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섬 목회를 시작할 때, 아내는 임신 3개월 차였다. 그런데 나로도에 부임해 출산한 아들이 심장협착증이었다. 다습한 환경에 집안에는 곰팡이가 쌓이고, 아기는 폐에 가래가 차서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를 받았다. 하루에 배가 네 번밖에 뜨지 않는 나로도에서는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당시 거금도월포교회에서 목회자를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섬에서 또 섬으로 가는 것을 고민할 겨를도 없이 바로 부임했다. 아기는 함께 오지 못했다. 결국 서울대병원에서 14개월의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 품에 안겼다. 그 고통과 슬픔을 뭐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성도들은 젊은 목회자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아들 간호로 부부의 병원생활이 일상처럼 되었어도 걱정과 슬픔을 함께해주었고, 각자 형편이 어려운 중에도 상당액의 병원비를 도와주었다. 그 무렵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고, 이모저모 도움을 주었던 많은 분들의 사랑을 지금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월포교회가 위치한 곳은 거금도 안의 30여 마을들 중 70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녹동제일교회를 섬기시던 고 강채영 장로님은 1980년대에 사비를 들여가며, 고흥 일대의 여러 섬에 교회를 세우셨다. 월포교회도 그 중 하나였다. 강 장로님은 교역자가 없을 때, 직접 배를 타고 월포교회까지 찾아와 예배를 인도해주시기도 했다.
부임 당시 월포교회는 마을에서 비난과 냉대를 받는 존재였다. 주민들을 처음 만나 인사하는 내게조차 ‘교회가 잘 해야 한다’는 압력이 있었다. 앞서 월포교회에서 사역했던 세 분의 목회자들도 시무기간 고초를 겪었다고 들었다. 어느 전도사님은 주중에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 사모 혼자 있는 사택의 전기를 누군가 끊어버리는 바람에 마음고생이 심했다.
교회가 크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이런저런 시비가 생겼다. 누군가의 며느리 혹은 아내가 교회에 나가면 집안에서 반대와 핍박이 일어났고 가정불화가 발생했다. 마을의 성인 남자가 교회에 나오는 일은 상상조차 어려웠다. 교회에 잘 나오던 아이들도 중학생이 되면 어른들 눈치를 보다 빠지기 일쑤였다.
가장 어려운 일은 성도들 장례를 치를 때 시신을 운구하는 일이었다. 마을에는 연령대별로 상여를 메는 계가 조직되어 있었지만, 교회의 장례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난감한 상황일 때 급하게 달려와 상여를 메준 녹동제일교회 성도들의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까지 목회의 길을 잘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동역자들의 이런 사랑과 희생 덕분이라 여기며,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이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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