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담을 넘어서
카이퍼의 『일반은혜』 1권
한병수 교수/ 전주대 신학전문대학원 전주대학교회
19세기가 저물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한 사상가가 개혁신학의 오랜 담장에 새로운 문을 만들었다. 아브라함 카이퍼, 그는 목회자요 신학자요 정치가요 문화 이론가로 활약한 사람이다. 그의 손에서 1902년 세상에 나온 『일반은혜』 1권은, 마치 오랫 동안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듯, 신학이 바라보는 세계의 풍경을 새롭게 바꾸었다.
카이퍼 이전의 칼빈주의 신학은 구원을 주목했다. 누가 선택을 받고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에 관한 질문들이 신학적 사유의 중심을 차지했다. 그러나 카이퍼는 타락한 세계에서 여전히 꽃이 피고, 예술이 탄생하며, 정의를 향한 갈망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서, 왜 이 세계는 완전한 혼돈으로 무너져 내리지 않는가에 물음표를 단다.
카이퍼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손길이다. 구원하는 은혜와는 다른, 그러나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손길, 그는 이것을 일반적인 은혜라고 명명한다. 이는 선택된 자들에게 주어지는 배타적인 선물이 아니라, 타락한 창조세계 전체를 감싸 안는 하나님의 광대한 자비였다. 그의 붓끝에서 일반적인 은혜는 세 가지 얼굴로 드러난다. 첫째, 하나님은 죄가 그논리적 결말에 이르지 못하도록 억제하신 다. 만약 죄가 자유롭게 광기를 부렸다면, 이 세계는 즉시 자멸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제방이 파괴의 홍수를 막아내고 있다. 둘째, 구원받지 못한 자들조차 어떤 종류의 선행을 실천한다. 불신자의 손에서도 정의로운 법이 제정되고, 이웃을 향한 친절이 활보한다. 셋째, 예술과 과학과 기술의 발전처럼 문명의 찬란한 성취들이 가능하다. 바벨론도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었고, 예수님을 모르는 예술가도 영혼을 울리는 음악을 창조한다.
이 통찰이 가져온 변화는 지각 변동에 가까웠다. 카이퍼 이전의 개혁주의 신학은 종종 세상을 향해 경계의 담을 쌓는 듯하였다. 그러나 카이퍼의 일반은혜 개념은 이 담장에 균열을 일으켰다. 하나님은 교회의 경계를 넘어서도 일하신다. 그분의 주권은 예배당의 문턱에서 멈추지 않고 땅끝까지 도달한다.
창세기의 노아 언약에서 카이퍼는 이 진리의 뿌리를 발견했다. “땅이 있을 동안에 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으리라.” 이것은 타락한 세계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시고 창조의 가능성을 보존해 주신다는 신적인 서약이다. 이 신학적 토대 위에서 카이퍼는 “창조된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 뼘도 없다”고 선언한다. 가정과 교회, 국가와 학교, 예술과 과학, 이 모든 영역은 고유한 법칙과 권위를 가지며, 직접 하나님 앞에 서며, 어떤 영역도 다른 영역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영역주권 개념을 설파했고, 이는 일반은혜 교리의 직접적인 열매였다.
그러나 혁명에는 언제나 저항이 뒤따른 다. 카이퍼의 동시대 및 후대 학자들은 날카로운 의문들을 제기했다. 은혜를 일반과 특별로 구분하는 것이 합당한가? 혹시 카이퍼는 하나님의 은혜를 둘로 쪼개 어, 구원의 은혜가 삶 전체를 바꾸는 통합 적인 힘을 약화시킨 것은 아닌가? 칼 바르 트는 더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했다. 즉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은혜이 며, 하나님의 자비에 “일반”과 “특별”의 구분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카이퍼가 열어젖힌 창문이, 바르트의 눈에는 신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위험한 틈으로 여겨졌다.
중세의 자연과 은혜의 이분법이 부활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카이퍼가 살았던 시대는 낙관의 시대였 다. 19세기 말은 진보를 믿었고, 문명의 상승을 당연한 것으로 기대했다. 카이퍼의 일반은혜 속에는 이런 시대의 공기가 스며들어 있다. 그는 인간 문화의 발전을 일반적인 은혜의 증거로 보았고, 역사가 어떤 긍정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 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럽은 전쟁의 지옥불에 휩싸였 다. 문명의 심장부라 할 유럽에서 전례 없는 야만이 폭발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 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문화적 낙관론에 대한 가장 참혹한 반박 자체였다. 은혜가 보존하고 발전시킨 문화 속에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참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에도 카이퍼의 목소리는 여전히 쟁쟁하다. 오늘날 우리는 전례 없는 다원화를 경험하고 있다.
기독인은 소수가 되었고, 교회는 세상에서 문화적인 변방이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관련된 질문 들이 각 분야에서 쏟아진다. 이에 대해 카이퍼의 일반은혜 개념은 하나의 답을 제시 한다. 우리는 믿지 않는 이웃과 함께 공동 선을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 모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완벽한 동의에 이르지는 못해도, 정의와 진선미를 향한 공동의 노력은 가능하다. 일반은혜 개념은 고립이 아니라 참여를, 도피가 아니라 책임을 요구한다.
현대 신학은 카이퍼가 구분했던 것들을 다시 그리스도 안에서 통합하려 한다. 모든 은혜는 결국 십자가를 향하고 있으며, 모든 문화적 성취는 종말론적 완성을 기다 린다. 그럼에도 카이퍼가 열어놓은 길, 즉신학이 서재를 벗어나 광장으로 나아가는 길, 복음이 영혼만이 아니라 문화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용기, 하나님의 주권이 교회의 담장을 넘어 모든 피조 세계를 아우르고 있다는 확신은 『일반은혜』 1권이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읽히는 이유이다. 비판적 읽기를 통해 이 책과 만나면 온 세계에 대한 성경 중심적인 이해와 대응의 실마리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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