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시대의 박해
박상봉 교수(합신 역사신학)
종교적 박해의 원인
16세기 당시 종교개혁은 정부나 군주의 지지 없이 한 지역에 정착할 수 없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평화협정》(Augsburger Religionsfrieden)을 통해서 한 나라에서 정부나 군주가 결정한 정책에 따라서 그곳의 종교가 결정된다는 의미를 가진 “자신의 지역, 자신의 종교”(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공식화되었다. 하지만 이 원칙은 봉건주의 체제 속에서 이미 종교개혁 초기부터 모든 나라에서 작동되고 있었다. 개인이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극히 제한된 현실 속에서 이 원칙에 따라서 한 나라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정부나 군주에 의해 결정된 ‘종교정책’을 따르지 않으려면, 그는 국가의 공권력 아래서 목숨을 잃거나 투옥될 각오뿐 아니라, 삶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역, 자신의 종교” 원칙이 황제, 왕, 영주 등과 같은 국가 권력이 어떤 신앙고백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종교개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특별히, 개신교도들에 대한 극심한 박해가 일어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은 절대왕조 아래서 군주의 선택에 의해 한 교파(로마가톨릭교회)만 인정되었다. 교황의 압력만이 아니라, 왕권과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나 손상을 싫어했던 군주들도 개신교의 등장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이 네 나라에서 개신교도들은 많은 사람들의 미움을 받도록 거의 운명 지워졌다고 말한 쟝 깔뱅(Jean Calvin)의 고백은 현실이 되었다. 개신교도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교회를 위해 죽음을 각오한 신앙의 싸움을 감당해야 했다.
종교적 박해 아래 있는 개신교도들
종교개혁의 시대에 종교재판을 통해서 개신교도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법적 형벌, 투옥, 재산 몰수, 추방, 처형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종교·정치·사회 전반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친 박해는 개신교도들에게 죽음, 투옥, 망명 등을 선택하도록 내몰았다. 물론, 가톨릭 신앙을 원치 않았지만,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잔혹한 박해의 두려움 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을 감추고 로마가톨릭교회의 미사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깔뺑은 이러한 사람들을 ‘니고데모주의자들’(Nicodemites)로 규정했다. 이 같은 위장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투옥되고, 신앙의 자유를 인정해 주는 낯선 나라로 도망쳐야 해야 했다.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의 종교적 박해
종교개혁 당시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에서 가장 심각한 박해가 발생했다. 먼저, 프랑스에서 프랑수아 1세(François I) 치세 때인 1520년대 초에 행해진 박해는 ‘모의 다락방’(Cénacle de Meaux)을 비롯하여, 가장 많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이 살해된 1572년 성 바톨로메 축일(Saint-Barthélemy)의 대학살 때까지,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전방위로 전개되었다. 수십만 명의 개신교도들이 살해되었고, 투옥되었으며, 다른 나라들로 망명했다. 다음으로, 영국에서 1553-1558년에 ‘피의 메리’(Bloody Mary)로 불리는 메리 튜더(Mary Tudor) 여왕에 의해 개신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핍박이 일어났다. 1563년에 존 폭스(John Fox)가 출판한 『순교자의 책』에 따르면, 1555년과 1558년 사이에 248명의 개신교도들이 화염 속에서 사라졌고, 30명은 종교재판 중에 감옥에서 죽었다. 그 외에 800명 정도의 개신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수년 동안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도시들에서 신앙난민으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1542년 종교재판소가 부활한 이래로 1570년대까지 종교개혁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한 종교적 박해가 극심했다. 이 시기에 13,000-15,000건의 종교재판이 있었고, 그 중에서 이단 혐의로 집행된 사형은 650-850건 정도로 알려져 있다. 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신앙난민으로 주변 나라들로 탈출했다. 끝으로, 스페인에서 1550년 초부터 1560년 초까지 대표적으로 세비야(Selvilla)와 바야돌리드(Valladolid)에서 잔혹한 종교적 박해가 일어났다. 종교재판이 본격화되었던 1559-1562년에 3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이 두 지역에서 이단 혐의를 선고받았으며, 그 중에서 70명 이상이 화형에 처해졌다. 이탈리아에 속한 섬이지만 종교개혁 당시 스페인의 통치 아래 있었던 시칠리아(Sicilia)와 사르디니아(Sardinia)에서도 1550년과 1570년 사이에 대략 20년 동안 종교재판소를 통해서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살해되거나 투옥되었으며, 고달픈 나그네로 정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정리하며
유럽의 종교적 박해와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때로 목숨을 걸어야 하고, 고향을 떠나서 망명객으로 살아야 하며, 평생 고난 속에서 산다고 해도 가치가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교회의 역사는 어떻게 답변할까? 이 질문에 대해 교회의 역사는 “그렇다”라고 명확한 답변을 하고 있다. 특별히, 종교개혁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발생한 종교적 박해 속에서도 개신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고,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으로 여러 나라들을 전전하며 고난의 삶을 살았던 신자들이 이 답변을 보증한다. 로마가톨릭교회에 의해 자행된 종교적 박해 속에서 바른 믿음과 바른 교회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가 우리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한 살아 있는 역사의 증언이기도 하다.
[포인트 세계 교회사 20] 종교개혁 시대의 박해_박상봉 교수 | 기독교개혁신보 (re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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