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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성장 개념

고재수선교사

by 김경호 진실 2009. 11. 18.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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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의학적 입장에서 본 교회성장 개념

 

고재수 교수(Dr N H Gootjes)

 

 

우리가 교회성장 하면 Donald A. McGavran의 이름이 얼핏 생각나다. 그는 풀러 신학교에서 선교학(School of Mission)을 가르치고 있다. 1970년에 Understanding Church Growth 책을 써내었다.

 

10년 후 80년에 개정판이 발간되었다. 맥가브란의 교회 성장은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많은 선교사들이 맥가브란의 방법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있다. 또한 현재 많은 나라에서 그들의 기독교 상황에 교회 성장의 원리에 따라 보고되고 있다. 그리고 이 원리에 따라 복음전도에 실제적인 전도경과에 대한 여러 책의 논문들이 논의되어지고 있다. 지금은 이 교회성

장 원리의 실제적 결과가 아니고 조직신학적 원리의 출발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것에 관한 신학적 복음은 옳은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어떤 전도의 방법을 쓰기 전에 또한 어떤 전도의 방법을 쓰는 동안에도 그 방법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된 것인지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이라는 책의 원칙들을 심사해 보고자 한다. 그의 교회성장에 대한 책을 읽는 사람은 여러 가지 좋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그분의 복음전도의 열정을 이 책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참 좋은 점이라고 생각된다. 본인이 동의 할 수 있는 몇 가지 점을 든다면 맥가브란이 어떤 부류의 사람이 가진 선교사관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선교사란 학교, 병원을 짓도록 도와주는 사람, 농부들에게 농사를 짓는 방법에 대해 충고하는 사람이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다” 이런 의견에 대해 맥가브란은 날카롭게 비판하는데 그의 이 견해는 옳은 것이다. 맥가브란이 반대하는 이 견해는 오늘날 기독교계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 부류 중에 어떤 이들은 선교사의 중요한 임무란 이 땅에 사회적인 정의를 설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신학자들은 전도하는 일을 하지 않았으며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도란 전도를 받는 사람이 속한 고유한 교육이나 문화적인 배경에서 그를 격리시키는 것이며 자기 친족들에게 여러 곤란을 야기하므로 우리는 전도하는 일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신학적인 상황 가운데서 맥가브란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교사의 가장 중요하고 첫째 되는 임무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선교의 중요한 출발저이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회적인 불의에 대해 싸우도록 명령합니다만 이러한 사실이 가장 중요한 임무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를 전하는 일을 중시하게 한다면 그것은 안 된다. 본인은 맥가브란의 입장과 같이 복음 전하는 일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싶다.

 

 둘째로 맥가브란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설득(persuade)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생각은 중요한 생각이다. 모든 선교사는 전도 받는 사람을 억지로 예수 믿게 하려 하면 안 된다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과 어떤 것을 주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어서 과자 드세요 하는 말과 예수님을 믿으세요 하는 말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다과는 받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예수님의 은혜는 꼭 받아야만 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복음과 개종하라는 명령을 포함한다. 그래서 신약에는 설득하는데 대한 아이디어로 여러 번 말한다. 사도 바울이 그의 전도사 역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고후 5장 11절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느니...” 여기서 권한다는 뜻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전도자가 애를 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을 단순히 흥미 있는 이론들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생명의 말씀으로 제시해야 한다. 예수님 이외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야 한다.

 

셋째로 세울 교회의 위치를 올바르게 강조한다. 어떤 선교사들은 교회가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맥가브란은 그런 선교사들의 말을 반대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나. 이 교회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고려하여 볼 때 옳은 것이다. 신약에서 볼 때 교회란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우셨던 것부터 12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12사도의 12이름이 있는 새 예루살렘까지 중심 된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고 말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나는 확신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내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전도를 통해서 그의 교회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는 맥가브란은 어떤 사람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을 때 교회는 그 초신자를 위하여 더 많이 도와주어야 된다고 한다. 맥가브란은 folding and feeding 즉 교회가 그들을 한 우리 안의 양떼로 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도 중요한 점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예수 믿는 자가 되도록 애쓴 후에 그 사람이 교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하여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이 초신자는 특별한 배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 대하여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로 그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신자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대전도 명령을 하셨을 때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라” 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모든 교인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살게 하고 행해야 하는 것처럼 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도록 특별한 배려가 있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사탄은 어떤 사람이 교회에 출석한다고 그 사람을 위촉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사탄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새 신자들이 쉽게 사탄에게 속히는 편이다. 그래서 맥가브란이 올바르게 지적한 것처럼 교회가 특별히 새 신자들도 계속적으로 말씀으로 먹여야 한다. 지금까지 맥가브란의 좋은 점을 몇 가지 말했으나 맥가브란의 결론적인 교회성장이란 아이디어에 대해 아직껏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동의하는 점들은 교회성장의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했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본론의 주위를 맴돌았지만 지금부터 ‘교회성장’ 의 주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맥가브란이 이상한 의견을 말했다.

 

그의 교회성장에 대한 견해는 여러 교파 즉 침례교, 칼비니스트, 순복음 등에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비판에 대한 대답으로 교회성장에 관한 원리들은 다 성격적이고 신학적인 것이므로 교파마다 이 원리들에다 자기들의 교리를 알맞게 첨가해야 한다고 맥가브란은 말했다. 교회가 이 작업을 잘 하는데 따라서 교회가 성장하지 못하고 좌우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 의견을 이상하다고 하는 이유는 어떠한 사실이 옳은 지 잘못된 것인지는 그것의 성공여부에 따라 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된 생각이 큰 성공을 거둘 수도 있고 옳은 생각이 아주 작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 교회성장의 생각이 옳은 지의 여부는 그 학설에 따른 실제적인 성공의 문제가 아니라 그 학설이 성격적인가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교회성장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성경 신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교의학적인 측면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 세 가지 측면 인간론 신론 교회론 에서 이 학설이 성격적인지 연구하고자 한다.

 

맥가브란은 인간론에서 특별한 용어를 많이 쓴다. findable people - 찾아질 수 있는 사람, winable people 얻을 수 있는 사람, receptable people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등이다. 맥가브란은 이 용어들을 쓰면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가 말했던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findable people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이 계속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고 싶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들의 큰 무리들이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기쁘게 받도록 그들의 생활을 인도하신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그들을 찾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한다. 이렇게 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findable people이므로 그들을 믿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나아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많은 findable people들을 버리는 것이 되고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음을 받도록 일하였는데 우리는 그들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찾아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어떤 때는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 믿게 되는 사실을 볼 수 있지만 이 사실이 findable people이라는 말을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직 성경만이 인간이 복음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느냐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인간에 대해 말하는가? 구약에 나온 인간에 대한 가르침을 힘들여 모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이 같은 힘든 작업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로마서 3장 10 - 18절까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는 이 사실은 신약시대에 와서 즉 복음을 모든 족속들에게 전도해야 할 이 시대에서는 바뀌게 되었는가 아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계시도 인용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권위로 말할 때에도 신약시대에 관하여 비슷하게 쓰고 있다. 에베소서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을 때에 그들은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이라고 썼다. 엡 2장 3절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보관상 신도의 자녀였거니...” 전에는 즉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들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는 말을 쓰고 있다. 엡 2장 1절, 5절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외친다고 하더라도 죽은 사람들은 능력이 없으며 그들은 findable people, receptable people이라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나오는 원리적인 인간의 계시를 도외시했던 것이다. 그

 

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도록 그들을 준비하시지 않았는가? 맥가브란은 하나님이 햇빛과 비를 주심과, 하나님의 보호와 성령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과 하나님의 모든 사람들을 준비하시지 않았는가. 물론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햇빛과 비를 주시고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비친다는 것을 성경이 분명히 밝혀 주었지만 이 하나님의 주신 선물과 섭리가 복음을 받기 위한 준비라는 사실을 성경 어느 곳에서도 말하지 않는다. 도리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18절에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타락을 인하여 진지를 막는 사람들이 되었던 사실을 썼다. 하나님께서 자기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그의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서 분명히 보여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나 그들은 로마서 1장 20절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을 거절한다.

 

그래서 복을 전할 때 바로 이런 사람만을 만날 것이다. 그들은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뿐만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하나님을 이미 거절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어떻게 findable people을 만나리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은 성격적인 기준이 없는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도할 때에 복음을 받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리라는 사실을 성경 아무 곳에서도 약속하시지 않았다. findable people 아니라 하나님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것이다.

 

둘째로 신론에 대해서 생각해보라.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심을 고백한다. 이것은 모든 시대를 통틀어 교회의 고백이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은 우리 신자의 생활에 매우 중요한 것이고 사실은 또한 전도하는 일에도 지극히 중요하다. 그런데 맥가브란은 이 근본적인 고백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전능하신 신이라는 것은 물론 「교회성장학」이라는 책에서 참을 수 있다.

 

맥가브란은 이렇게 쓴다. “자그마한 교회성장만이 계속되어진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결코 얻지 못한다. 만약 선교회와 교회들이 작은 성장에 만족하여 계속적으로 나아간다면 천국잔치는, 하나님의 준비는 허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인용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에 대한 맥가브란의 광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것은 전도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분이시고 우리 인간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일을 해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준비하시지만 우리가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준비하신 것이 실패할 것이라는 말이 된다. 맥가브란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도하는 사람들에게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분으로 나타난다. 이런 생각은 다른 곳에 나오는 그의 예를 통해서 지지할 수 있다. 그는 어떤 불타는 집에서 자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만약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을 억지로 밖으로 나가게 할 수 있는가 물어본다. 물론 그 사람이 말하는 집에서 그대로 있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머무를 수도 있지만 또한 우리는 그 사람을 설득해서 밖으로 나가게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처럼 우리 신자들은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도록 애쓰고 노력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렇지만 이 예화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맥가브란이 순 예화로 말하지만 그들이 이 집이 불타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하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받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강요해서 믿는 자가 되도록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역이 우리의 설득하는데 달려 있는 것에 불과하다면 아무도 크리스찬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성경이 분명하게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3장 5절 이하에 사도 바울이 이렇게 썼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요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 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역을 이렇게 구별하였다. 즉 인간 아볼로나 바울은 심고 물을 주는 사람이나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우리들이 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준비하고 하나님께서 자기 뜻대로 사람들을 믿게 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실이 사도행전13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라는 도시에서 복음을 전할 때 14절에 루디아라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 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또 하나님을 믿게 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결국 맥가브란은 인간의 마음을 여는 성령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다시 사도행전 13장 48절을 생각해 보자. 영상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거라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영생을 받도록 작정하셨고 복음을 받게 하시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이 복음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셨을 때 그 사람이.

 

우리 신자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준비하셨을 때 틀림없이 어떤 신자로 하여금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끝내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맥가브란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을 의지하고 계신 분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신자들을 의지하시고 늘 필요로 하시고 또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서 불신자들 자신의 동의가 필요하신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의 질문은 이런 것이 된다. 어떻게 맥가브란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이 근본적인 기독교인의 고백을 지속할 수

있겠는가이다.

 

셋째로 교회들을 살펴보자.

맥가브란은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을 찾을 수는 없다. 맥가브란은 그의 책제목을 「Understanding Church Growett」라고 했지만 교회 성장학이란 책에서 교회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면 맥가브란은 무엇을 교회라고 부르는 것인가 이 문제는 쉽게 대답될 수 있다. 자기들 스스로가 교회라고 부르는 모든 교회로 맥가브란은 교회라고 불렀다. 그는 주로 신교에 대해서 언급했으며 그 교파들을 구분하지는 않았다. 교회가 자유주의이거나 또는 정통교회이든지 간에 어느 교회든지 성장해야 한다. 어떤 교회든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저는 맥가브란이 교회들에 아무 구별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나의 이 신고는 완전히 옳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맥가브란은 교회 사이에 어떤 구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3국가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는 사람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애쓰는 구원받은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애를 쓰지 않는 어떤 교회라는 것은 어떤 종교적인 당해는 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은 될 수 없다.” 라고 했다. 그래서 맥가브란의 생각에 의하면 교회의 특징이 하나밖에 없다. 즉 복음을 전하는 행동만이 교회의 특징인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계시를 전하지 않고 다른 복음을 전할 때에도 맥가브란은 교회라는 말을 썼다.

 

하지만 성경에 대해 에베소서를 예로 들어보라. 엡 2장 20~21절에 보면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라고 썼다. 이 성경 본문의 주제는 교회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교회성장에 대해 말한다. 21절에 나오는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라는 말은 헬라어로서는 ‘주안에서 성전으로 성장하는’ 뜻이다. 이 성장해 나가는 교회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27절에 보면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돌이 된 것이다. 교회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다 받아야 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우리의 구주와 왕으로 받아야만 한다. 그렇게 해야만 교회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교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받지 않는 교회가 많다는 것을 안다. 이런 교회가 성장할 때, 이것이 교회성장이라 쉽게 말할 수 있으며 이런 교회 성장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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