찬송(당연히 '시편송' 중에서 창조와 구원 그리고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는 3위 하나님을 순전히 높이는 송영[doxology]을 해야 한다)

2. 죄의 공적인 고백

(a) 십계명 낭독(출 20; 신 5; 그리고 마 22장의 요약도 같이 읽음 성도의 지난 1주일의 삶을 십계명에 비추어 돌이켜 본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낭독되어야지 교독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
(b) 죄의 공적인 고백
(c) 죄 용서의 선포 (예배는 화해에 기초한다)
(d) 감사 찬송 (사죄에 대한)

3. 말씀의 봉사

(a) 설교 조명을 위한 기도(설교자의 입과 회중의 마음을 역기 위해)
(b) 성경 봉독(신약과 구약을 같이 적어도 두 구절은 읽어야 계시사적 설교가 된다. 설교 본문을 나중에 읽어야 한다. 설교자는 실수 없이 힘 있고 엄숙하게 읽기 위해서, 미리 여러 번 소리를 내어 읽어야 한다. 관련 교리문답도 읽을 수 있다. 판 도른, 1994:48. 설교 본문을 교회력에 따라 엄격히 설교할 이유는 없다.)

(c) 설교 본문으로 인도하는 기도송(예. 시 119편 한국에서는 이 시간에 설교 본문과 관련된 찬양대의 찬양이 있으나, 개혁교회에서는 찬양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회중의 찬양을 돕는 것으로 보고, 특정인이 찬양하는 것을 반대한다. 판 도른, 1994:74)
(d) 설교
(e) 회중의 아멘송(설교에 대한 화답이다. 개혁교회 설교자의 설교는 설교자의 '아멘'으로 끝난다. 그러나 회중 전체가 아멘을 말하는 것이 공중 예배의 성격상 더 낫다)

4. 성례집행

(a) 세례
(b) 성찬(칼빈은 제네바에서 성찬을 매주 시행할 것을 주장했다. 보이는 설교, 언약의 갱신 성찬 전에 장로는 구역원을 미리 심방해야 한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광고는 물론 성찬과 관련된 설교를 해야 한다. )

5. 기도와 중보

(a) 목회기도 (존 스토트는 성도는 물론 온 세상과 모든 영역을 위한 기도시간으로 보아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그러므로 기도 목록을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중보기도의 성격이 많기에, 하나의 간구마다 회중이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다)

6. 자비의 사역

(a) 헌금(수금은 집사들이 빠른 시간 안에 하는 것이 좋다 헌금은 교회 운영은 물론 자선, 구제, 선교 등에 사용되어야 한다. 헌금하는 동안 오르간의 연주가 있다. 개혁교회에서는 오전, 오후 예배 후 문에서 헌금을 다시 한다. 이 헌금은 집사들이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7. 폐회

(a) 마침 찬송(예배 가운데 임하신 거룩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찬송한다. 한국에서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성도의 행군가와 같은 힘 있는 찬송을 선택하기도 한다.)

(b) 복의 선언(민 6:24-26, 고후 13:13 등을 읽는데, 1567년 화란 예배에서 이미 나타난 현상이다 성경 그대로 하는 것이 좋다. 판 도른, 1994:35. 강복선언이 마치기 전에 움직이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큰 무례를 범하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세상 속으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게 된다)

참고로, 특별한 임직식(목사. 장로, 집사)은 예배 중, 설교 후에 한다. 찬송가 뒤에 붙어 있는 직분자의 사명과 관련된 내용을 읽고, 성도가 같이 임직하는 일군을 위해 축복송을 부르는 것으로 마치는데, 그 시간은 10분 정도 소요된다.

치리는 죄의 공적인 고백이전 혹은 이후에 할 수 있다. 세례와 입교는 성찬 전에 할 수 있다. 광고는 예배에 속하지 않기에, 예배 시작 전에 해야지, 후에 하면 광고가 예배의 절정이 된다. 타 교회에서 설교자가 온 경우, 예배 시작 전에 일으켜 세워 소개하고 환영해야 한다.

성찬식 때에는 타 교회의 성도가 온 경우 미리 당회의 허락을 맡고, 설교자가 예배 전에 그 사람의 이름을 회중 앞에 불러서 광고해야 한다. 교회와 관련된 사항만 일고, 나머지는 부조를 참고하라고 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판 도른, 1994:72).

오후-저녁 예배 시에는 찬양 인도자가 대로 회중에게 부르고 싶은 찬송을 물어서 여러 곡을 미리 찬양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주일에 두 번 예배를 드리는가? 회당 예배는 토요일에 두 번, 주후 2-3세기의 회당 예배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기도
쉐마를 읽음(Shema: 신 6:4-9, 11:13-21 그리고 민 15:37-41로 구성됨),
기도
율법 낭독(안식일에는 7명이 낭독함. 낭독 후 통역자[methurgeman]가 아람어로 번역[targum]해 주었다)
선지서 낭독 (아마 율법을 설명하기 위해)
감사기도
성경 교훈의 설명 (눅 4:20)
제사장의 축복기도와 회중의 아멘으로 구성되었다.

회당의 전면은 예루살렘을 향했고, 결례를 위해 물이 많은 곳에 위치했으며, 여자들이 상좌를 차지한 것 같고, 율법 두루마리와 성문서들을 담고 있었던 궤가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 회당 자체와 예배는 초대 기독교의 발전에 직접적인 거점 혹은 모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초대 교회는 주일에 두 번, 중세 시대에도 두 번 예배를 드렸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개혁가들은 주일 오후에 성도를 모아 교리문답을 52주 주제별로 설교했는데, 이것이 오후예배의 기원이다(판 도른, 1994:75).

블링거는 1532년에, 루터는 1533년에 비텐베르그에서 교리문답 설교를 시작했다. 1563년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완성되었을 때 이것에 따라 오후에 설교했다. 예배로 나아오는 성도의 의복은 마음의 준비의 표출이므로 가능하면 정장차림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 목사가 성의, 더욱이 박사가운을 예배 중에 입을 이유는 없다.

1.3. 요 4:24절의 의미

예배에 관해 가장 중요한 구절 중 하나인 요 4:24절에서 예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즉 '성령과 진리' 안에서, 즉 진리의 성령님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한편으로 여기서 '진정'은 '진리' 혹은 '참'인데, 거짓의 반대말이 아니라, 요한복음에서는 그림자의 실체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신령과 진정으로'라는 말씀은 '성령님께서 가져오시는 실체'라는 의미이다. 예루살렘 성전 제사나 그리심산의 성전 제사는 실체가 오기 전의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특별히 공예배 가운데 성령에 의해 천상의 실체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면서 드리는 예배가 바람직하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예배는 메마르다. 출애굽의 목적이 예배이듯이(출 10:3), 성도는 예배하기 위해 구원받은 사람이며, 예배 중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공예배(그리고 기도회) 자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공예배의 감격과 사모함이 없고 지루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다(토저, 1998:14). 크리스천 연예인과 운동선수 혹은 인기 스타, 간증, 종교적 쇼와 같은 것을 중심으로 드리는 예배(?)는 사람의 기쁨과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인본주의적 발상이 결과이다. 거기에 지성소의 영광과 임재는 찾아 볼 수 없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변질은 교회와 신앙 그리고 우리 인생의 변질-실패로 이어진다.

2. 예배인가, 예전인가?: 공예배의 예전으로의 회귀의 필요성

공적인 예배는 다른 날에도 가능하지만, 특별히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공적으로 회중이 모여서 드리는 경배인데, 새벽, 수요, 금요, 구역, 가정 기도회와는 구별된다. 공적인 예배 (public worship)는 역사적인 구원 사역을 예전적 의식(liturgical ritual)을 통하여 재현함으로써, 회중이 이 사역의 주인이신 삼위 하나님을 뵈옵고 누리는 교제이다. '예전' (liturgy)은 신자들이 공적 모임에서 행하는 바이다. 반면 '예배'는 예전과는 다소 다른데, 개인과 가정과 특정 집단이 행하는 기도를 포함한 경건 생활을 지칭한다.

한국의 공예배는 예전적이지 않고 집회적 성격을 띤다. 이 말은 공예배 시에 하나님의 구언의 사역을 재현하는 예전이 희박하며, 간소한 예배 순서를 따라 말씀과 찬양 중심의 집회적 형식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한국 교회의 예배가 이렇게 간소화된 집회 중심의 형식을 띠게 된 것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한 미국 선교사의 영향이다.

미국 선교사들은(실제적으로는 성공회의 예전을 따르지 않은) 청교도와 부흥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 주로 준비찬송과 회심에 초점을 맞춘 설교의 형식을 한국에 심어 주었다. 자연스럽게 찬송과 설교는 주관적인 회심과 감정을 표출하는 간증의 시간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띠게 되었다. 이 주관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기도자는 3위 하나님을 높이면서 시작해야 한다. 설교자는 개인의 체험이 아니라 3위 하나님을 드러내는 선포를 통해서 회중이 3위 하나님을 만나도록 해야 한다. 찬송도 회심의 체험이나 간증 형식이 아닌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송영적 찬송과 시편송을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찬양과 공적인 기도와 설교는 구원의 삼위 하나님을 만나도록 허락된 은혜의 방편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체험이나 의견을 개진하는 식으로 사용될 수 없다. 한국 공교회가 비예전적이며 주관적인 집회적 모임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지만, 예전의 회복이 필요하다. 물론 매주 시행하는 성례 및 공중 기도서를 사용한다든지 하는 예전의 회복은 정적이고, 메마르며 객관적인 면이 있어서 형식주의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마치 로마교로 회귀하는 듯한 오해도 받을 수 있다. 예배에 대한 신학적 기초가 미비할 뿐 아니라, 예전이 발전되지 않은 한국적 상황에서는 예전의 회복이 마치 서구의 교회를 답습하는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도 감수해야 한다. 목회자는 말씀의 사역자인 동시에 성례의 집례자이기도 하다. 성례의 빈번한 정기적인 시행은 공예배가 예전적인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계속 교육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배의 예전적 형식의 회복을 한국적 심성에 맞게 시도해 기야 한다. 유해무교수가 ‘개혁신학과 교회’ 2005년 제 18호에서 제안하듯이, ‘예수님이 좋은 걸’과 같은 민요풍의 찬송을 춤과 함께 성찬식 직후에 부르는 것은 참으로 멋지게 보인다. 예전의 회복을 위해서, 시편에서 가르치는 정숙한 음과 말씀에 기초한 시편송도 하나씩 도입할 것이다.

이미 우리는 복의 선포를 예배 시작과 마지막에 두 번이나 하고 있다. 성찬의 방식도 예수님의 최후 만찬을 재현하는 차원에서 성도 중에 자원하는 12명을 성찬상 앞으로 초청하는 방식도 시도해 볼만하다. 설교도 예화와 간증의 범벅이 아니라, 3위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중심으로 하여 회중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할 것이다.

무엇보다 예배 중에 우리를 만나시는 3위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공예배의 회복은 교회의 회복이고, 이것은 곧 부흥이다. 하나씩 성경적으로 돌이키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깨닫는 마음과 하나된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자.

(1) 세례- 유아세례 시에는 할아버지, 고모, 이모 등 친척을 다 초청하여 교회의 잔치인 동시에 가족의 잔치로 승화시켜야 한다. 가족이 모두 앞으로 나와서 같이 축하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우리도 손자, 손녀의 유아 세례 시에 다른 교회에 참여하여 축하할 수 있다. 세례 시에는 모든 교인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거듭남의 은혜를 더욱 분명히 하여 잔치로 승화시킬 것이다. 앞으로 세례식문을 확정하여 읽을 것이다.

(2) 성찬식- 성찬상에 13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준비하여 주님의 제자들과 같이 가지신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방식을 도입할 것이다. 앞으로 성찬식문을 확정하여 읽을 것이다. 성찬식 후 한국식 장단에 맞추어 춤과 노래로 우리의 풍성한 생명 얻음을 축하할 것이다.

(3) 설교- 3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밝힌 성경이 그대로 선포되어, 회중이 3위 하나님을 만나도록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가급적 간증, (교회사나 성경에서 나오지 않은) 예화, 개인의 신변잡기적인 언급은 지양할 것이다. (4) 시편송을 도입하여 성경적 찬송을 부르도록 할 것이다.

(5) 절기에 따른 행사- 종려 주일에는 야자나무 가지를 든 사람들이 교회 입구에서 두 줄로 서서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를 맞이한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고난을 다시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다. 성령강림주일에는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차원에서 전도 잔치를 벌여야 한다. 그리고 부활절과 성탄절에도 본래의 의미를 더 분명히 나타내어야 한다.

이미 대학교회는 다른 교회에서 보기 힘든 승천기념 예배, 니케아신경, 아다나시우스신경 등을 도입하고 있다. 개혁교회, 행 29장을 계속 쓰는 신사도행전적인 초대교회를 이루어 막대한 영향력을 한국 교회에 미칠 것이다. 이런 노력은 형식주의로의 회귀와 서구 답습적 교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3. 천상의 예배를 이루는 지상 예배: 계 4:1-4절을 중심으로

“이 땅에서 드리는 천상의 예배"라는 제목으로 "나는 여기서 천상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계 4:1절은 세대주의자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구절입니다. 계 4:1을 통해서 세대주의자들은 요한이 하늘에 올라간 것은 주님의 재림 전에 교회가 대환난을 겪지 않기 위해 휴거 되는 것으로 본다.

그들의 주장의 근거는 계 4:1절 이후로 더 이상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는 용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기에 교회는 더 이상 지상에 존재하지 않고 휴거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틀린 것이다. 예수님이란 이름도 계 4장에서 11장까지 한 번도 등장하지 않기에 계 4-11장 까지는 예수님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가? 없다.

첫째로, 왜 우리는 여기서 천상의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에 앉힌 자이기 때문이다.
계 4:1은 '이 일 후에'로 시작한다. 이 일이란 계 2-3장에서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말씀한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계 2-3장과 계 4장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계 3:21-22에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던 하나님의 보좌가 계 4:1-4의 가장 중요한 단어로 등장한다.

요한이 열려진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간 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펼쳐진 환상을 보기 위해서이다. '하늘에 열린 문'이란 말에서 '열린'은 '과거로부터 계속해서 열려져 있는'으로 수동형으로 묘사된다. 요한이 열었던 문이 아니다. 즉 신적 수동태로서 하나님에 의해 열려진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상징적인) 하늘 문을 열어 두시고는 하늘 나라의 비밀을 교회에게 계시하기 원하셨다.

그러므로 지금 요한은 '계시의 문'을 통과하고 있다. 이렇게 하늘에 올라간 요한이 앞으로 볼 것은 마땅히(반드시, dei) 될 일들(중복대 관대)이다(1절). 성령의 감동으로 하늘에 올라간 요한은 무엇을 보았는가? 보좌에 계신 하나님과 그 주위에 24명의 장로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말은 역사의 주관자가 요한 당시의 로마 황제나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이나 헤롯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이 사실을 누구나 다 듣고 알아야 했기에 계 4:1에서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이 하늘에서 들렸다. 3절에 보니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은 벽옥, 홍보석, 녹보석과도 같았다(출 28:17; 겔 28:13). 벽옥은 위엄, 청결, 거룩을, 홍보석은 진노와 심판을, 녹보석은 자비를 상징한다. 이 세 보석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 휘황찬란함, 영광스러움, 위엄과 거룩함을 동시에 나타낸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기에 요한은 단지 이 땅에 있는 보물로 하나님을 묘사할 수밖에 없었다.

보좌에는 또한 무지개가 나타났다. 무지개 역시 하나님의 영광스런 빛을 상징한다. 요한이 하늘에서 본 것은 하늘의 보좌 앞에 있는 24 장로들인데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송했다. 24장로는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와 신약의 12 제자로 대표되는 신구약 모든 시대의 교회를 상징한다. 모든 교회가 보좌에 앉으신 왕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 준 것이다.

이런 천상의 모습은 우리와 무슨 관련 있는가? 비록 우리는 이 땅에 잠시 살지만 영적으로는 하늘의 24장로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이미 하늘 보좌에 앉아 있으면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이다. 계 3:21-22에 근거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이기는 자로 인정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를 보좌에 앉게 해 주셨다. 예수님의 보혈의 권세와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게 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과 사탄과 모든 시험과 환난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이 땅에서, 직장과 학교에서 천상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어떻게 천상의 예배를 이 땅에서 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승리와 영광과 존귀를 누리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요한이 보았던 24장로는 모든 시대의 교회를 상징하기에 우리가 24장로이다. 그러므로 24장로가 입고 있던 흰 옷 즉 순결하고 옳은 행실로 우리를 단장해야 한다. 거룩하고 위엄하며 영광스런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거룩하고 순결하고 의로워야 한다. 그리고 24장로가 앉아 있던 보좌는 우리가 왕으로서 다스리며 살아야 함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기게 하셨다면 우리는 세상을 말씀의 원칙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 24장로가 썼던 금 면류관 (스테파노스)을 우리도 쓰고 있다. 면류관은 존귀, 승리, 명예, 왕권, 영광을 상징한다. 즉 우리는 승리한 영광스런 교회임을 말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상의 예배를 드리도록 주신 것들이다. 계 1:10절에 보니 24장로는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위에 계신 하나님의 발 아래 던진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은혜를 우리의 공로로 돌리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늘의 예배를 드리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주신 영광과 존귀와 승리와 명예를 성령으로 누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을 닮는 것이 곧 하늘의 하나님을 예배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이김과 권세와 명예와 승리가 은혜로운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천상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나오는 말

요한의 독자들은 고난 중에서 이런 영광스런 하늘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요한의 독자들이 이 천상의 예배를 통해 알았던 것은 이 세상의 왕은 보좌 위의 하나님이시지, 로마 황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일이 잘 풀리지 않습니까? 고난 중에 있습니까? 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우리의 신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조사에 보니 자존감, 자부심, 자신감과 자긍심이 없는 사람은 두뇌활동이 위축되고 더 열등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세상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영광스런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는 작은 왕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기는 자로 여겨 주셨기에 더욱 영광과 의로움과 순결함과 은혜와 권세를 여기서 누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아멘.

교회와신앙 (ame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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