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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있는 성화 (고후 3:18)

성화

by 김경호 진실 2022. 10. 1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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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복음 설교가 깊이 있는 성화를 이끌어 간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김형익 목사(벧샬롬교회)
우리는 거룩의 기준이 바닥을 치고, 죄를 심각하고 깊이 있게 다루지 않으며,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을 불편하게 여기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교회를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교회에서는 회심만 드물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열매도 보기 어렵습니다. 참된 회개는 그에 상응하는 삶의 변화와 열매를 가져옵니다.(마 3:8)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레 19:2; 엡 5:25~27; 골 1:22; 요 17:17)

성화는 은혜와 믿음으로 칭의를 얻은 성도가 자기 노력으로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성화도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다만, 성화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사람이 행하는 역할에서 칭의와 구별됩니다. 오늘날 성화의 열매를 보기 어려운 것은 한 마디로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외적 은혜의 수단들을 등한시하며 살아가며, 날마다 회개함으로 죄를 죽이는 일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도들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데에 큰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속하는 것과, 성도 개개인이 은혜의 수단들을 신실하게 사용하는 것이 모두 중요합니다. 오늘은 성화의 맥락에서 은혜의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성화는 은혜의 동력으로 시작되고 진행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도의 영혼에 거룩한 소원을 주심으로써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도록 주도하십니다.(빌 2:12~13) 그러나 은혜의 수단들이 자동적으로 은혜를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고, 은혜를 받을 때 사람은 거룩하게 변화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는 죄인을 거듭나게 하신 그 말씀으로 신자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십니다.(벧전 1:23; 약 1:18; 요 17:17) 고린도후서 3장 18절은 성화와 설교의 관계에 통찰을 제공하는데, 이 본문을 이해하려면 출애굽기 32~34장을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 구약 본문을 배경으로 고린도후서 3장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이 지쳐서 아론을 부추겨 금송아지를 만들게 됩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죄의 문제를 무섭게 다루었지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과 동행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대신 천사를 보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는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출 33:1~3)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엎드려 간구하는 모세에게 결국 하나님은 함께 가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주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기도에도 응답하십니다.(출 33:18) 하나님께서는 다시 산으로 올라온 모세를 반석 틈에 숨기시고 당신의 성호와 성품을 선포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출 33:19~34:9)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40주야를 보내고 산에서 내려온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이 광채 때문에 아론과 백성은 모세의 얼굴을 보기를 두려워했고 모세는 사람들을 대할 때 얼굴에 수건을 써야만 했습니다.

여기 두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하나님을 닮아 그 빛을 반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금송아지를 섬긴 죄로 아론과 백성들은 모세의 얼굴에 반사되는 영광조차 바라볼 수 없었기에 반사되는 영광이라도 봄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은혜의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두 교훈은 성화와 관하여 매우 중요한 통찰을 줍니다. 바울 사도는 40주야를 산에서 보내며 하나님의 영광을 본 모세의 얼굴에서 그 영광의 빛이 반사되어 나타난 것을 신약 성도들에게 적용합니다. 사도는 수건이 벗어진다는 것을 중생에 비유하면서, 중생한 성도들은 계속해서 주의 영광을 봄으로써 주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간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성화의 열쇠는 하나님의 영광을 거듭해서 보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 성도는 이미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변화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고 말합니다. 거듭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들을 때, 주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소위 ‘은혜 받는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무한하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앞에서 티끌과 먼지에 불과한 자신을 각성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하나님이 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하던 사람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그런 말은 쑥 들어가고 욥처럼 회개를 하게 됩니다.(욥 42:5~6)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고 참된 경외가 일어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길 원했기에, 사도는 말씀에 물을 타지 않고 말씀 그대로 순전하게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전했다고 말합니다.(고후 2:17; 4:2) 여기에는 베뢰아 성도들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태도와(행 17:11) 성령님께서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우리 심령을 각성하게 해주시는 역사도 필요합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을 뵈올 때, 사람은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거룩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는 주의 말씀이 선포되고(히 4:12) 그 말씀을 믿음으로 듣는 사람은 결코 피상적 수준에 머물러 살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해줍니다.(딤후 3:16~17)

참된 복음 설교는 깊이 있는 성화의 열쇠입니다. 다른 은혜의 수단들이 사소하고 별 것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성도는 영적 나태에서 벗어나, 전과 다르게 간절한 심령으로 은혜의 수단들을 붙잡고 은혜를 구할 것입니다. 날마다 은혜 받는 심령으로 살게 되고, 그때 깊이 있는 성화의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 사건에서 배우는 첫 번째 요점,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룩하게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점입니다. 아론과 백성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두려워서 모세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하나님의 광채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론과 백성은 거룩한 변화의 기회를 잃어버렸습니다. 성화에 관한 중요한 교훈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고 사소하게 여기고 살아간다면, 아무리 말씀을 듣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공부해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보는 일을 막게 되고 결국 거룩의 기회를 박탈당하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마 25:29) 은혜를 받는 사람은 더 은혜를 받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있던 은혜도 빼앗기고 맙니다.

성도가 추구할 것은 은혜를 받아 거룩한 변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19세기의 거룩한 사람 로버트 머리 맥체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언제나 양심을 청결하게 하고,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며, 구속 받은 죄인이 이 세상에서 도달하기에 가능한 만큼 지·정·의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가장 큰 현재의 행복을 얻고, 하나님의 영광과 인류의 복지를 위해 가장 많은 일을 하며, 영원 속에서 가장 충만한 보상을 얻는다고 확신한다…. 나를 지배하고 있는 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 나는 내 꿈과 마음에 오가는 생각들, 좋아하는 것, 종종 반복하는 행동들, 원수가 내뱉는 참소, 그리고 친구들의 질책이나 심지어는 농담까지도 살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우리 중에 있다면, 많은 사람이 그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피하려고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이 사실이라면, 거룩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 교회의 형편은 맥체인의 바람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현실을 보여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자신을 포함해 목사들부터 그러합니다.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의 말입니다. “제 사역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언제나 제 신앙과 고백을 이상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려 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언제나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며, 기도와 감사와 권면과 위로하는 일에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너무나 자주 변화되는 상황에 제 자신이 흔들리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고된 일이며 불평을 일으키고 종종 감각이 마비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로버트 머리 맥체인이 설교를 하려고 강단에서 기도를 시작하면 회중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는 “설교자의 과업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거룩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설교자와 설교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씀을 듣는 회중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형상으로 변화되는 거룩한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날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거룩함은 목회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목사를 위한 거룩의 기준과 성도를 위한 거룩의 기준이 다르지 않습니다. 깊이 있는 교회는 목사와 성도 모두가 거룩을 추구하는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는 가벼운 농담이나 재미있는 말들로 교제의 기쁨을 누리고 만족하지 않으며, 지적 욕구나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설교 잘 하는 목사가 아니라 거룩한 목사 그리고 주의 영광을 보려는 간절한 열망으로 주의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십시오. 경건한 어른이 가득한 깊이 있는 교회를 보고 싶습니다. 깊이 있는 회심이 일어나면 깊이 있는 성화도 일어납니다. 회심과 성화는 깊이 있는 교회의 두 날개입니다. 회심과 성화, 이 두 가지 은혜를 구하며 깊이 있는 교회로 나아갑시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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