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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우상(행 3:1~13)

경건

by 김경호 진실 2023. 3. 6.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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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나는 죽고 그리스도 새생명 안에서 예수와 동행합시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우리를 왜 주목하느냐”(행 3:12)


박윤만 목사(대신대 신약학 교수·신학대학원 원장)


구체적인 사물이 다른 사물이나 사람을 연상시키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을 나타내는 일을 상징이라 하고 또는 그렇게 나타낸 사물이나 사람을 상징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들의 핀 꽃을 보라 하셨습니다.(마 6:28) 이는 꽃을 보되, 꽃만 아니라 꽃을 통해서 하나님(의 돌보심) 또한 보라는 말씀입니다. 꽃을 상징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겨자씨를 보라 하셨습니다.(마 13:31) 이는 세상의 씨 중 가장 작은 겨자씨 하나가 나중엔 공중의 새들까지도 쉴 만한 큰 그늘을 가진 식물이 되듯이, 미약한 시작을 가진 하나님의 나라가 결국 어떻게 결론이 날지를 기대하며 지켜보라는 말씀입니다. 상징은 자신의 존재로 다른 존재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상징은 자신을 가리키지 않고 다른 존재나 가치를 지시하기에 자기 부정적 성격이 강합니다. 하지만 자기부정이 있더라도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것이 상징적 역할을 하는 순간 그것은 존재의 변화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우상은 상징과 다릅니다. 상징은 가리키는 바가 있다면, 우상은 가리키는 바가 없습니다. 우상은 자신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거칠게 정의하자 가리키는 바가 자기 자신인 것, 그것이 우상입니다. 바벨탑을 보십시오.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창 11:4) 

그것은 탑이 아니라 우상이었습니다. 자기 위에 계신 분을 잊어버리자 우상이 된 것입니다. 결과는 파괴입니다. 이처럼 우상은 그 주위의 대상이 가진 빛과 시선을 자기가 다 흡수해 버리는 블랙홀과 같습니다. 상징과 우상은 대조적입니다. 상징은 자신을 부정함으로 남을 세우고 우상은 남을 부정함으로 자신을 세웁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우상이 되면 파괴되고 상징이 되면 세워집니다. 그런데 상징은 세우고 우상은 파괴하고 또 파괴되기에 그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간격은 습자지 한 장만큼이나 얇습니다. 한 끗 차이입니다. 손가락 끝이 곧게 뻗어 타인을 지시하는가 아니면 구부러져 나를 가리키는가의 차이입니다. 8~9세기 동방교회에서 성상의 건축과 파괴 결정이 다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반영한 조각들이 교회 안에 처음 들어올 때는 상징으로 들어왔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교도에 영향을 받아 그림과 조각 자체에만 집중하고 심지어 그것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상징을 우상으로 바꾸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 결과 성상 파괴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상징과 우상의 좁은 간격으로 인해 상징으로 살려는 이에게 유혹은 늘 찾아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던 중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한 사람을 보자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했습니다.(행 3:1~13) 이에 나음을 받은 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송하자 모든 사람이 놀라 그를 주목합니다. 얼마 후 그가 성전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만나자 그들을 붙잡았습니다.(11절) 이제 무리의 시선은 그가 붙잡은 두 사람에게 옮겨집니다. 우상으로 바뀔 것인지 상징으로 남을 것인지 결단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는 말합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2절) 베드로는 우상이 아니라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에게도 유혹이 왔습니다. 사도행전 14장 8절에서 15절에 따르면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보고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자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8~10절) 이것을 본 그 지방 사람이 바울과 바나바를 향해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12절)고 외쳤습니다. 이어서 소와 화환들을 가져와 제사하려 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바울과 바나바가 어떻게 했을까요. “두 사도가 이것을 보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 갑니다.(14절) 사람은 그들을 세우려 했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세우려는 자는 무너지고 스스로 무너지는 자는 세워집니다. 초기 교인들은 자신과 자신 안에 일하는 능력을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참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신앙이 스스로를 세우려는 우상의 유혹을 극복하고 상징으로 남게 한 배후였음이 분명합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할 때 우상의 유혹을 극복하고 스스로 파괴하는 상징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자기 내려놓음의 모델에 반하는 길을 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준 두 사람이 있습니다. 5장 36절에 “스스로 선전”하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그를 따르던 모든 사람이 흩어졌다는 유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8장 9절에는 “자칭 큰 자”라 하는 시몬을 소개합니다.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10절) 그가 베드로에게 돈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사려고 하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절) 하나님의 능력은 남을 치료하고 세우는 도구였음에도 시몬은 자신을 세우려고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 자기 붕괴를 맞게 됐습니다. 베드로는 원래 이런 태도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24절에서 30절에 따르면 제자들 중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툼이 있었고(24절) 베드로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절)고 하셨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자기를 부정하고 비우는 상징적인 인물 예수에 의해 세워져 간다는 것을 봤습니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베드로의 자기 부정 배후엔 자기를 무너뜨리신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그 길을 걸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길을 걸은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길을 준비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망하여야 하리라”(요 3:30) ‘나는 상징이고, 실체는 다른 분이다. 기억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른 분이다’라고 기꺼이 말합니다. 자기 우상화의 유혹을 이기고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요한의 삶의 태도는 평상시 그의 삶의 태도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자기 주위에 모여든 사람과 제자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36절)고 합니다. 사람이 그를 주목할 때 그는 자신의 시선을 예수님께 돌립니다. 요한이 우상이 되지 않고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평상시 예수님과 성령에 주목하는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늘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에 주목하고 있어 사람이 그를 응시할 때 그 시선을 마땅히 주목해야 할 분에게 돌릴 수 있었습니다. 

우상이 되려는 유혹을 이기는 길은 평상시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로 결정됩니다. 우리 역시 궁극적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투시’하는 삶을 일상화해야 하지 않을까요? 삶의 한복판에서, 삶으로 둘러싸인 이상에서 모든 것의 근본이신 그리스도와 대화하고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우리가 서야 할 자리, 또 서지 않아야 할 자리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떠나야 할 때, 계속 있어야 할 때, 가리켜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객전도가 일어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하지만 요한이 봤던 예수님, 투시했던 예수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뚫어지게 바라보았던 예수님은 조연이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절)가 말하는 바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29절)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조연으로 사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사신 예수님을 봤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위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예수, ‘상징’적 예수님을 끊임없이 봤기에 요한 역시 나중에 소리 없이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보고 있나요. 나의 삶은 예수님을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어떤 예수님’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달리 만들어집니다. 스스로를 높이는 현대 문화에 길들여지면 우리 역시 자꾸만 자신을 우상으로 치장하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보아도 우리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예수님만 보면 말입니다. 겸손히 다른 곳을 가리키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를 외친 요한이 본 예수님은 세상의 죄와 아픔을 짊어지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세상과 사람을 살리고자 자신은 사라지는 분이셨습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과 아버지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기꺼이 도살장으로 사라져가는 어린 양의 길을 택한 상징적 예수님을 볼 때 우리 역시 상징으로 남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고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 역시 자아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드러내며 높이는 것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적 모습입니다.

자기를 무너뜨려야 삽니다. 매일 그래야 합니다. 바울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하지 않았던가요! 매일 죽고 매일 예수 안에서 사는 삶이 이어질 때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낯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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