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감정과 생각들
오늘은 함께 시편 77편을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자신의 감정을 여과없이 토해내고 있습니다. 위로 받기를 거절할 정도의 애통한 심령을, 불안하여 상한 심령을,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그가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나를 향한 긍휼을 그치신 것은 아닌가 등등. 시편기자는 자신의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억눌러서 삭히는 대신에, 하나님을 향한 절규로 바꾸어 냅니다. 본문에서 절규하는 시편기자는 휼륭한 기도의 모델입니다. 내적인 생각과 감정을 하나님을 향한 절규, 즉 하나님을 향한 말건넴으로 전환시키고 있는거죠. 시편기자가 제공하는 기도의 모델은 내적인 생각과 감정을 하나님과 대화로 전환시키는 훈련입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의 깊숙한 곳에 들어가서 용솟음 치는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해야 합니다.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공상들, 어지러운 생각들, 근심, 원한 등등. 감정, 생각과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이러한 것들을 꺼내어서 소통 가능한 말의 형태로 바꾸는 것이 기도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내면을 언어로 구체화 시키는 훈련이라는 겁니다. 어떤 생각과 감정이든지 간에, 음흉한 생각, 부적절한 감정, 교만한 마음, 저질스러운 상상 등이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로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전환될 때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독백에서 하나님과 대화로 연결됩니다.
이런 비밀스러운 감정과 생각, 공상들은 당신을 타인과 분리합니다.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당신 만의 내면과 정신의 공간이거든요. 하지만 이러한 비밀스러운 것들을 꺼내어 하나님을 향하여 말로 던질 때,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게 됩니다. 하나님 하고만 공유한 지점이 생겨나면서,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비밀스럽고 친밀한 관계로 돌입하게 되는거죠.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이고 싶을 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내 안에 품고 있던 은밀한 생각과 감정, 사연들을 나누는 것이거든요. 감정과 생각, 관념의 형태로 내면 속에 꼭꼭 숨겨두었던 것을 말의 형태로 하나님 앞에 꺼내어 놓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 합니다. 자신의 내면 속에 있는 것들이 도저히 하나님과 공유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아도 될까 주저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품고 있는 그런 생각과 감정들은 당신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지 않습니다. 정죄해야 될 생각과 감정들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과 당신만이 나누는 은밀한 대화의 수단입니다. 하나님과 더 깊고 비밀스러운 관계에 돌입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아주 특별한 감정과 생각들인거죠. 영적으로 의미있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도하=연합뉴스) 김주성 기자 = 2022 카타르 월드컵 16강에서 한국과 맞붙는 브라질 축구대표팀의 네이마르가 4일 오후(현지시간) 카타르 도하의 알아라비 SC 스타디움에서 기도를 하며 훈련을 시작하고 있다. 2022.12.5/ 코닷-연합 제휴 재사용 금지.
새로운 차원의 관계
그렇게 당신의 특별한 감정과 생각들을 기도로 전환하여 하나님께 전달하고 나면,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새로운 차원에 돌입하게 됩니다. 설사 당신은 그냥 감정을 마구 배설하고 나서 시원해진 기분 그 이상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따뜻한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비밀을 듣고 나면 그 사람을 특별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이전보다 더 마음이 쓰이고, 계속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이 견뎌내야 했을 고통이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한 사연을 어떤 마음으로 지고 살아왔던 것일까 등등.
그 사람이 이전보다 나의 내면과 생각 속에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뭔가 좋은 것이 있으면 더 챙겨주고 싶어집니다. 그 사람을 향한 사랑과 긍휼이 커지기 마련이죠.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그저 하나님에게 토로하고 뒤돌아선 것일 뿐이나, 당신의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 더욱 커져 갑니다. 당신을 향한 사랑과 긍휼 역시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비밀스러운 생각과 감정, 상상의 공간에 누군가를 초대하고 나면, 상대방 역시 당신을 향하여 자신의 비밀스러운 내면의 영역을 열어보이기 쉬워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의 비밀스러운 내면을 하나님을 향한 대화로 바꾸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기묘하고도 신비한 비밀의 영역으로 당신을 초대하시는 겁니다. 당신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것들을 기도라는 대화로 바꾸어 털어놓게 될 때에,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지게 되는거죠. 처음에는 체감하지 못할 것이나, 어느 순간 당신의 존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특별해졌는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 반드시 옵니다.
도리어 이런걸 기도해도 되나 라는 의문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얄팍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이것까지 공유해야 되나 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꼴이거든요. 하나님을 향하여 여기까지만 공유하겠습니다 라고 외치는 꼴이거든요. 그렇게 서로가 깊은 비밀을 공유하는 사이를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깊은 신비와 비밀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더 커져지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가운데 당신의 자리가 더 이상 확장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생각과 감정들을 기도의 제목으로 내어놓지 말아야 한다는 정죄하는 가르침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은혜를 막아 서는거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 가지 분명하게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과 감정 자체를 미워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인간의 나약함이 발생하는 불가피한 것임을 아시기 때문에 다 이해하시고 용납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다 털어놓고 관계를 더욱 깊어가도록 하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실 뿐입니다. 그런 생각과 감정들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내면과 영혼의 일부분을 하나님을 향하여 닫아 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하실 뿐입니다. 그 생각과 감정을 내어놓지 않고 혼자 품고서 그릇된 방향으로 키워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실 뿐인거죠.
(도하=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26일(현지시간) 카타르 도하의 어스파이어 존 훈련장에서 2022 카타르 월드컵 조별리그 H조 2차전 상대인 가나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훈련에 앞서 기도를 하고 있다. 2022.11.27
대화: 새로운 차원
10절부터 시편기자의 감정의 급격한 변화를 목격하게 됩니다. 절규하는 시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패턴입니다. 13절은 이러한 급격한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13절을 함께 읽어 보시죠. “하나님이여 주의 도는 극히 거룩하시오니 하나님과 같이 위대하신 신이 누구오니이까” 그렇게 원망과 두려움, 불안을 표출하던 이가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감사함과 벅참이 차오르고 있는거죠. 앞서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여과없이 하나님께 던져 버리고 나니, 급작스러운 감정 변화가 시작된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비밀스러운 말을 건넨 후에 감정의 새로운 국면에 들어가게 된거죠.
어떤 생각과 감정이든지, 어떤 종류의 공상이든지, 혼자만 품고 있을 수록 자신이 처음에 생각하고 느낀 방식대로 고착화 되기 마련입니다. 꽁꽁 숨겨둘 수록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거든요. 그래서 생각과 감정, 공상의 방향이 전환되지 않는거죠. 그 결과 부정적인 감정, 어지러운 생각들, 부적절한 공상 등이 처음 시작했던 그 방향성으로 더욱 강화됩니다. 그렇게 굳어지고 그릇된 방향으로 몸집을 점점 키워갑니다. 그렇게 더욱 더 자기만의 감정과 생각, 공상들 안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소했던 그것들이 당신의 내면과 영혼을 완전히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꺼내어 놓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자신이 느낀 감정과 품었던 생각들, 고정관념들은 새로운 국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소통의 과정에서 타인의 생각과 관점, 느낌들이 개입하기 시작하거든요. 스스로를 꽁꽁 싸매고 있던 자기 자신이라는 벽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소통의 과정에서 타인의 생각과 관점, 느낌들을 접하게 되면서, 내가 차마 보지 못했던 그 감정과 생각들의 새로운 차원이 드러납니다. 상대방은 나와 접근하는 방식, 이해하는 관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죠.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을 보게 되거든요.
그렇게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사고 방식과 감정선이 단편적이었고, 일방적이었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공상이 얼마나 부적절하고 비현실적인지도 보게 됩니다. 반대 쪽으로도 깨달음이 올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 자신의 공상이 창의적이고 탁월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지요. 스스로가 하찮게 여기던 자신의 것들이 가치있는 것임을 보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비판하던 자신만의 기준이 무너질테니까요.
그렇게 내 안에 고착화 된 감정과 생각들이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 방식대로 강화 시키고 몸집을 키웠던 감정과 생각들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자연스럽게 생각과 감정의 방향이 전환되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차원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내면과 영혼을 꽉 메우고 있던 그것들이 옅어지기 시작합니다. 영향력을 잃어 갑니다.
기도: 자기몰입적 절망에 대한 해독제
마찬가지로 어떤 종류의 생각과 감정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꺼내어서 대화로 전환하면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나의 말건넴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헤아려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말씀이든지, 기도 가운데 주시는 깨달음이든지, 타인을 통해서 주시는 통찰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 자신의 내면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의 기준에서 내리는 판단 등을 접하게 됩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나의 내면의 문제들이 다루어지는 것을 보는 겁니다. 나의 틀과 기준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을 바라볼 기회를 얻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을 바라보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을 평가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놀라운 기묘하심을 마주하면서, 자기 자신 안에서 굳어졌던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이 부서지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나를 메우고 있던 것들이 힘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내면과 영혼이 비워지면서, 새로운 생각과 감정들이 스며들어 올 공간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시편기자에게 급작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벅참과 기쁨이 스며들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내 생각과 감정, 상상들을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시기 시작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선 생각과 감정의 흐름과 깊이에 이르게 되는거죠.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도란 자신의 부정적인 사고와 감정에 몰두하면서, 염려와 근심, 증오와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는 영적 행위입니다. 자기몰입적인 절망에 빠져가는 우리를 향한 구원의 통로인거죠. 하나님께 토로하면서 우리의 내면을 바깥으로 표출시키는 겁니다. 그렇게 나의 내면 세계를 다른 세계와 부딪치게 하는거죠. 하나님을 향해 나의 내면을 말로 바꾸어 던지면서, 하나님의 세계와 부딪치는 겁니다. 가장 이질적인 세계와 충돌하는거죠. 그렇게 자기 자신 안에 갇혀있지 않게 하는겁니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 의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을 말로 바꾸어 건네는 행위가 기도라면, 기도가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을 말 건넴을 통해서 이질적인 세계와 부딪치게 해서 새로운 방식과 차원으로 자신에 대해서 접근하는 것이라면, 꼭 하나님에게 자신의 내면을 말로 건네야 하는 것이냐고, 부딪치는 이질적인 세계가 꼭 하나님의 세계여야 하냐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내면을 공유해도 기도와 같은 것 아니냐고. 다른 이질적인 세계와 마주하는 것도 기도와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말입니다. 환언하면, 기도가 타인과의 진솔한 대화와 무엇이 다르냐고, 기도가 새로운 세계를 만나서 생각이 바뀌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의문을 품는 겁니다.
저는 이러한 의문을 향해 대답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그러나 다시 답변할 것입니다. 종류는 같으나 깊이와 차원이 다르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로서 말을 건네는 하나님은 우리와 가장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하나님의 세계는 가장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세계라고.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가장 근본적으로 넘어선 궁극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느끼며, 상상하게 돕는 행위인거죠. 하나님과 소통을 통해서 신적인 차원에서 자신 내면 안에 가득한 것을 재검토하는 작업인 겁니다. 자기 자신 안에서만 처리하던 감정과 생각들을 새롭고도 가장 높은 차원에서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자신의 내면의 문제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신비로운 자기 내면의 이해에 닿게 되는 겁니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자기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나의 모든 내면의 것들을 말건넴으로 바꾸는 기도란 자기 자신이란 껍질을 깨고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하는 기적의 통로인거죠.
다 토해내십시오
여태까지 나눈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 내면 안에 들끓고 있는 모든 것들을, 종류가 무엇이든지 간에, 적절하든지 부적절하든지 간에, 모두 하나님께 건네는 말로 바꾸어 내는 것이 기도라고.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깊은 차원에서 교제하게 된다고 배웠습니다. 나아가서 내면의 모든 것을 꺼내어 하나님과 부딪치는 행위로서 기도는 자신이라는 견고한 성벽을 허물어 트린다고. 새로운 차원, 즉 하나님의 신적인 차원과 방식에서 자기 내면을 새롭게 평가하고 바라보게 된다고. 그 결과 자기 몰입적 절망과 부정성에서 해방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차원의 감정과 생각, 상상이 스며들게 된다고 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권면드립니다. 다 토해내십시오. 모든 종류의 공상과 부적절한 생각, 용납받을 수 없는 감정들까지 모두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까지. 의심과 원망, 증오까지 빠짐없이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은 오해의 질곡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차원의 관계로 돌입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오해하고 미워했다가, 오해의 질곡을 넘어서고 나면 더 깊은 관계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어쩌면 우리의 기도가 너무 천편일률적이었기에, 기도에서 누릴 수 있는 이러한 신비를 맛보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양한 감정이 표출되는 기도가 아니었던거죠. 단편적이고 반복되는 감정과 생각만이 표출되는 기도였던 겁니다. 우리의 기도를 살펴보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내뱉기만 하는 기도가 대부분이죠. 무언가가 이루어지기만을 원하는 감정이 반복적으로 표출되는 기도였던 겁니다.
이러한 기도는 딱 정해진 틀에 하나님과 당신을 가두어 버립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소원을 내뱉고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주시든지 거절하시든지 딱 정해져 버리는거죠. 우리의 소원이라는 틀 안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와 상호작용이 갇혀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뻔한거죠. 응답 받든지, 받지 못하든지. 그래서 기도 가운데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게 되는 자기 내면의 이해, 자기라는 성벽이 무너지면서 새롭게 스며드는 감정과 생각, 상상, 판단 등 다양한 모양의 은혜를 경험해보지 못하는 겁니다.
소원을 간구하는 기도는 유지하되, 우리의 기도의 내용과 방법이 어느 정도는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태 말씀 드린 것처럼, 깊이있는 내적 성찰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적 성찰을 통해서 마주한 자기 내면의 은밀한 부분을 말로 구체적으로 바꾸어 내는 노동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한 영적 노동을 통하여 우리는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거죠.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은혜와 깨달음을 얻는 기도의 신비를 경험하게 되는겁니다. 하나님께서 이걸 들어주시느냐 마느냐에 매달리는 기도에만 제한되지 않게 되는거죠. 우리의 기도가 이러한 거룩한 노동으로 다채롭게 바뀌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찬양으로 고백합시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김삼열 목사(고신대 신학과 B.A. 고려신학대학원 M.Div, 영국 아버딘 대학교M.Th, 벨기에 루뱅카톨릭 대학교Pre-Doctoral Program, 한울교회 부목사)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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