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는가?
이상원 교수: ‘교회가 무엇인가’를 성경적 관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 사도행전에 보면 교회의 4가지 구성요소가 나온다. 1)사도의 가르침(말씀), 그 다음이 2)교제이다. 성도들끼리 만나서 교제하는 것, 그 다음이 3)떡을 떼는 것, 이것은 성찬과 더불어 초대교회는 애찬식을 같이 했다.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하나의 구제 행위이기도 했다. 교회가 자기 자신의 만족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해 있는 가난한 성도들을 늘 배려하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위한 함께 식사하는 모임을 가졌다. 교제하는 것과 떡을 떼는 것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4)기도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도들 간의 교제, 성찬(그리스도와 연합되는 동시에 성도들과 함께 연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상원교수.
이 4가지를 균형 있게 생각해야만 한다. 어떻게 보면 말씀(읽고 보는)과 기도는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요새 말씀은 인터넷 상에서 들을 기회가 많이 있다. 또 기도하는 것도 혼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 말씀과 기도가 개인적인 경건과 관련되어 있고 어떤 면에선 개인적 차원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떡을 떼고 교제하는 것은 긴밀한 다른 사람들과의 연관성과 관계성 속에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제한다고 할 때, MZ세대의 특징은 자기의 주관적 감정에 충실하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성을 그렇게 중시하지 않는 MZ세대의 특징이다. 자기의 주관적인 감성이라는 자기의 아성 안에 그 모든 것을 담는다. MZ세대가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은 세계관이다. 세계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데 MZ세대들이 말하는 세계관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돼서 자기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것을 옳게 보는 것이 MZ세대의 세계관이다. 굉장히 세계관이 협소하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고, 1인주의 적이다. 그런 세계관을 가지고 MZ세대가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교제와 떡을 뗀다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실제로 이웃과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서로의 사정도 알아가며 어울리며 사귀라는 것이다. 몸으로 같이 어울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 것이다.
우리가 또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초대교회 때 박해가 굉장히 심했다. 그런데 왜 박해가 심했는가? ‘모여서 예배하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 사실 성도들이 이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깐 모여서 예배하기 어려울 때는 각자가 있는 처소에서 영이신 하나님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으니 각자 있는 곳에서 하나님과 만나고 영으로 교통할 수 있지 않느냐? 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은 영이신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얼마든지 교제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고 순교함에도 불구하고 카타콤까지 들어가는 간 이유는 “모여서 예배하는 것” 때문이었다. 순교하기까지 모여서 예배하는 것을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집했기 때문에 그들이 박해를 받고 순교를 당했던 것이다.
카타콤에 들어간 이유도 모여서 예배하기 위해서였다. 얼굴을 맞대고 모이기 위해서 카타콤에 들어간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얼굴을 맞대고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중요시했다. 그것만 아니었으면 그처럼 박해나 순교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목숨을 걸고 몸으로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것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보면 특별히 안식일에는 예배는 어떤 식으로 드리라고 명령하시냐면, 회중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라고 명령하셨다. 모여서 함께 교제를 해야 그곳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의 실천이 가능하다. 우리에게 주신 2가지 강령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웃이 없으면 이웃을 사랑할 현장이 없는 것이다. 이웃과 만나지 않으면 사랑을 실천할 현장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함으로서도 나타난다. 원수도 만나야 사랑할 수 있다.
다른 성도들과의 교제를 나누지 않으면 기독교 윤리의 대 강령을 실천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또 지체들이다. 지체는 팔다리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팔이나 다리가 몸체에서 끊어져나가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늘날과 같이 의술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에는 팔다리가 몸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죽는 것이다. 팔과 다리는 몸에 항상 붙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강력한 교회론이 필요하다.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어떤 동호회의 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주관적인 감정이 내키면 나가고, 아니면 안 나가는 그런 관계가 아니다. 교회에 구성원이 되는 것은 한 몸의 지체가 되는 것이다. 만약 교제를 안 한다는 것은 끊어져 나간다는 것인데, 이것은 죽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의 교제에서 떨어져 나가면 차츰차츰 죽어가게 되어 있고 시험에 들게 되어 있다. 교회 생활은 몸으로 만나서 호흡을 같이하고, 얼굴을 보며 함께 교제하고, 같이 성경공부하고 같이 예배하고 하는 몸으로의 교제가 필요하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결혼 생활을 예를 들면,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가 결혼 관계와 비유가 된다. 오늘날 인터넷이 발달하고 화상통화가 발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화상으로 결혼하고, 화상으로 결혼생활하고, 화상으로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 가능한가?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결혼 생활은 두 사람이 몸을 섞고 만나야 한다. 한 물리적 공간 안에서 함께 결혼 생활해야 한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결혼한 부부가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서 같이 살아야 하는 것은 종말의 날까지 계속 되어야 한다. 이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 관계, 그리고 예배도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한자리에 몸으로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하는 것은 종말의 날까지 없어져서는 안 될 교회의 상수이다. 예배도 줌으로 드리고, 기도도 하고, 줌으로 교제하자? 이것은 안 되는 것이다.
종말의 날까지 교회는 지역교회로 실제로 만나서 같이 교제하고 예배하고 활동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정말 필요한 일이다. 가장 현실상에서의 교제만 남는다면 이것은 영지주의화 되는 것이다. 인터넷상으로 만나고 교제하고 하는 것은 몸의 만남이 없는 교회 영지주의적 교회가 될 수 있다. 몸의 부활을 중시하시는 관점에서 볼 때 굉장히 위험한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본질은 실재로 만나서 교제하는 것, 실제로 만나 교제해야 한다. 기독교인의 삶의 본질은 나의 주관적 감정 등을 가급적 억제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삶이다. 이것이 기독교윤리의 핵심이다.
현대의 정서론적 자아는 반기독교적인 시대적 이념인데, 그 위험한 핵심을 꿰뚫어서 문제점과 위험성을 지적해 주지 않고, 세상은 그쪽으로 가니깐 교회도 그쪽으로 적응해 가자는 방향으로 가면 교회가 성공할 것 같은데 오히려 교회가 더 죽는다. 자유주의 신학이 했던 일들이 바로 그런 것이다.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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