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눅 15:11-32) 새롭게 읽기

사랑

by 김경호 진실 2024. 11. 14. 09:35

본문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15:11-32)는 예수님의 비유 중 가장 잘 알려진 비유인 동시에 가장 긴 비유이다. 또한 수많은 성경학자, 설교자, 예술가의 관심을 끌었던 이야기이기도 하다. 탕자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먼저 네덜란드의 저명한 화가 렘브란트(Lambrandt van Rijn, 1606-1669)의 “돌아온 탕자”(the Returm of the Prodigal Son)로 시작하자.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그가 생애 말년에 누가복음 15:11-32에 나오는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 렘브란트는 엄청난 시련을 겪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사스키아와 외아들 티투스를 잃어버리는 아픔을 당했다. 게다가 가진 재산과 쌓은 명성도 다 잃어버린 파산 상태였다. 엄청난 시련과 불행을 겪으면서 렘브란트는 자신의 젊었을 때의 방탕한 생활을 되돌아보았고, 자신의 모습이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작은아들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그림에는 렘브란트의 삶과 신앙이 깊이 투영되어 있다. 아버지께 돌아와 무릎을 꿇고 있는 탕자의 초라한 모습은,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을 겪은 렘브란트가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와 용서를 구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돌아온 탕자의 초라한 모습과 그를 감싸는 아버지의 모습이 매우 대조적이다. 탕자는 다 헤어진 옷을 입었고, 신발이 벗겨졌고, 한쪽 발은 상처투성이다. 머리는 죄수처럼 삭발한 모습이다. 그야말로 산 거지 모습이다.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호신용 칼은 그동안 그가 당한 험난한 세월을 대변해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버지는 화려한 붉은 겉옷과 장식이 달린 속옷을 입고 있다. 초점을 잃고 있는 아버지의 지친 눈은 그동안 얼마나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는가를 보여준다. 탕자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아버지의 커다란 두 손이 다르게 표현되어있는 것은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크신 사랑 동시에 다시는 아들을 잃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리라! 아마도 렘브란트는 돌아온 작은아들을 맞이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표현하려고 한 것 같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 그림에는 돌아온 작은아들과 아버지 외에 네 사람의 모습이 등장한다. 아버지 가까이 우편에 서서 아버지처럼 붉은 옷을 입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돌아온 동생과 그를 맞이하고 있는 아버지의 처사를 기분 나쁘게 생각하고, 불평하는 형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그리고 검은 모자를 쓰고 손에 잔을 들고 앉아 있는 사람과, 기둥 곁에 서 있는 사람은, 아버지 집의 하인들이거나 아니면 작은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동네 사람들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그림에는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아버지 뒤에 서 있는 정장한 한 여자는 렘브란트가 돌아온 아들을 뒤에서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어머님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볼 때, 렘브란트가 그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는 작은아들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긴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반영하려고 매우 고심한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돌아온 작은아들 맞는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그림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직접 반영된 유대문화, 곧 히브리문화의 배경을 보여주고 있다기보다도, 전통적인 서구문화의 한 축인 그리스문화의 배경을 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렘브란트의 그림에는 돌아온 작은아들과 동네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마련한 흥겨운 잔치의 모습이나 탕자 이야기의 대미(大尾)를 장식하고 있는 큰아들을 작은아들 및 동네 사람들과 화해시키려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다.

서구문화는 본래 두 축을 가지고 있다. 한 축은 개인을 강조하는 그리스문화이고, 또 한 축은 가정이나 이웃 공동체를 강조하는 히브리문화이다. 그런데 16세기 르네상스 운동과 17세기 계몽주의운동을 통해 서구사회에서 히브리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개인을 강조하는 그리스문화가 전면에 등장하였다. 기독교의 중요 질문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이웃과 화해하여 좋은 가정과 좋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아닌, 어떻게 죄인인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개인적이거나 실존적인 질문으로 전환되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질문, “내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가 이를 대변한다. 그리스문화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가 중요하지만, 히브리문화에서는 가정이나 공동체의 체면과 부끄러움 및 수치가 더 중요하였다. 그리스문화에서는 한 사람의 행동과 결과는 그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의 체면과 수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아담 한 사람의 범죄가 그의 후손인 전 인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점(롬 5:12)이나 아간 한 사람의 범죄가 전 이스라엘 민족을 전쟁에서 패하게 된 점(수 7:1-15)을 개인과 공동체를 분리하지 않는 독특한 히브리문화를 고려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문화는 개인의 자유와 인권 못지않게 가정이나 공동체나 민족의 체면이나 자존심과 수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동양 문화와 닮았다. 기독교 선교도 지나칠 정도로 개인주의의 영향 아래 개인의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선교가 개인을 뛰어넘어 가정적이고 공동체적 특성을 가진 점이 간과되고 있다. 렘브란트가 살았던 17세기의 계몽주의 기독교 시대는 더욱 그러하였다. 만일 렘브란트가 누가복음 15:11-32에 있는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를 개인을 강조하는 그리스문화 배경에서 보지 않고, 가정이나 공동체를 강조하는 히브리문화의 배경에서 보았다고 한다면, 아버지와 작은아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그런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온 식구와 동네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흥겨운 춤을 추는 잔치의 모습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탕자 이야기를 어떻게 구성하고 있는가?

누가복음 15:11-32의 본문을 보면 작은아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큰아들의 이야기도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구조적으로 보면 전반부(15:11-24)와 후반부(15:25-32)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가 작은아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후반부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물론 전반부와 후반부를 묶고 통일시키는 것은 작은아들도 큰아들도 아닌 아버지이다. 전반부 서두에서 작은아들의 요청을 받고 재산을 나누어준 사람은 아버지이다. 그리고 전반부의 절정을 장식하고 있는 장면인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가진 모든 재산을 잃고 거지가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를 맞이하기 위해 달려 나간 사람도, 그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을 불러 잔치를 베푼 사람도 아버지이다. 이처럼 전반부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 역시 아버지이다.

이 점에서 후반부도 전반부와 짝을 이룬다. 후반부에서 큰아들 역시 아버지 집을 떠나 일터로 갔다. 차이점이 있다면 작은아들은 이웃 나라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낭비하였지만, 큰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려 밭으로 나갔다. 작은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처럼 큰아들도 집으로 돌아온다. 작은아들은 혼자 돌아왔지만, 큰아들은 함께 일한 종들과 돌아온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에 집에서 들려오는 잔치 소리에 갑작스럽게 리듬이 깨어진다. 큰아들은 종들로부터 돌아온 동생을 위해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배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중단한다. 그러자 아버지가 큰아들을 설득하기 위해 달려간다. 하지만 후반부는 전반부와 달리 큰아들의 답변 없이 미완성으로 끝난다.

전반부와 후반부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다시 살펴보자. 전반부에 보면 작은아들이 먼저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자기 몫의 재산 분배를 요청하였다. 당시 유대 관례에 따르면 재산 분배는 아버지의 임종 직전이나 사후에만 가능하였다(참조. 민 27:8-11; 36:7-9; 신 21:15-17; 시락서 33:20-22). 설사 아버지가 미리 재산을 자식에게 분배해주었다 하더라도 아버지 생전에 그 재산을 처분할 수 없었고, 재산의 관리는 여전히 아버지의 관할 하에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생전에 재산을 분배해달라는 것은 마치 ‘아버지 이제 죽으세요’와 같은 아버지를 심히 모독하는 불효행위였다. 당시 작은아들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면 그는 10대 중반의 나이였을 것이고, 그럴 경우 아버지는 건장한 40대 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작은아들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여 큰아들에게 할당되는 몫을 제외한 나머지를 그에게 주었다. 아마도 그는 아버지의 재산 중에 1/3을 받았을 것이다(신 21:15-17). 작은아들은 자기 몫을 물려받자마자 즉각 처분하여 현금화하였다. 당시의 재산이 주로 부동산인 토지인 점을 고려한다면 신속한 처분은 적지 않은 손해를 가져왔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다음 그는 아버지와 형은 물론 같은 동네 사람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먼 외국 땅으로 갔다. 그리고 거기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재산을 다 탕진하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작은아들은 먹을 것조차 구할 길이 없어 유대인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이방인 집의 돼지치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불결한 짐승인 돼지가 먹는 야생 콩조차 먹을 수 없는 존재로, 그야말로 부정한 돼지보다 못한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다. 그의 몰락은 물질적인 몰락을 넘어 사회적, 종교적, 그리고 영적 몰락이었다. 최악의 상태에서 비로소 그는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자신의 행위가 하늘[하나님]과 아버지에게 대한 범죄행위였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스스로 아버지의 아들 됨은 물론 하나님의 백성 됨을 거부한 일탈(逸脫)행위였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에게 이제 아들로서가 아닌 품꾼 중의 하나로 받아줄 것을 요청하리라 결심하고 아버지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돌아오는 아들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동네 사람이 아닌 아버지였다. 적지 않은 거리에서 아버지가 제일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다는 것은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늘 잊지 않고 애타게 계속 기다렸음을 보여준다. 먼 거리에서 아들을 본 아버지는 아버지로서의 체면도 개의치 않고 아들 곁으로 달려가서 아들을 얼싸안았다. 그의 행위는 동네를 수치스럽게 한 방탕아가 돌아오지 못하도록 마을 사람들이 매질하는 것을 예방하는 행위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종들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도록 하였다. 최악의 상태로 돌아온 아들을 최상의 상태로 다시 회복시킨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까지 불러 잔치를 베풀도록 하였다. 가족의 화해는 물론 동네 사람들과의 화해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전반부의 내용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반부만으로도 떠남, 몰락, 돌아옴, 회복이라는 기승전결(起承轉結)의 드라마 요소를 갖춘 훌륭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는 전반부에서 끝나지 않고 또 하나의 이야기인 후반부로 이어졌다. 전반부가 작은아들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면 후반부는 큰아들과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반부가 작은아들의 떠남, 몰락, 돌아옴, 회복의 완성된 이야기 형태를 가지고 있는 반면, 후반부는 큰아들의 돌아옴, 중단, 몰락은 암시되어 있지만, 회복이 없는 미완성의 형태를 보여준다. 후반부는 큰아들이 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은 큰아들이 작은아들과 함께 재산을 물려받았지만(15:12) 마음대로 처분하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아버지를 대신해서 부동산을 잘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큰아들은 작은아들과 대조적으로 아버지의 충성된 아들 됨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집 가까이 오면서 잔치 소리를 듣고 큰아들의 모습은 돌변한다. 종들을 통해 자기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을 불러 잔치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는 분노하여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안겨주는 패륜 행위였다.

이때 즉각적인 반사행동을 한 사람은 작은아들도 마을 사람도 아닌 아버지였다.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동네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가서 동네 밖으로 쫓아버리기 전에 아버지가 먼저 달려가서 아들을 맞이하고 회복시킨 것처럼, 큰아들의 패륜적인 행동에 분노한 동네 사람들이 달려가기 전에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가서 집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하지만 큰아들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에게 모욕적인 불평을 계속 쏟아내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호칭마저 생략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주인과 종의 관계로 비하(卑下)시켰다; 아버지를 동네 사람들 앞에서 아들인 자신에게 살진 송아지는커녕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는 인색한 자로 단정하였다;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인정하기는커녕 동생을 맞이한 아버지의 행위를 두고, “아버지[원문, 당신]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원문, 당신의]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15:30)고 하면서, 경멸하였다.

예수님의 후반부 이야기는 전반부가 그러하듯이 아버지의 충격적인 반응으로 종결된다. 전반부가 돌아온 작은아들에 대하여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작은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예외적인 행동으로 종결된 것처럼 후반부도 그러하다. 차이가 있다면 전반부는 돌아온 작은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 흥겨운 잔치를 배설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후반부는 큰아들을 끝까지 설득하려는 아버지에 대해 큰아들의 반응이 생략된 미완성으로 종결된다. 큰아들은 의도적으로 아버지와 동생의 관계는 물론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거부하는 행동을 보였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아버지와 큰아들, 큰아들과 작은아들, 큰아들과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힘썼다. 아니 이미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향해 애칭인 “애야”(15:31a)라고 부르면서 큰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변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15:31b)고 함으로써 큰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그 무엇으로도 끊어지거나 변할 수 없는 관계임을 밝힌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다”(15:31c)고 하면서 큰아들이 아버지의 상속자임을 재확인한다. 말하자면 동생이 돌아왔다고 해서 이미 큰아들에게 분배한 재산이 동생에게 넘어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다짐인 셈이다. 후반부는 큰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인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15:32)로 종결된다. 후반부는 이에 대하여 큰아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의도적인 생략인 셈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렘브란트를 위시하여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작은아들에 초점을 맞추고 개인 구원론적인 전망에서 접근하고 해석하였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작은아들은 한때 범죄하였다가 돌아온 죄인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버지 집을 떠난 작은아들의 비참한 상황은 아버지 하나님을 떠난 비참한 죄인의 상황을 보여주고, 작은아들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오는 것은 그의 회개를 보여주고, 돌아온 작은아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은 죄인을 용서하고 그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동안 예수님의 이야기를 작은아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해석하는 것에 반발하여,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추어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이야기”나 “아버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접근하고 해석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또 어떤 사람은 작은아들보다 오히려 후반부의 큰아들에 초점을 맞추어 “불평하는 형에 관한 이야기” 혹은 “기뻐하지 않는 큰아들에 관한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작은아들에 초점을 맞추거나, 아버지에게 초점을 맞추거나 혹은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추거나, 예외 없이 모두 개인을 중요시하는 그리스문화의 배경에서 예수님의 이야기에 접근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예수님의 이야기는 둘째 아들이나 아버지나 큰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두 아들이 있는 한 가정의 이야기요, 그 가정이 속해 있는 마을과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어머니가 직접 등장하지 않은 것은 당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유대문화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야기가 개인의 자유와 인권보다 가정이나 마을 공동체의 체면과 수치를 중요시하는 유대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로 등장하는 작은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고 춤을 추는 잔치를 연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단순히 집안 식구들만을 위한 것이라면 살진 송아지를 잡을 필요도 풍악을 울리고 춤추는 일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종들을 불러 돌아온 작은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준비하도록 한 것은, 그동안 작은아들의 가출과 방탕으로 인해 체면을 잃어버린 가정과 마을 공동체를 본래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한 배려일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그야말로 탕자[작은아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를 원하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작은아들의 가출과 귀환 그리고 가족 만찬으로 종결되어야 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비참한 몰락과 극적인 회복을 보여주는 해피엔딩의 전형적인 서구 이야기가 될 것이다.

사실 문학적 구성면에서 볼 때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은 전반부가 아니고, 오히려 후반부이다. 말하자면 작은아들에 관한 부분이 아니고 큰아들에 관한 뒷부분이다. 작은아들의 귀환으로 이야기가 종결되지 않고 큰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큰아들에 관한 후반부가 둘째 아들에 관한 전반부 이상으로,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더구나 작은아들에 관한 전반부는 가출, 몰락, 귀환, 회복으로 완성되었지만, 큰아들에 관한 후반부는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미완성으로 남겨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사가 청중들에게 전반부의 작은아들보다 후반부의 큰아들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두 아들을 가진 어떤 아버지, 곧 한 가정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하였다(15:11).

우리가 누가복음 15:11-32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야기를 체면과 수치를 강조하는 1세기 유대 중동문화에서 본다면 그것은 분명히 한 가정의 이야기인 동시에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이다. 작은아들의 행위는 단순히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니다. 한 가정의 행복과 그 가족이 속해 있는 마을 공동체를 수치스럽게 하는 불효막심한 패륜 행위이다.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자기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청한 것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과 종들이 있는 가정과 마을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함께 살 수 없다는 듯이 먼 나라로 간 행위는, 가정과 마을 전체에 수치를 가져오는 행위이다. 더구나 이방인들이 사는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허랑방탕하고, 나중에는 재산을 다 잃고, 먹을 것이 없어 유대인들이 가장 불결하게 생각하는 돼지치기가 되어, 돼지가 먹는 야생 콩조차 배불리 먹을 수 없는 최악의 비참한 상황으로 전락한 것은, 개인의 비극인 동시에 한 가정과 마을의 비극이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수치이다. 전반부에서 작은아들의 행위가 가정과 마을 공동체의 파괴행위였다고 한다면, 후반부의 큰아들 행위 역시 작은아들 못지않은, 오히려 더 심한 파괴행위이다. 작은아들의 귀환을 잃었다가 다시 찾고, 죽었다가 다시 얻은 것으로 생각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고 마을 사람들을 불러 기쁨의 잔치를 가지도록 한 것은 가정을 넘어 마을 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아버지의 적극적인 배려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이런 행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야 할 큰아들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반면에 아버지의 행위는 두 아들의 패륜 행위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두 아들은 가정과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고 부끄럽게 하는 행위를 하지만, 아버지는 어떻게 하든지 가정을 세우고 마을 공동체를 원 상태로 회복하려고 한다. 두 아들로 인해 형편없이 자기 체면이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체면 손상을 개의치 않고 작은아들을 기다렸고, 귀환하는 작은아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집 밖으로 달려 나갔다. 마찬가지로 큰아들이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잔치 석상에서 여지없이 아버지의 체면을 손상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이를 개의치 않고 가정을 붙들기 위해, 마을 공동체의 체면을 회복시키기 위해 큰아들에게 달려갔다. 그러나 그 가정이 깨어졌는지, 깨어지지 않았는지, 마을 공동체의 체면이 손상되었는지 회복되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숙제로 남겨 있다. 아버지는 가정과 마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큰아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는 미지수로 남겨져 있다.

예수님이 왜 체면과 수치 문화가 지배하는 1세기 유대인들에게 탕자 이야기를 하였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이 그러하듯이 이 이야기도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선교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는 전망에서 접근할 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탕자 이야기에 나오는 무한한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는 아버지, 잃음과 찾음, 잔치의 모습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선교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모든 설교, 가르침, 사역, 곧 그의 전 선교 사역의 주제이다. 복음서에 수록된 그의 귀신축출, 각종 병자의 치유, 기적, 세리와 죄인들과의 만찬 등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과 함께 현존하고 있다는 표징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한 개인을 넘어 이스라엘은 물론 이 땅의 모든 민족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회복과 다스림을 포함한다. 이것은 사실상 이사야 선지자가 예고한 범죄로 인해 창조주 하나님과 단절된 이스라엘은 물론 인류와 죄의 영향 아래 있는 전 피조 세계와 하나님과의 회복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를 동반한다(사 65:17-25).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되었다. 창세기 12:2-3에 나타나 있는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큰 민족[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누릴 것을 포함한다. 아브라함에게 준 이 약속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이어졌다. 출애굽기 19:5-6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고 약속하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계를 회복시키는 제사장의 나라로 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다. 그 결과 솔로몬 왕 사후 남북으로 나누어졌고,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로에게,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멸망함으로 온 세상을 회복시키는 통로가 되는 제사장의 나라의 자격을 상실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 이사야 42장과 49장은 하나님이 그가 택한 종을 세워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을 성취할 것을 말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 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42:6-7);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끝까지 이르게 하리라”(49:6).

누가복음 저자는 주의 사자가 목자들에게 전한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눅 2:10)고 함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성취자임을 암시한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에 나타난 하나님이 택한 종의 사역에 대한 글을 직접 읽으시고(눅 4:16-19) 회당에 있는 무리를 향해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4:21)고 선언하였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멀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좀 더 가까이는 이사야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택한 종의 약속의 성취자라는 것이다. 곧 예수님에게 주어진 사역이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땅의 모든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선교를 수행하는 자이라는 것이다.

다시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예수님의 탕자 이야기로 돌아가자.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 이야기에 앞서 잃은 양의 비유(15:4-7)와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15:8-10)가 소개된다. 세 비유가 다 같이 “잃음”과 “찾음” 그리고 “하늘의 기쁨”의 주제를 갖고 있다. 세 번째 비유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장면인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한 말,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15:32)가 이를 보여준다. 사실 잃음과 찾음은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전형적인 하나님의 나라 선교 패턴임을 부정할 수 없다.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을 읽으면서 자신의 선교 사역을 가리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말한 것(눅 4:18)도,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자신의 선교사역에 의구심을 느껴 보낸 제자들에게 답변한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눅 7:22)는 말도 결국 잃은 자를 다시 찾는 예수님의 선교를 대변하는 말이다. 이것은 누가복음의 중심부를 형성하는 예수님의 긴 선교여행 담화(9:51-19:27) 말미에 나오는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19:10)를 통해 확인된다. 따라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선교 전망에서 보아야 한다는 우리의 주장은 충분한 타당성을 지닌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작은아들을 15장 서두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세리와 죄인들을, 그리고 큰아들을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보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의 사역에 대한 변증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이러한 접근과 해석의 약점은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큰아들의 모습이 아버지의 실제 상속자라는 사실과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끝까지 작은아들과 큰아들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 되게 하려고 하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작은아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로, 그리고 큰아들을 귀환한 이스라엘을 괴롭힌 사마리아 사람으로 보려고 하는데, 이 역시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눅 10:25-37)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 그렇게 부정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조화되지 않음은 물론,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작은아들이 아닌 큰아들이 상속자인 사실(15:31)과 맞지를 않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작은아들을 기독교 신자를, 큰아들을 유대교 신자를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예수 당시 기독교 신자와 유대교 신자가 아직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과 맞지를 않을 뿐만 아니라, 자치하면 반유대교(anti-semitism) 사상을 예수님의 이야기에 주입하는 과오가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가 하나님을 대변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누구를 대변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작은아들만이 아니라 큰아들도 잠정적인 잃은 자에 해당된다고 한다면 작은아들과 큰아들은 아버지 하나님이 자신의 택한 종 예수를 통해서 찾으려는 모든 잃은 자를 대변한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여기에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 땅에 사는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이 포함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야기에 나오는 작은아들과 큰아들의 정체성을 밝히려는 것보다 오히려 둘 다 우리 모두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누가복음 15:11-32의 이야기를 미완성의 이야기로 남겨두신 것은 이 이야기가 듣는 모든 청중에게 관한 이야기이며, 그들에게 결단을 요청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간곡한 권면에 호응하여,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겠는가, 아니면 아버지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탈하는 또 하나의 잃어버린 탕자가 되겠느냐? 아버지의 요청을 받아들여 집으로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맞아들이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행복한 가정과 마을 공동체를 만들어가겠느냐, 아니면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는 물론 형제자매들과 이웃 사람들의 관계도 끊어버리는 가정과 마을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겠느냐?

누가복음 5:11-32의 예수 이야기는 예수가 의도하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목표로 하는 선교가 무엇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 개인의 영혼 구원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한 개인을 넘어 가정과 마을 공동체의 전인적 회복을 지향한다. 지나친 서구적인 개인주의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교를 편협되게 만들 수 있다. 한 개인의 진정한 회복은 그 개인의 영혼은 물론 그가 속한 가정과 공동체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나라 선교는 개인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전 피조 세계의 회복을 목표한다. 사람만이 아닌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자연 세계, 사람이 간여하거나 속해 있는 모든 조직, 체제, 문화, 사회 전체의 회복을 지향한다. 이 회복의 주역은 당연히 아버지이다. 하지만 회복의 대상은 우리요,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요, 이 세상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예수 이야기는 하나님의 나라 선교가 무엇임을, 그 대상과 강조점이 무엇임을 가르쳐주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아버지가 없었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벌써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되었을 것이고 마을 공동체도 회복되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온 작은아들을 사랑으로 맞이하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다시 집을 뛰쳐나가려는 큰아들을 간곡하게 붙들고 동생과 화해시키려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살진 송아지를 잡고 동네 사람을 불러 잔치를 배설하려는 아버지가 계시기에 이 땅에 있는 우리의 가정도 우리의 공동체도, 우리의 생태계도 희망이 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와 이 세상을 한없이 사랑하시고 끝까지 붙들려고 하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요 3:16), 우리는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공동체를 점차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실로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교를 보여주는 최고봉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최갑종(미국 Evangelia University 신약학 교수)/



출처 : 코람데오닷컴(http://www.kscoramdeo.com)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