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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설교(1)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09. 11. 23.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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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설교(1)


  이 소논문은 우리가 잘 아는 고재수 교수님(prof. dr. N.H. Gootjes)이 교리문답 설교(CATECHISM PREACHING)Ⅰ,Ⅱ라는 제목으로  1993년 9월 ICRC 모임에서 제출하시고 발표하신 논문입니다(이 글은 ICRC 1993년 회록, pp.136-163에 기록되어져 있는 글입니다. 지난 호에서 교리문답 설교Ⅱ가 1997년도에 발표되었다고 했는데, 1993년 ICRC회록을 보니 Ⅰ,Ⅱ가 2회로 나누어져서 발표된 것이었습니다. 저(손정원)의 미숙한 번역으로 우리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올립니다.


서론 

 

교리문답 설교는 ICRC 회원으로 있는 교회들 내에서 행하고 있는 일반적인 관행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교리문답은 화란의 배경을 가진 개혁파 교회들에서 설교되며, 영국/스코틀랜드 배경을 가진 장로교 교회들은 이 전통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를 하는 교회와 하지 않는 교회가 ICRC와 같은 하나의 모임에서 만나게 될 때, 이런 차이점을 토론하는 것은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좋은 토의를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이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이해를 같이 하는 것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교리문답 설교란 무엇이고, 왜 여기에 대해 논의해야 합니까? 우리는 필립 샤프가 쓴 책 {기독교계의 신조들}에서 우리의 논의를 출발하고자 합니다. 필립 샤프가 자기 책에서 한 말은 심지어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잘 표현해 주는 듯합니다. 필립 샤프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찬미하는 자였습니다. 신조들의 역사에 관한 자기 책에서 그는 가장 많은 문단의 분량을 할애한 것들 중의 하나가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입니다. 그는 교리문답 설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에 대한 알기 쉬운 부연 설명, 주석, 설교, 공격과 방어를 논하는 총서들이 쓰여졌다. 많은 개혁 교회들, 특히 화란(또한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매주일 오후에 교리문답을 강단에서 설명하는 일이 의무거나 관습으로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한다. 따라서 그 문답들은 칼빈의 교리문답에서 설정된 예를 따라서 52주일로 나누었다.[1]

 

그는 52주일로 나눈 것에 대하여 한 각주를 덧붙혔습니다.

이런 52주일의 구분은 아마도 이른 시기인 1566년의 라틴어 판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것이다.[2]

필립 샤프가 교리문답 설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1. 샤프는 교리문답 설교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작성한 본래 의도 중 하나였는지 아니었는지가 불명확하다고 했습니다. 만약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초기의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 교리문답은 1563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1566년 판의 52주일의 구분은 그때[1566]로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로 교리문답이 설교되어져야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2. 52주일로 나누는 것은 칼빈에게로 소급되고 이 사실로부터 교리문답 설교를 행하기 시작한 것은 칼빈에게로 소급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는 점입니다.

3. 교리문답 설교는 특별히 화란 교회들과 화란 후손들의 교회들에서 관습이었고 지금까지 그렇다는 것입니다.


샤프의 견해, 또는 아마도 세계 개혁교인들 대부분의 견해를 보면 교리문답 설교가 이중의 한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 이중의 한계는 교리문답 설교가 칼빈주의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과 칼빈주의 전통 중에서도 화란 전통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하에서 이런 샤프가 주장하는 세 가지 진술을 검토해 볼 것입니다. 이 작업은 우리에게 교리문답 설교의 가치에 대해서 적절하게 토의하는 데 꼭 필요한 배경을 제시하여 줄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과 설교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1563년 1월에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이 교리문답은 팔쯔(Palatinate)의 교회법에 포함되어지기 전에 몇 가지 변화를 거치게 되었는데, 그 교회법은 팔쯔의 선제후들이 1563년 11월 15일 출간한 것입니다. 52 주일로 나눈 것은 이 판(edition)에서 처음 나타납니다.[3] 그래서 샤프가 교리문답을 주일로 나눈 것이 이른 시기라고 주장한 것은 올바른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주일(Lord's day)로 나눈 것은 사실 샤프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전이었습니다. 주일로 구분한 것은 교리문답이 처음 출판되었던 그 해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교회법에서 가정, 학교, 교회가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어떻게 협력해야 했었는가를 읽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학생들은 교리문답의 질문과 대답들을 학교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오후 예배에서 목사가 전(前)주에 설교했던 문답과 이번 주의 오후 예배에서 설교했던 문답을 말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교리문답은 주일 별로 나누어진 것입니다. 목사는 적어도 일년에 한번 그 교리문답을 전부(through) 설교해야 합니다.[4] 교회법은 주일로 나눈 것이 설교와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나중에 추가된 생각이 아닐까 하는 인상이 풍깁니다. 왜냐하면 교리문답이 1563년 1월에 출판되었고 교리문답을 설교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교회법이 그해 11월까지도 아직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게 가르칩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바로 처음부터, 즉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이 만들어졌을 때부터 의도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지적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 지적들 중에 하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주 저자였던 우르시누스(Ursinus)가 1563년에 쓴 편지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기가 다 해내기에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시당국이 그에게 할 일을 더 많이 주어서 이제 그는 주일 3시 교리문답 예배에서도 교리문답을 설교해야 했습니다. 이 3시 설교는 이전에 올레비아누스(Olevianus)가 했던 것이었습니다.[5] 이 사실은 교리문답 설교가 적어도 팔쯔의 수도인 하이델베르크에서는 교회법의 출판보다 더 이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교리문답 설교를 바로 그 교리문답의 시초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해 볼 수 있겠습니다. 1563년 1월 19일로 되어 있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첫 판 서문에서 선제후는 자기 영지 안에 있는 설교자들과 교사들을 충동질하고 지시하기를, 이 교리문답을 어린아이들에게는 학교와 교회에서, 일반인들에게는 교회 강단을 통하여 되풀이하여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6]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교회에서 설교였을 뿐 아니라 교실에서도 가르쳐지게 하려고 만든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이전의 교리문답설교


샤프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52주일로 나눈 것이 칼빈에게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비록 샤프가 그렇게 명백히 말한 것은 아닐지라도, 교리문답을 매주 설교하는 일이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역할 때도 또한 관행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에 말한 진술인 제네바 관행설은 옳은 것이고, 앞에 말한 52 주일 구분설은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닙니다.

 

칼빈은 두 개의 교리문답서를 저술했는데, 하나는 그가 제네바에서 추방되기 전에 저술했고, 다른 하나는 그가 제네바로 돌아온 후에 저술한 것입니다. 이 둘 중 두 번째 것은 질문과 대답에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와 같은 형식입니다. 이 교리문답서는 두 언어로 출판되었습니다. 즉 1542년에 프랑스어로, 1545년에 라틴어로 출판되었습니다. 프랑스어 판은 각주를 지나서, 주일로 구분되었습니다.[7] 라틴 판에서 이 구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주목할만한 것입니다. 라틴 판은 일반적으로 신학계에서 제네바에서 개혁 교리들이 어떻게 가르쳐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주일로 나누는 것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어 판은 제네바의 경우 교회 회원들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이 교리문답이 주일에 설교되어야 했기 때문에 주일에 따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눈 것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처럼 52 주일로 나눈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55 주일로 나눈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눈 것은 제네바에서 하이델베르크에서처럼 매년마다 전 교리문답을 다 설교하는 하이델베르크와 같은 그런 동일한 규정이 없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까? 교리문답 설교가 어떻게 제네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칼빈은 교리문답을 제네바의 1541년 교회법에 나오는 설교에 관한 규정에 따라서 만들었습니다. 이 교회법은 매 주일마다 세 번의 예배를 드려야 할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세 번의 예배 중 정오에 시작되는 두 번째 예배가 교리문답 예배입니다. "정오에 있는 것이 교리문답 예배이고, 그 예배는 제네바에 있는 세 교회 모두에서 어린아이들을 가르친다."[8] 나중에 교회법에서 이런 교육을 다시 언급할 때 단지 '가르치는' 교육만이 아니라 뭔가가 덧붙어 있습니다. "교리문답 예배의 명확한 규정은 아이들이 가르쳐지고, 이에 근거하여서 교훈이 주어지는 것으로 구성된다. 곧 아이들이 들은 것에 대하여 곧 그것을 잘 들었고 잘 기억하는 가를 알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으로 구성된다"[9]

 

이런 규정들은 우리에게 그 시대의 관행을 파악하는데 어떤 관점을 제공해 줍니다. 교회의 교리문답식 교육은 주간 중에 실시되지 않고 오히려 주일에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10] 예배 그 자체가 교리문답 학습을 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예배시간 동안 교리문답을 말해야 했고, 목사가 설교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누가 이 교리문답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까? 이 규정은 이 점을 온전히 명백히 밝히고 있지는 않으나, 확실히 '어린아이들'만은 아니었습니다. 학교 교사와 아버지들도 어린아이들과 함께 참석해야 했고, 가사를 돌보는 자들도 예배로 보내져야 했으며, 제네바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도 이 예배에 참석해야 했습니다.[11]

 

그러나 우리는 제네바 교회법 어디서도 교리문답이 일년 내내 설교되어져야 한다는 규칙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제네바와 하이델베르크 문답서 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문답 설교에 있어서는 둘 사이에 많은 유사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가 칼빈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결론짓는 것은 잘못일 것입니다. 실제로, 교리문답 설교는 종교개혁시대의 교회들의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에 교회들이 행했던 교리문답 설교

 

교리문답 설교는 이미 루터에게서 발견되어집니다. 1527년 곧 루터가 95조항을 출판하고 십년이 지나서 교회 감찰단이 종교개혁의 방법에 있어서 루터를 따르는 교회들 안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최초의 교회 방문단원들 중에 하나가 루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스스로 자신이 시작한 개혁이 지역 교회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볼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기겁을 했습니다. 그는 일반 교회 백성들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발견했고 특히 시골 지역은 더욱 더 그렇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된 주요한 이유 중 하나가 목사들이 말씀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정상적인 훈련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종종 설교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이전의 사제이기 일수였습니다.

 

그리하여 루터는 그가 십계명과 사도신조와 주기도와 성례에 대하여 설교했던 것들을 개정하여 이것들을 "대교리문답"(1529)이라는 표제 하에 출판했습니다. 이것은 목사들을 위한 설교 모델로써 쓰여지도록 의도되었으며 그리하여 설교자들은 교의의 주요 부분들에 관하여 설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12] 루터가 소교리 문답에다가 더하여 만든 이 대교리문답은 날마다 읽혀졌고 자녀들의 교육을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이 교리문답 교육은 종교개혁 운동이 지식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약해져 가고 있는 때에 준 루터의 답변이었습니다.

 

이 대교리문답 설교와 교육은 1533년 비텐베르크 교회법에서 교리문답 설교에 관한 지침으로 이어졌습니다. 매 주일 아침마다 사제나 집사는 교리문답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전체 교리문답서를 다 설교한 후에는 그 전체 교리문답를 다시 설교하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설교자는 잘, 성실하게 교리문답서 전체를 설명할 충분한 기회를 가지게 되고, 이렇게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것은 특별히 일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었습니다.[13] 여기서 교리문답 설교는 자녀들과 교회 성도들이 배워야만 하는 주요 부분, 즉 신조․십계명․주기도, 또 이에 성례에 관한 부분이 덧붙여진 교의의 중요한 부분에 관한 설교를 의미합니다. 루터 교회와 칼빈주의 교회 사이의 교리문답 설교 실행에는 차이점들이 있습니다. 루터가 만든 대교리문답은 교리문답식 설교의 모형을 제시한 것인 반면에 제네바의 교리문답서는 설교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단지 설교를 위한 출발점으로 쓰일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루터 교회의 교리문답 설교는 처음부터 교회의 어린 회원들을 위한 교리문답적 가르침과는 구별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구별된 어린 회원들을 위한 교리문답식 가르침은 1521년의 매우 이른 시기에 시작되었습니다. 개혁 교회들은 주의 만찬에의 허용으로 이끄는 교리문답식 교육이 교리문답 설교와는 분리하여 가장 잘 지도될 수 있음을 늦게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처음 2세기 이상 루터 교회들에 교리문답 설교가 있었습니다.[14]

 

교리문답 설교의 필요성은 루터주의에서 뿐 아니라 쯔빙글리 종교개혁 진영에서도 느꼈습니다. 1532년 불링거와 레오 유대는 쮜리히 시를 위한 목회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그 규례들 중 하나가 목사들은 오후 예배에서 기독교 신앙의 한 조항씩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해에 레오 유대의 교리문답이 출판되었을 때 이것은 교리문답 설교를 위한 기초로써 쓰이게 되었습니다.[15]

 

우리는 교리문답 설교가 대륙에 있는 종교개혁 진영의 세 주류에서 세워졌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루터주의, 쯔빙글리파, 칼빈주의.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예외였던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는 교리문답 설교가 행해졌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도 예외적으로 교리문답 설교가 행해졌던 곳이 있는데 그들은  런던에서 회합한 다른 나라에서 온 피난민 교중의 모임입니다. 그들의 교회법에 따르면 교리문답이 설교되어야 했습니다.[16]

 

그러므로 샤프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설교의 배경으로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종교 개혁만을 본 것은 너무 제한적인 것입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교회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제도였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 행했던 교리문답 설교

 

기독교 신앙의 요약(신조, 십계명, 주기도, 성례전의 의미)에 대해 설교한다는 의미로 취하여진 교리문답 설교는 종교개혁이 만들어 낸 산물입니까? 루터는 말합니다. "우리가 강단에서 교리문답을 설교할 때 그것은 이전 일 천년 동안이나 행해지지 않던 어떤 것이다."[17] 이 말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루터 이전의 설교자들이 교리문답에 관해 설교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옳습니다. 그러나 교리문답 설교가 필수적이라고 하는 것이 중세 동안에도 인식되어졌다는 것은 볼 수 있습니다.

 

맨 먼저, 13세기 말까지 지방 사제들은 주의 기도와 사도신조를 매주, 십계명과 교회의 칠성례는 한 달에 한번 또는 최소한 일년에 3~4회는 강해할 것을 지시 받았습니다. 이 강해는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리고 모국어로 주어져야 한다는 부가적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그 의도가 일반 교회 회원들이 이 신앙의 조항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18] 만약 이런 설명이 매주 복음서와 서신서들에 대한 설교에 추가해서 생겨난 것이라면, 그 설명은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교리문답식 요약에 관한 설명들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1294년의 이 지시가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19]

 

그 몇 년 전에도 유사한 결정이 영국에서 내려졌었습니다. 1281년 람베트(Lambeth) 총회는 성직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지식의 결핍에 대하여 불평했습니다. 모든 지역교회의 목사들은 신조, 십계명, 율법의 두 대강령, 일곱 가지 자비의 행위, 일곱 가지 주요 악덕, 칠 덕과 칠 성례를 가르치도록 명령받았습니다.[20]

 

독일에서도 요하네스 게르손이 교리문답적 주제를 설교했습니다. 그는 십계명과 신조들을 토론했습니다. 많은 다른 대중적 설교자들도 교리문답으로부터 주제들을 정하여 설교했습니다.[21] 이런 일들이 교리문답 설교를 하나의 전통으로 만들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유의 설교를 칭찬하고 있는 목회에 관한 책도 있습니다. 사제들이 아침이나 오후 예배에서 어린이와 어른을 위한 신앙의 조항과 십계명을 설명하고 그들이 얼마나 그 내용을 이해했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좋은 전통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책은 1498년에 출판되었으니,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기 거의 25년전입니다.[22]

 

교리문답 설교는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이에 대한 증거로써 루터 자신을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루터 자신도 1517년 이전에 교리문답을 설교했습니다.[23] 그리고 그 자신의 대교리문답서 서문에서 루터는, 중세 때로부터 전해진, 목사가 가르쳐야만 하는 모든 개개의 것들을 포괄하고 있는 여러 개설서들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24] 루터는 교리문답 설교를 만들면서 교회에서 결코 실제적인 도구를 공급받은 적이 없었던 중세의 규칙 하나를 단지 집행했을 뿐이었습니다.[25] 그의 개혁이 처음으로 교리문답을 강단으로 가져왔다는 루터의 주장은 단지 그때 그 규례가 만들어지고 지켜졌다는 의미에서만 옳습니다.

 

이 전통은 중세 시대에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까요? 적어도 약 A.D. 800년까지는 교리문답 설교가 프랑스의 샤를마뉴 대제의 영향 아래에서 일어난 교회의 회복에서 강조되었습니다. 789년에서 비롯되는 한 규정은 주교들로 하여금 사제들의 신실한 신앙 유지와, 그들 스스로의 주기도문 이해와, 그것을 모두가 이해할만한 방식으로 설교하는지를 감독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852년에 있었던 지시는 각 사제들이 신조와 주기도에 대한 설명을 정통 교부들의 전통을 따라 널리 연구하여 설교를 함으로 신자들이 그 내용들을 믿게 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26] 이 규정들은 교리문답 설교가 경시되었음과 동시에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졌음을 보여줍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심지어 중세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는 이미 교부시대 동안 교리문답식 가르침에 대한 설교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거스틴(354-430)의 신조 설교는 잘 알려진 바입니다. 그는 또한 모세의 십계명에 대한 연속 설교도 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의 또 다른 예는 약 A.D. 350년에 예루살렘의 시릴이 한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조, 성례, 예배예식에 관하여 이 설교들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27]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으로써 교리문답은 기독교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습니다. 이미 교회 교부들의 시대에 교리문답적 가르침의 수단 중 하나가 교리문답 설교였습니다.


네델란드에서 행해졌던 교리문답 설교

 

샤프가 한 세 번째 논평은 교리문답 설교가 특별히 네덜란드와 네덜란드로부터 온 교회에서 유지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옳지만,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교리문답 설교는 반대 없이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며, 다른 나라에 있는 교회들의 지지 없이 유지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먼저 우리는 어떻게 교리문답 설교가 네덜란드에서 설립되었는가를 살펴보려 합니다.

 

1566년 이른 시기, 하이델베르크에서 교리문답을 채택한지 3년 후에, 이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암스테르담에서 규칙적인 기초 위에서 설교되었습니다.[28] 이 사실이 말하는 바는 교리문답 설교가 심지어 개혁 교회를 위한 어떤 교회법이 채택되기 전에 이미 국부적으로 설립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에서 개혁 교회의 생활을 조직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1568년 베젤에서 열린 모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거기서 만든 규례에서 교리문답 설교가 다루어졌습니다. 세 가지 형식의 교리문답식 가르침이 교회에 이어 부모와 학교 교사가 교리문답을 가르쳐야 하는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교회의 그 의무에 관련하여 일반적 규칙은 자녀들이 교리문답을 글자 그대로 정확히 암송하도록 배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도록 모든 노력이 기울여져야 함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공식적으로, 예배예식 동안에!) 그들이 단어들을 이해하는가,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용을 이해하는가를 보기 위한 질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젤에서 모인 형제들은 단순한 용어가 교리문답 설교에 요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점을 베젤 조항의 말로 하면, "교리문답을 설명하는 데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가능한 만큼 더 많이 매우 명백하고 자녀들이 이해하기에 적당한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29] 교리문답 설교는 일차적인 교육의 수단으로써 명백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도르트레흐트 지방 총회(synod)가 1574년에 모이기까지 교리문답 설교는 교회들 안에서 설립되어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총회는 심지어 주의 만찬이 기념된 그 주의 오후 예배에서조차 "교리문답의 설교는 평상시와 같이 유지되어야 할 것"이라는 규례를 만들었습니다.[30]

 

이것이 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가가 이 총회에서 논의되어진 것에 대한 유일한 이유는 아닙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한 좋은 설교들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은 일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어졌습니다. 아마도 목사들은 신조, 십계명, 주님의 성만찬과 같은 주제에 대하여 설교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가 루터를 생각할 때, 그는  대교리문답을 교리문답적 주제에 대한 모범 설교의 모음으로 의도했었습니다. 그러나 총회는 다른 해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역 목회자들 모임(classis)에서 목사들은 순번으로 돌아가면서 교리문답의 어떤 문답들에 관하여 간략한 주해를 제시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서로를 도울 수 있었고 교리문답을 "철저하게 그리고 교훈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서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31]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했던 것 같습니다. 1581년 제국 총회는, 총회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이 교리문답에 관한 바스팅기우스 박사의 설교들이나 다른 설명들을 자세히 검토한 뒤에, 그것들을 출판하도록 해달라는 요구를 다루었습니다. 바스팅기우스와 그의 교회가 속한 지역목회모임(classis)은 교리문답에 대한 설명서를 만들라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32]

 

1586년 총회는 다시 교리문답 설교에 관한 규례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곳에 있는 각각의 목사들은 오후 설교에서 교리문답을 설교하는 그 규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교리문답 전부를, 주일로 된 교리문답의 구분에 따라, 일년마다 한번씩 설교해야 했습니다.[33]

 

이런 결정들은 교리문답 설교가 네덜란드에서 많은 어려움 없이 설립된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교리문답이 모든 교회에서 설교되어졌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관례는, 이런 결정이 있은 후 일 백년이 지나기까지도 견실하게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때 이후로 교리문답 설교는 두 가지 도전을 극복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 반대는 실천적 성격의 문제였고, 두 번째는 교리문답 설교 자체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실천적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항상 만들어 지기 쉬운 것은 아니었으며, 특별히 시골의 작은 동네들에서 그랬습니다. 어떤 목사들은 여러 시골 교중들에게 봉사했으며, 서너곳을 돌아가면서 설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규칙적인 교리문답 설교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리문답 예배가 대중적인 예배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한 목회자들의 모임은 시골에서 단지 한 교회만을 섬기는 목사는 오후에 교리문답을 설교해야만 하며, 그때 심지어 단지 몇몇만이 참석한 경우에도 그래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이유로써, 안식일 훼방을 막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34] 교리문답 예배에의 참석율은 저조했습니다. 어떤 장로감독회(classis)에서 그 교구에 속한 딴 교회의 참석율은 어떤가를 서로 알아보았더니, 교회A는 교리문답 예배가 있다고 세 번이나 알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교회B의 경우도 세 번 광고를 했으나 두 명이하의 성도들이 교회에 왔습니다. 교회C는 교리문답 예식을 열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교회D에서는 관리인만이 유일의 청중이었습니다.[35] 이런 현상은 교리문답 설교를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보여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인들은 주일 오후를 그들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개방해놓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를 견고하게 설립하는 데는 약 한 세기가 걸렸습니다. 그러나 한번 확립된 후에는 교리문답 설교는, 그 역사를 추적한 바 있는 스호우털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리 저리로 흔들리지 않고 모든 교훈의 풍조에 끌려 다니지 않는 성숙한 교중"[36]을 낳았습니다.

 

이 설교의 형식에 대항하는 두 번째 반대가 더 무게가 있는 것입니다. 하우다(Gouda)의 교회 목사들이 1586년 총회의 규정을 깨뜨리고 교리문답을 설교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그 이유가 인간이 만든 본문은 교회에서 읽히거나 설교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요 총회들이 이를 그냥 지나가도록 허용하지는 않았습니다. 한 지방 총회는 문답형식의 교리문답은 성경에서 명령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근본 조항들의 요약을 가지거나 가르치는 것은, 히브리서 6:1에 보면, 사도적 전통이다고 했습니다. 이 전통은 언제나 교회에 남아 있었으며 큰 유용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37]

 

그러나 교리문답을 설교하기를 거절하는 배후의 진정한 이유는 여러 목사들이 특히 아르미니안(Arminian)적 확신으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교의를 대항하는 반대 이유를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이 점은 특히 도르트 총회 몇 년 전에 명백해졌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항의하는 목사들(Remonstrant:항론파)에게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으로부터 취하여진 명제들에 동의 진술할 것이 요청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목사들은 그 교리문답의 교의에 동의한다고 선언할 수 없었습니다.[38] 이 반대의 결과로써 교리문답 설교는 1618년 도르트 총회에서 논의되었습니다.[39]


도르트 총회의 논의

 

교리문답 설교는 도르트 총회에서, 국내의 대표들만이 아니라 외국 교회의 대표들까지 참석한 때에 논의되었습니다. 교리문답 설교는 단지 화란의 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도르트 총회의 회의록(the Acts of Synod)에는 단지 외국 대표의 조언들만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조언들이 그 당시 개혁 교회들 내에서의 교리문답 설교의 역사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를 형성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몇 가지를 발췌해볼까 합니다.[40]

 

대영제국의 신학자들은 '사도들의 실천과 이성과 경험이 우리에게 문답식 교육이 필수적이라고 가르친다는 일반율로 시작했습니다. 신앙의 거룩한 교리를 가르치는 데는 두 기회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하나는 매주 일어나는 기회이고 특별한 하나는 주의 만찬에 참석하기 위한 준비에 속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매주 교리문답 예배는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참석해야 하나, 단지 어린이들만이 문답에 응해야 합니다. 이것은 영국 대표들이 교리문답 예배를 공식적인 교리문답 교실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문답의 공적인 낭송은 단지 어린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보다 나이든 사람들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듯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른들도 또한 교리문답을 잘 암기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영국인들은 목사들을 위한 조언도 하고 있습니다. 목사는 가능한 가장 명료하게 매 대답을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설명에 대하여 학생들에게 물어서, 그들이 그 설명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아이들의 답에서 그의 설명이 이해되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는 만족할 수 있을 것이나,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가능하다면) 더 명료한 설명을 해주어야 하며 반복해야 합니다. 다른 흥미로운 언급은 정부가 교리문답과 관련해서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태만하면 처벌을 받아야만 하고, 어른이 교리문답 설교에 참석하지 않으면 벌금이 과해질 것입니다.

 

팔쯔의 신학자들은 많은 이단들이 모든 곳에서 발견되는 주 요인이 교리문답적 가르침을 무시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라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주일날 오후에는 간략한 교리문답 설교가 선포됩니다. 그 후에 목사는 강단으로부터 내려와서, 교리의 어떤 부분을 읽고 교리문답의 몇 문답을 선별적으로 전혀 학교에 가보지 못한 어른들에게 설명합니다. 오후 예배는 여기서 이중의 기능을 가집니다. 곧 교리문답 설교의 기능뿐 아니라 학교에서 교리문답을 배우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교리문답 교육의 기능을 가집니다.

 

또다른 독일 국가인 헤세의 신학자들은 우선 성경에 일치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이해에 적합하기도 한 그런 교리문답이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화란 교회는 이런 교리문답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안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신학자들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대항하는 항론파의 반대에 동의할 수 없다고 서명하기까지 하려 했습니다.

 

목사들은 정규적인 시간에 교리문답을 가르치고 또 교리문답을 설교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에 태만한 사람은 처벌받아야 합니다. 부모들은 공적 교리문답 질의응답 시간에 참석하여서, 그들 자녀들에게 그 교훈을 반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을 단위에서는 교리문답이 교리문답 설교 이후에 가르쳐지면 충분할 것이요, 도시의 경우 주간 중 두개의 교리문답 교실이 있게 될 것입니다.

 

스위스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공화국 사이에서 그 실천에 차이가 있으나 교리문답 교육은 모든 곳에서 견지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주일에 많은 설교들이 도시와 마을들에서 전파되는데 그 중 하나가 교리문답 설교입니다. 교리문답은 매년마다 설교될 것이며, 이는 반복을 통하여 보다 나은 기억의 상태에 머무르게 하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주일의 교리문답 예배는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는 사람들과 학교에 다닐 수 없는 사람들이 참석하게 됩니다. 주간 중의 일하는 날에 교리문답은 학생들을 위하여 설교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이 한 주를 단위로 교리문답 설교를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네바에서의 실천은 스위스 신학자들의 보고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개별적으로 설명됩니다. 제네바의 대표들은 사도신조, 주기도, 십계명, 성만찬의 교의가 명료하고 간단하게 설명된 어떤 형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 형식의 둘 혹은 세 조항이 몇 몇 적절한 성경 구절들과 함께 주일 오후 예배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여기 제네바에서도 역시 목사가 교리문답(예배)에로 사람들을 거의 모을 수 없다는 그 문제가 광범하게 인식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최소한 어린 자녀들과 그보다 나이 든 아이들은 참석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길고 연설적인 교리문답 설명들에 반대하는 특별한 경고가 더해집니다. 설명은 문답의 질문에 포함된 주제를 논하고, 그리하여 청중의 동의를 유도해야 합니다.

 

이제 독일 도시들의 신학자들의 조언이 따라 옵니다. 브레멘의 신학자들은 강한 어조로 시작합니다. 즉 교리문답식 교육은 교회 설립의 기초이다고 합니다. 교리문답을 배우는 세 가지 방법이 언급되고 논의된 바, 학교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입니다. 교회에서의 교리문답에 관하여는 두 번째 설교 대신이나 후가 좋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것은 어쩌면 예배의 비정규적 부분일 것이며, 우리는 여기서도 역시 공적인 질의를 발견합니다. 그들 조언의 끝에서 이 신학자들은 다시 한번 강한 언급을 하는데, 만약 어린이들이 교리문답 안에서 잘 교육된다면 우리는 성인들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고 합니다.

 

엠덴에서의 교리문답 교훈의 설명은 역사적 평가로 시작합니다. 즉 구원 교의의 확고한 지식을 얻는 데 교리문답 교육보다 더 필수적인 게 없는 한, 그리고 그것이 영적 집의 기초라면, 결국 1520년 종교개혁의 시초에 우리 선조들은 자녀들과 어린이들도 역시 기독교 교리의 그 첫 번째 원리로 가르침을 받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이 언급은, 여기 교리문답 교육이라는 대목에 이르러 개혁 신앙인들은 그들 스스로도 루터파 종교개혁이 그 시초에 섰던 그 선상에 서 있는 것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엠덴의 보고는 또한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어떻게 교리문답 예배가 조직되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학교 교사는 그들의 학생들을 매 주일 오후 교회로 데리고 옵니다. 목사는 이 오후 예배에서 먼저 기도하고, 다음으로 기독교의 주요 단락들, 예를 들어 십계명, 신조, 세례와 주의 만찬의 설립 등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이 아이들에게 그 예배 동안 설명될 문답을 암송하도록 합니다(아이들은 10세가 되기까지는 엠덴의 교리문답 전부를 암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 후 목사는 암송된 문 답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그것들을 생활에 적용할 때, 마치 성경 본문을 설교할 때처럼 합니다. 세 달내로 그들은 전체 교리문답을 반복할 것입니다.

 

이 독일 북부에서도 교리문답 설교를 세우는 데 있어서 모든 다른 지역에서 느낀 그 동일한 문제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은 포기해서는 안 되다. 시골의, 또는 단지 몇 명만이 그 예배에 참석하는 그런 곳의 목사들도 봄, 가을, 겨울 동안 간략하게 교리문답 설교를 합니다. 경험이 가르치는 바는 청중들이 긴 설교를 혐오한다는 사실입니다.

 

외국 대표들의 조언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모두 교리문답 설교를 실제적으로 설립하기를 원했습니다. 도르트 총회가 부모와 학교 교사의 교리문답 교육 다음으로 교리문답 설교를 설정한 사실은 약간 놀랍습니다. 도르트 총회는 적당히 짧고, 가능한 대로 단지 성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이해가 적합한 교리문답 설교를 시행하는 것은 목사의 의무라고 결정했습니다.[41] 교회법에는 교리문답이 오후 예배에서 설교되어야 한다는 그 규칙이 68조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샤프에게로 돌아가서, 그는 올바르게 교리문답 설교가 부분적으로는 네델란드의 개혁 교회에서 창설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도르트 총회의 시기에 전 개혁주의 진영이 교리문답 설교에 찬동하고 그것을 실천했다는 것 또한 주목할만합니다.(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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