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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시모의 귀환② (몬 1:10)

섭리

by 김경호 진실 2023. 2. 27.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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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없이 주어져 사람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몬 1:10)


박윤만 목사(대신대 신약학 교수·신학대학원 원장)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냅니다. 문제의 발생지로 되돌려 보내되 돌아가는 오네시모 손에 친필로 쓴 편지를 쥐어 보냅니다. 빌레몬은 돌아온 자신의 종 오네시모를 그 앞에 세워두고 그의 영적 아비인 바울이 그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봤을 것입니다. 편지를 다 읽은 후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오네시모는 떠날 때와 동일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도망갔던 자가 제 발로 찾아온 것입니다. 게다가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겠다며 찾아온 것은 분명히 그에게 어떤 내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뿐 아닙니다. 도망갈 때는 종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형제가 됐습니다.(16절) 떠날 때는 불의를 행하고 손해를 끼친 ‘무익한 자’(11절 상반절)였는데, 돌아올 때는 ‘유익한 자’(11절 하반절)가 됐습니다. 심지어 한 노비를 두고 사도 바울은 그가 자신의 “심복”(12절)이 됐다고 합니다. ‘심복’이라는 말의 그리스어(스플랑크논)는 심장이라는 뜻도 가집니다. 이 단어는 7절에도 나옵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빌레몬의 사랑과 믿음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얻은 유익을 “성도들의 마음(스플랑크논)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라고 합니다. 한 명의 변화는 다른 사람의 ‘마음’ 상태에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돼 성도의 마음을 평안하게 합니다. 성도는 심장과 심장으로 연결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바울은 자신의 심장을 빌레몬에게 보냅니다. 바울의 심장은 빌레몬입니다. 바울의 심장의 평안함은 빌레몬이 그의 종 오네시모를 형제로 환영할 때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빌레몬은 오네시모가 자신의 종이기에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고 돌아온 그를 보며 잃어버렸던 소유물을 되찾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읽게 된 편지에 따르면 바울이 오네시모를 두고 자신의 ‘심장’이라 말하고 있기에 빌레몬은 그의 영적 스승인 바울과 그의 종인 오네시모가 한 몸이 됐다는 놀라운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이제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당시 사회의 신분 제도에 따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됐습니다. 바울을 대하듯 오네시모를 대하도록 요청받은 겁니다. 더불어 13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낸 후 그가 오네시모를 다시 자신에게 보내 주기를 간청합니다. 그 이유는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동역자”(17절)로서 그가 하는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도움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전제로 이 말을 합니다. 그런 후 바울은 빌레몬이 직접 하지 않고도 자신을 섬기는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의 종 오네시모를 돌려보내어 자신을 돕도록 하는 것이 빌레몬이 바울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한몸이기 때문에 오네시모의 섬김이 빌레몬의 섬김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인 빌레몬과 종인 오네시모의 신분 차이는 그들이 하는 일의 질적 차이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네가 해야 하는 일을 오네시모가 할 수 있고 오네시모가 하는 일이 곧 네가 내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변화 뒤에는 오네시모의 영적 출생이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주로 믿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자 그의 존재와 관계와 삶의 방식 전반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이전의 주인이 자신의 형제가 됐고, 이전에는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던 자가 그것을 책임지겠다며 돌아오는 자가 됐습니다. 이전에는 주인이 시키는 일만 하던 노비였던 자가 주인을 대신해 바울을 섬기는 자가 됐고(13절), 이전에는 아랫사람이었던 자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도의 존재의 중심이 됐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7절에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영접할 때 마치 나를 영접하듯이 그를 영접하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장이라 말할 뿐 아니라 바로 자신과 동격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나이고 내가 그이기에 그를 대할 때 나를 대하듯 하라고 빌레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이런 변화된 존재를 그 자신과 오네시모에게만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네시모는 이제 복음을 담는 그릇이 됐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며 오네시모와 관련된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가 불의를 했거나 빚진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계산하라 했습니다.(18절) 갚을 능력이 없는 자를 위해 바울이 대신 갚아주겠다는 겁니다. 바울은 힘없는 자의 편에서 그를 위해서 중재합니다. 이런 입장을 가지도록 한 배후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있습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해결은 예수님이 하셨다는 복음 말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그 복음에 따라 잘못은 했지만 갚을 능력이 없는 오네시모를 위해 자신이 대신 갚겠다고 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이런 태도는 자신만 아니라 빌레몬 역시 취해야 할 태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빌레몬 역시 갚을 능력이 없는 자 오네시모를 위해 복음의 정신을 실천하기 바란 것입니다.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19절) 바울은 빌레몬에게 ‘당신도 내게 빚진 것이 있지만 내 그것을 갚으라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 당신도 잘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빌레몬이 바울에게 진 빚은 재정보다 생명으로 보는 게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빌레몬의 영적 출생에서 유모 역할을 한 바울은 빌레몬에게 당신이 내게 빚을 졌으나 갚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출생은 은혜로 이뤄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은혜는 그런 것입니다. 빌레몬은 은혜로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오네시모 역시 잘못을 되돌릴 능력이 없어 죽음과 심한 매질 혹은 평생 노비로 살아가는 것 외에는 갚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자격 없고 능력 없는 노예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었고, 빌레몬 역시 종을 형제로 받으라고 합니다. 값없이 주어져 사람(의 신분과 관계 방식)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바꾸는 창조적 능력입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사람은 빌레몬입니다. 그리스-로마 사회의 신분제도와 법률에 따라 오네시모를 대해야 할까요. 아니면 바울이 말한 대로 복음의 가치에 따라 오네시모를 대해야 할까요. 빌레몬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빌레몬서에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빌레몬이 복음에 합당한 선택을 내리지 않고 당시 사회의 신분제도나 오네시모의 개인의 행위에 따라 판단했다면, 빌레몬 개인에게 보낸 사적 편지가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가 사도 바울의 권고에 따라 복음에 합당한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다면 이 편지를 없애버렸을 것이고 또 후에 교회들이 빌레몬의 행동에 변화를 가져오지도 못한 이 편지를 교회에 남겨 두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빌레몬서는 유실되지 않고 신약성경에 들어갔습니다. 빌레몬서가 정경이 된 것은 빌레몬은 복음의 가치에 따라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 그의 모든 잘못을 용서했고, 노비를 스승 바울의 심장으로 여겼으며, 자기를 대신해 바울을 섬기는 고귀한 존재로 공경했음을 말해줍니다. 교회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두고두고 회자하며 복음의 능력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자 모델로 삼았기에 4세기 정경화 과정이 이뤄질 때 단지 26절로만 구성된 이 책이 신약성경 중 한 권으로 채택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레몬서가 우리에게 주는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복음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할 수 없는 구원과 해방을 약한 자들과 눌린 자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오직 주인에게 잘 보여야 종에서 해방 받을 확률을 50% 가질 수 있었던 사회에서 불의를 행해 영원히 노비로 살다가 죽을 운명에 처한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의 ‘형제’가 되게 하고 사도의 심장이 되게 합니다.

둘째, 한 명의 회심자를 얻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우리 시대에 복음의 능력이 전파되는 길을 빌레몬서는 제시해 줍니다.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바울이 그에게 찾아갔을 때가 아니라 종 오네시모가 제 발로 바울을 찾아갔을 때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그가 빠진 곤궁에서 벗어나고자 바울의 도움을 얻고자 찾아갔다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한국교회가 이 사회에 복음 전파자로 어떻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요. 직접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길입니다. 이와 함께 빌레몬서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말합니다. ‘간접적’인 방법입니다. 곤경에 처한 오네시모가 자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사도의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듯이 정부가 교회에 중재를 요청하고, 인권단체가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지역 사회 연합단체가 교회에 도움을 요청하고 교회는 복음의 정신에 그 요청들에 반응할 때, 세상이 복음을 맛보고 그 과정에서 영적 출생이 일어난다는 것을 빌레몬서는 직접 보여줍니다. 비록 당장에는 어떤 반응과 결과가 나오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세상과 사회를 위해 인내로 섬기고 긍휼과 자비의 사역을 이어갈 때 세상이 교회 안에서 복음의 능력을 귀로만 아니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될 날을 주님이 허락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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