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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모의 귀환① (몬 1:10)

섭리

by 김경호 진실 2023. 2. 2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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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과 악을 선으로 바꿔 나가십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몬 1:10)


박윤만 목사(대신대 신약학 교수·신학대학원 원장)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의 다른 서신과 비교했을 때 빌레몬서만 가지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서신은 단 1장, 총 25절로 돼 있습니다. 바울 서신 중 가장 짧습니다. 정상적인 속도로 읽으면 2분도 채 걸리지 않는 25절이 2000년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져 온 것입니다. 둘째, 빌레몬서는 바울이 한 개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쓴 대부분의 편지는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물론 디도서와 디모데전·후서도 개인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하지만 그 둘은 목회서신으로 분류돼 디도와 디모데가 목회할 때 따라야 할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목회자가 아니고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믿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초신자입니다. 이런 까닭에 빌레몬서는 목회서신이 아니라 그냥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개인서신으로 분류됩니다. 이처럼 25절로 기록된 개인서신이 성경책에 포함됐습니다. 내용 때문입니다. 편지는 빌레몬만 아니라 모든 교회, 모든 성도가 따라야 할 보편타당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있었습니다. 그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어느 날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불렀는데 오네시모가 오지 않았습니다. 집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오네시모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종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도망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도망갔던 오네시모가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모두가 놀랐습니다. 몰래 떠났다 제 발로 돌아온 것입니다. 돌아온 오네시모 손에 편지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우리가 읽는 빌레몬서가 오네시모 손에 들린 그 편지입니다. 오네시모는 편지를 그의 주인에게 건넵니다. 오네시모는 왜 떠났고, 떠난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그는 왜 다시 돌아왔으며, 바울은 이 일에 왜 개입했고 편지에 어떤 말이 쓰여 있을까요.

15절에 따르면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이라고 말합니다. 오네시모가 ‘잠시’ 빌레몬을 떠나게 된 것이 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슨 잘못을 저질러 도망간 것이라고 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오네시모)가 만일 네(빌레몬)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바울) 앞으로 계산하라”(18절)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했고 또 ‘빚진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네시모가 일을 하다가 주인 빌레몬에게 고의나 혹은 실수로 심각한 재정적인 손해를 입혔다고 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네시모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오네시모는 삼중고를 겪게 됐습니다. 첫째, 종이 주인에게 불의를 행했습니다. 둘째, 감당할 수 없는 재정적인 손해까지 끼쳤습니다. 셋째, 오네시모는 자신이 책임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아무런 허락 없이 집을 떠나버렸습니다. 노예는 원칙적으로 주인의 재산이기에 노예가 도망간 것은 주인의 재산을 ‘도둑질’한 것이며 노예는 ‘도둑’으로 여겼습니다. 도망간 노예로서 오네시모의 미래는 이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됐습니다. 사실 로마의 노예들은 해방을 받는 일이 많았습니다. 고대 이탈리아에서 발견된 비문들에서 30세 이전에 죽은 사람 중에서, 노예였던 적이 있는 1126명 중에서 59.3%가 해방됐고, 30세 이후에 죽은 사람 중에서 노예였다가 해방을 받은 사람은 89.3%나 됐습니다. 로마 노예의 해방 비율이 50% 이상 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노예 해방의 조건입니다. 이런 노예 해방은 오직 주인의 판단과 결정에 달렸습니다. 종이 성실하게 일해 자신과 집에 많은 유익을 가져왔다고 판단하면 주인은 그를 해방시켜 주곤 했습니다. 노예 해방의 가능성은 종의 성실에 비례했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는 주인에게 잘못을 행했고 그것을 피해 도망간 상태가 됐기에 이제 영원히 노예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아니 영원히 노예로 남는 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도망간 노예는 심한 매질은 물론이고 사지 절단과 같은 가혹한 징벌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불의를 행했고 빚까지 지고 도망갔습니다. 오네시모의 운명은 이제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고 혹 죽음을 면했다 하더라도 그는 영원히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망간 오네시모는 어떤 선택을 내렸을까요. 오네시모는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에게 갔습니다. 사고 친 노비가 사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불의와 재정적인 손실을 갚을 능력이 없던 오네시모는 마지막 시도를 했습니다. 중재자를 찾은 겁니다. 로마법에 따르면 노예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을 때 주인의 신실한 지인에게 중재를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그와 빌레몬 사이에 개입해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바울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바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오네시모가 바울을 찾아갈 때 주인인 빌레몬의 허락을 받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12절)라는 말이나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15절)이라는 말이 이를 지지합니다. 오네시모는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릴 ‘도망한 노예’라는 낙인을 각오한 채, 바울을 마지막 해결자로 삼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오네시모는 왜 하필 바울을 찾아갔을까요. 빌레몬의 집은 종을 둘 정도로 부유했기에 그 주위에 덕망을 갖춘 사람이 많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을 찾아간 것은 빌레몬에게 바울이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9절에 등장하는 빌레몬에게 하는 바울의 말인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새 생명을 얻게 된 사실을 언급하는 말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빌레몬이 평소에 바울을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오네시모는 알았고, 주인이 존경하는 사람에게 부탁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을 찾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찾아간 오네시모에게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10절)이 말하듯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바울 시대 랍비들은 자기 가르침을 배우는 제자를 “내 아들”로 부르는 것은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의 복음을 듣고 탄생하게 된 교회나 회심자와의 관계를 유모와 자녀 혹은 아비와 아들로 종종 묘사합니다.(고전 4:15; 갈 4:19; 고전 4:17; 딤후 1:2; 딛 1:4) 따라서 갇힌 중에서 오네시모를 낳아 아들이 됐다는 것은 오네시모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된 사실을 위한 축약된 표현으로 봐야 합니다. 오네시모가 도움을 요청하러 감옥에 있던 바울을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종이 아들이 되고, 그가 찾아간 감옥이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분만실’이 됐습니다. 사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복음을 들으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불의와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러했던 것입니다. 인생의 난관을 극복하고자 도움을 얻으러 간 자리가 존재 자체가 새로워지는 자리가 되게 하셨고, 사람의 종을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셨으며, 사람을 가두는 감옥을 새 생명이 잉태하는 영적 분만실로 바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이렇게 바꿔 나가십니다.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일상의 얼굴로 찾아옵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함이나 악을 하나님의 선으로 바꾸어 나가신다는 바울의 믿음이 빌레몬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은 15절에서 오네시모의 도망을 두고 “잠시 떠나게 된 것”이라 표현합니다. 원어에 “떠나게 된 것”은 수동태로 표현돼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도망갔다’고 말할 수 있었음에도 그가 ‘떠나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떠나짐’ 배후에 능동적인 참여자로 누가 관여했다고 보았을까요. 학자들은 이런 수동태를 ‘신적 수동태’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능동적 주체자가 돼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을 수동태로 표현하는 문법을 일컫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오네시모가 떠나는 일에 개입하셨다고 믿고 있었기에 이런 수동태를 사용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사실 잘못을 하고 도망가는 일은 오네시모에게는 큰 비극을 불러 올만한 잘못이었고 빌레몬에게도 재정적 손실을 발생시킨 일이었습니다. 모두에게 손해였던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재정적인 관점보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려 하시는지 보려 하고 있습니다. 비록 잘못된 일일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려 한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어떤 손해를 입히고 떠났지만, 그 후에는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됐고, 그리고 돌아갈 때는 이어지는 절이 말하듯 빌레몬과 주인과 종의 관계를 뛰어넘어 영원한 가족의 관계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이런 표현은 구약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형제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신 요셉의 고백을 떠올려줍니다.(창 45:5; 50:20) 요셉과 같이 바울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역사를 보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와 악을 선으로 바꾸어 나가시는 하나님의 섭리 말입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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