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문제 앞에, 당신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
문성남 목사(동성교회)
유다 민족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페르시아에게 멸망합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 때 수산 궁에 있었습니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 궁에 있는데”(느 1:1)
느헤미야는 그의 할아버지가 바벨론 포로로 끌려왔기 때문에 유대인 포로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왕궁에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왕궁에 있습니까? 그는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항상 최측근을 통한 살해 위험이 도사리고 있던 왕정시대 ‘술 관원’은 최후로 왕의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왕의 절대 신임을 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수시로 마시는 음료의 총 책임을 맡을 만큼 신임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하루는 자기가 머물고 있는 페르시아 수산 궁에 형제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1000km나 떨어진 고향 예루살렘에서 수산 궁까지 찾아왔습니다. 찾아온 형제들에게 고향 예루살렘 소식을 듣게 됩니다. 평범한 일상의 생활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일이 우연히 찾아옵니다. 고국을 떠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은 고국의 소식을 늘 궁금해 합니다. 그들을 통해 들은 고향 예루살렘의 소식은 이랬습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 1:3) 그 땅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금 아주 큰 수모와 곤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진 채 오랜 세월 동안 그대로 방치되고 툭하면 적들이 공격해 죽이고 불태우며,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라는 소식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1. 나와 내 가족의 문제로 직시
느헤미야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나와 내 가족이 범죄한 결과다.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느 1:6) 그는 조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고국에 가본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와 내 아버지 집이 범죄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수많은 문제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문제 앞에서 우리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많은 사람들은 ‘내가 어쩌겠나. 안타깝지만 내가 여기서 어찌해 볼 수 있는 것이 없잖아?’ 더 나아가 이기적인 사람들은 ‘나는 관심 없어. 나만 행복하면 되는 거지. 그것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하면서 늘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갑니다.
6·25전쟁의 폐해로 가장 가난했던 우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로 급성장을 이룬 유일한 국가입니다. 자랑스러운 조국 대한민국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한국 사회는 심각한 사회 문제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살인마 이기영의 사건이 우리 사회를 놀라게 했습니다. 그는 술 먹고 운전하다 자동차 접촉사고를 내고서는 상대 운전자에게 합의금을 주겠다며 택시 기사를 자신의 거주지로 유인해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가운데 집 안 옷장에 숨겨둔 동거녀 최 씨의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그는 또 처음 만난 사람에게 “너 사람 죽일 수 있어? 할 수 없으면 내 앞에서 까불지마” 하면서 협박까지 했습니다.
우리나라가 마약 청정국이란 말은 이제 옛말이 됐습니다. 기상천외한 마약 밀반입이 늘고 있습니다. 그만큼 수요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는 수입 자전거를 용접으로 잘라보니 마약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자기를 망치는 쾌락에 물들어 가는 대한민국입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치유보다는 증오와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계속 진영 논리로 편 가르기를 하며 다투고 있습니다. 평화적으로 남북통일 준비에 마음을 모아야 하는 분단된 민족인데 현실은 점점 멀어지는 방향으로 갑니다.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022년 출산율이 0.78명입니다. 참고로 미국 1.6명, 일본 1.3명입니다. 2020년부터 한국은 출생보다 사망자가 더 많아지며 인구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미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고령화의 그늘은 높은 노인 빈곤율입니다. 젊은이들의 부양 부담이 많이 늘어간다는 말입니다. 청년 실업률마저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당면한 많은 문제 앞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고 있습니까? ‘내가 공직자도 아니고, 나는 내 문제 해결하는 것도 힘든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잖아’ 하면서 핑계할 이유를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 입구에 장애인 거지가 구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성전에 올라가는 기도 시간이었기에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베드로와 요한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를 ‘주목’했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행 3:4) 그 후 바라보는 거지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명할 때 그가 일어나 걷고 뛰었습니다. 성전 앞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의 사건은 보이는 상황을 주목하는 데서 시작됐고, 이웃을 향한 작은 관심에서 시작됐습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 놀라운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사는 이것을 웨일즈 부흥 운동이라 합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교회는 내리막길을 걷고 기도의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설교는 능력이 없고 믿는 성도들은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에 더 관심 있고 천국의 실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교회만이 내리막 일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하나님을 크게 떠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탄광촌 출신 평범한 청년 이반 로버츠가 민족을 품고 기도했을 때 엄청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위대한 일도 작은 일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부흥이 이 땅에 도래하기 전에 반드시 하나님은 쓰시고자 하시는 사람을 준비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준비되는 바로 그 교회가 되기를, 여러분들이 바로 그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세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피폐한 이 땅의 현실을 나와 내 가족의 문제로 직시하는 사람입니다.
2. 울고,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느 1:4)
느헤미야는 고국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고국과는 너무 먼 곳 페르시아 제국의 왕궁에 머물고 있습니다. 대제국에서 왕의 고관으로 안락한 삶과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만약 출세 지향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면 ‘조국이 나에게 뭐 해 주었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국 예루살렘 소식을 듣고는 수일 동안 울며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조국에 대한 마음이 항상 있었기에 형제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기도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평소에 어디에 두고 살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을 기도로 올리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은 나의 위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로자로 삼고 자신이 시대의 위로자가 됐습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곳을 바라보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애통하며 기도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으므로”(겔 22:30)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로 무너진 곳을 막아서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의 기도가 재앙을 막을 것이며 다시 이 땅에 하나님의 축복의 비가 내리게 할 것입니다.
세속주의, 물질주의, 자유주의가 난무하는 이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조롱당하고 외면 받고 있는 이 현실의 모습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는 한국교회 문제를 걱정하고 비판하는 것은 쉽게 합니다. ‘한국교회가 왜 이래?’ 그러면 ‘나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러한 죄에 일조했습니다’ 고백하면서 교회의 아픔을 나의 죄로 끌어안고 기도합시다. 혹여나 나는 잘못한 것도 없고, 나는 아무 상관도 없듯이 말하며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곧 교회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안타까움으로 우는 자가 역사의 주역이 되고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일꾼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자고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땅에서 능욕 받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울며 슬퍼하며 금식으로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의 자손으로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것은 ‘이때를 위함이다’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그가 가는 길에 수많은 방해와 난관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 성벽’을 52일 만에 성공적으로 완공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리를 하나님께서 세우셨음을 알고 하나님의 때에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피폐한 이 땅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무너진 성벽을 세우는 사람이 바로 당신이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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