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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10. 7. 30.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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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1)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rvkim@yahoo.com

오늘부터 갈라디아서를 같이 공부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중요합니다. 성경 66권이 모두 중요하지만 특히 갈라디아서가 중요한 이유는 갈라디아서 는 율법과 은혜의 관계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는데 요즘 기독교 교계에서는 율법과 은혜에 대한 바르지 못한 신학사상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오늘부터 몇 주간 갈라디아서를 같이 공부하고 저 합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13개 편지중 하나인데 그 논조가 로마인서처럼  논문형식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책마다 각각 문학 형태 즉 genre 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 같은 책은 일어난 일을 그대로 서술한 역사책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다루고 있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즉 예수님의 신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설명한 책들이고 일반서신들은 이를 성도의 생활에 실제로 적용하는 내용입니다. 계시록은 장차 세상 종말에 있을 일, 하늘에서 이루어질 일들을 부활하신 주님이 사도 요한에게 계시하여 주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계시록은 게시록 대로 독특한 묵시문학 (apocalyptic literature) 의
genre 에 속합니다.

성경의 다른 부분을 읽다가 갈라디아서를 읽으면 그 문체가 논쟁 조 임 (polemic) 을 알게 될 것입니다. 로마인서와 같습니다.  로마인서도 역시 논쟁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어떤 사람을 옆에 세워두고 논쟁 하는듯한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장르는 논문 형식인 것입니다.  장르에 따라서 그 장르에 맞게 해석해야 합니다. 시편은 시편 읽는 법이 있고 (Tremper Longman, III. How to Read Psalms 참고). 산문(散文, prose)은 산문 읽는 방법이 있으며 산문 중에도 역사 사건을 그대로 기록한 사도행전과 사태가 시급하여 중요한 교리를 논쟁조로 기록한 갈라디아 같은 성경은 각각 그 나름대로 읽어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냥 소설 읽듯, 처음에서부터 읽어나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소설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소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계시해 주신 특별계시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죄인을 구원하는 구원의 멧세지 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을 읽을 때 지금 읽고 있는 성경구절의 의미를 음미하면서 읽을 것입니다.  지금 읽고 있는 부분이 어떤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배경 속에서 기록되었는가를 알아야 하고 원문으로 성경을 읽을 경우 그 성경구절의 문법적인 구조를 알아야 합니다. 신학생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코피(coffee)를 마시면서 코피를 흘리면서 그 어려운 성경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공부하는 이유가 바로 성경의 뜻을 바로 알기위해서입니다. 성경 원어는 신학생이나 목사의 전용물이 아닙니다. 일반 성도도 공부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장로들중에서 헬라어에 능한 분들을 몇 알고 있고 이들이 저의 사역에 많은 격려를 보내 옵니다.

공부할 때는 어려워도 공부해 두면 나중에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필자가 신학생이던 시절
성경원어 교수는 구약히브리어의 Dillard 교수, 신약 헬라어의 Gaffin (은사론 책을 쓴) 교수였는데 한 주에 월, 수, 금 각각 한 시간씩 일주에 세 시간 공부하는 과정에서 매 시간 5분간씩 quiz (간단한 테스트) 를 했습니다. 그래서 방과 후 공장에 나가서 학비를 벌기 위해서 일을 하면서도 헬라어, 히브리어 단어를 부지런히 외우고 문법을 외운 것이 지금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그저 그 교수님들에게 감사 또 감사할 뿐입니다. 좋은 교수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공부 했더라면 지금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 뻔합니다. 필자가 공부하던 시절 이와 같이 “지독한” 원어 훈련 때문에 학교를 그만 두고 프린스톤 신학교로 전학 간 학생들이 몇 사람 있었고 어떤 학생은 아예 신학 공부를
접은 사람도 있습니다.  신학은 천 난관인 언어부터 배워야 합니다.  물론 신학을 깊이 연구하려면 독일어, 화란어, 불어등이 도움을 주지요 그래서 대학원 (Th.M  과정 이상) 은
제2외국어 시험을 필수로 통과해야 합니다.  신학자들이 외국어를 많이 아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기록된 연대를 측정하는데는 두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Northern Theory  (북 갈라디아 학설) 을 주장하는 분들은 전통적으로 기원 54년에서 56년으로 바울의 제3차 전도여행 중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들은 고린도전서와 로마서가 기록될 중간 다리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폅니다. 제3차 전도여행 중이므로 상당히 기록연대를 늦게 잡습니다.  

그러나 Southern Theory (남 갈라디아 학설) 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남 갈라디아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주로 영국의 학자들인데  갈라디아 2:1-10에 나오는 내용과 사도행전 11:29-30 에 나오는 내용이 같다고 봅니다.  가라디아 2:1-10에 보면,

       “14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 갔노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 하는 것이나
       달음질 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에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레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나도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갈 2:1-10).

이 말과 사도해전 구절을 비교해 봅시다. 사도행전 11:29-30에는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의 배경과 갈라디아 2:1-10 말씀의 배경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전의 일이며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바울이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다른 사도들을 만나서 이방인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영입하는 조건을 논의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사도회의 에 관한 기록이 갈라디아서에 빠져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남갈라디아 학설을 주장하는
분들은 말합니다.  제1차 전도여행 전이니 기록연대를 45-46년경으로 잡는 것입니다.  이 학설에 의하면 갈라디아서가 고린도전서가 기록되고 난 다음 로마인서를 기록하기 전에 기록했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베드로가 아디옥에서 만난 사건은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있기 전에  발생했다는 말이 되어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남 갈라디아 학설> 에 의거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이 사건 순서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미 안디옥에서 이방인 선교에 사역하다가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 46년에 구제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 이방인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영입하는 조건을 논의하게 되었고, 사도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라고 바울에게 부탁했으며 바울은 갈 2:10에 보면, 이미 그런 빈궁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사역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계속 이방인 선교에 힘을 썼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왔을 때 베드로는 이방인도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교제할 수 있는 것을 알고 이방인과 같이 먹기도 했지만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주의자들이 올라오니  베드로는 곧 물러나 자리를 피했는데 바울은 회중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전도여행에 떠났는데 이들의 사명은 “이방인” 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에서 온 그리스도인들은 한편으로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같은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미 바울의 전도로 회심한 성도들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고 있으므로 바울이 급히 갈라디아 지방에 있는 모든 교회들에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이므로 그 일자가 기원 45-6년 경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에 보냈고 <예루살렘 사도회의> 가 열리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남 갈라디아 학설>을 따라 전에 언급한대로 기원 45-6에 기록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론이라고 보아 집니다.

<유대교주의자> 이 바울을 대적하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사도행전 17:5-7을 보면 이방인들이 모여 사는 곳에 있던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사도직”을 인정치 않았습니다  이유는 사도는 예수님이 살아 계실 동안 주님으로부터 배운 사람들인데 바울은 주님이 살아계실 동안에 주님과  만난 일이 없고 오히려 주를 믿는 성도를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올라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으므로 사도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참 구원을 얻으려면 이방인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도 받고, 월삭도 지키고, 음식도 가려서 먹어야하고 안식일도 토요일에 지켜야 한다> 고 가르쳤는데 바울은 그런 것들이 필요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자연히 둘은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통적인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through faith, sola fide), 하나님의 은혜로 (by grace, sola gratia),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solus Christus)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통일 운동>이나 소위 종교다원주의 pluralism" 은 성경에 위배되며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흔히 ”하나 되자“ 라고 떠들지만 공통분모가 같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즉 신앙이 성경적으로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WCC (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 협의회) 는 이런 원칙을 무시하기 때문에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으니 기독교만 고집하지 말고 서로 평화를 이루자는 사람들은 극히
비성경적인 적그리스도들입니다. 행 4:12 이나 요 14:6에는 그리스도만이 구세주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사람들의 가르침에 속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것인데 어찌하여 <유대교주의자들,Judaizers)> 은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봅시다.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크게 4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아집니다.
  1. 바울 자신의 사도직 변론
  2. 은혜의 복음에 관하여
  3. 믿음으로 칭의 (稱義 dikaosune, justification) 를 얻음
  4. 은혜와 믿음의 열매에 관하여

이렇게 크게 네 가지로 갈라디아서의  가르침을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바울 자신의 사도직 변론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강조하며, <참복>의 성질, 복음을 전할 권세와 복음을 수호할 권세가 있음을 초두에 강하게 변론하고 있습니다.  

2. 은혜의 복음에 관하여
   기독교의 가장 근본 교리는 오직 은혜, sola gratia. 즉, 구원의 은혜입니다 .  은혜로 구원을 얻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어찌하여 다시 율법에 매이겠는가?  (1:6; 3:3, 5:4 등).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며, 율법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데,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어떤 의식 행위나 예식 선행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만일 이런 선행이나 공로나 의식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었고 이런 것들은 은혜를 헛되게 할 뿐입니다.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외에 달리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다른 길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은혜를 말하지 않는 구원관은 십자가를 부인하는 결과가 될 뿐이므로 속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선행을 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더러운 걸레조각” 처럼 보인다고 이사야 64:6에 말씀 하십니다.

3.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음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편의 유일한 방도는 믿음 이지요 (갈 2:16; 3:24). 그래서 종교개혁가들은 sola fide (오직 믿음) 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믿음을 통해서” 이 두 가지는 구원의 핵심 교리로서 불가분리입니다.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있어야 할 구원의 요소 (integral elements) 가 됩니다.

4. 은혜와 믿음의 열매에 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는 말은 거짓 구원의 확신을 갖는 착각이나 또 방탕하여 절제 없는 생활을 해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5:1).  성도의 구원은 은혜에서 출발합니다. 율법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며 은혜의 열매는 곧 “성령 안에 사는 사람” 의 열매인 것입니다 (5:22). 갈라디아 5장 19절 이하에 “육에 속한 사람”의 생활과 22절 이하에 “영에 속한 사람” 의 생활이 적혀 있음을 봅니다. 현저한 차이가 있지요. 육에 속한 사람은 썩을 육의 일만 생각하고 영에 속한 사람은 영의 일을 도모하여 영생에 이릅니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인서와 같이 가장 변증적이며 가장 복음의 성질을 잘 나타내주는 책입니다. 갈라디아 지방에 유대교주의자들이 침투하여 갈라디아지방의 교인들을 유혹했는데 그 내용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고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 사도란 예수님 살아계실 동안 그와 동행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바울은 예수님이 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주님을 따라다니기는커녕 오히려 주를 믿는 자들을 박해했던 사람이었지요.

대제사장의 명령을 받고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서 길을 떠났던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니 어찌 그가 예수님의 사도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것이 저들 <유대교주의자들> 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은 바울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예fp미야 시절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예레미야의 말을 믿지 말고 자기들의 말을 믿으라고 육박 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오늘도 많은 거짓 부흥사들은 정통 목사가 가르친 것을 거짓이라고 육박지르며 거짓 복음을 도입하고 있는 것이 사살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지지만 역시 유대교의 의식대로 따라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었습니다. 마치 오늘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흡사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사람의 공로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이 저들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공로를 구원에 가산하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 복음 (false Gospel)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의 가르침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바울에게 전해지면서 그는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들 유대교주의자들에게 속지 말라고 경고하는 가운데 우선 그가 정말 그리스도의 사도된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초두에 “사람으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라고  갈라디아서 초두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기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직을 받은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에 바울의 말은 자기도 다른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신약 27권중 바울의 편지는 13개이므로, 거의 절반이 바울의 서신들이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혹자는 바울의 신학과 에수님의 가르침이 다르다고 하는 분이 있지만 그것은 거짓 말입니다. 바울은 주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아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
사도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에 속지 마십시오.

신약성경의 구성을 보면, 첫 복음 3개는 공관복음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했는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공관복음의 내용을 믿을 수 없다는 비평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령 독일 신학자 Rudolf Bultmann 같은 이는 공관복음에 나오는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도 있고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도 있는데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이 복음서에 기록된 것은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를 미화하기위하여 “일부러 꾸며낸 이야기” 라고 억지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Bultmann 에 의하면 실제로 일어난 일과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내용을 서로 분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소위 <비신화화 Demythologization> 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Bultmann 이 쓴 신약개론 이란 책을 보면 복음서에 나오는 이적 기사는 모두 신화 (myth) 이며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단정 합니다.  

Bultmann 의  “비신화화 작업” 을 거치면, 공관복음에 남을 부분은 아무 것도 없게 되지요.  또 요즘은 프린스톤 대학과 프린스톤 신학에서 종교학을 가르친다는 Elaine Pagels 라는 여교수가 등장하여 1987년에 센세이숸을 이르킨 문제작 The Gnostic Gospel 이란 책을 썼는데 그녀에 따르면,  공관복음은 원래가 <여성위주> 로 기록되었었는데 중도에 누군가가 <남성위주> 로 변개해 놓았기 때문에 다시 여성위주로 원상복구하기 위해서 바꾸어 놓아야 하는데 그 표준은 기원 1세기에 기록된 문서로 그간  잠적했다가 1945년에 애급의 Nag Hamadi에서 발견된 소위 <도마복음 Gospel according to Thomas>을 근거로 공관복음을 여성위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Nag Hamadi 라는 마을에서 발견된 13개의 두루마리 (scrolls) 중에 도마복음이 들어 있는데 이는 영지주의 복음서로 믿을 바가 못됩니다.

그럼 도마복음은 어떤 것인가?  성도 여러분은 <도마 복음>이니, <베드로복음>이니, <막달라 마리아 복음> 등에 관하여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외경으로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경에 들어있지 않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2 참고) 기원 1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동안은 이런 사이비 문서들이 많이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녀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영이 하나님에게 속했나 시험하여 보라 (요일 4:1)“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가 부르짖는 여러 가지 이단적인 가르침 중에서도 가장 성경에 어긋나는 것이 <영은 선하고 물질은 모두 악하다> 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따르면 <예수님은 영이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시니 물질인 몸을 입고 오실 수 없다> 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므로 결국 예수님이 성육신 교리를 부인합니다. 무서운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요일 4:2에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믿는 자 마다 하나님께로 난 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영지주의의 특색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아담은 바보였고,
하와와 뱀은 슬기로웠다는 가르침인데 그래서 영지주의는 여자를 숭상합니다. 오늘 팽배하는 소위 <여권신장운동> 이나 <금욕주의,“ ”입신 및 직통계시“ 등은 모두 이 마지막 때에 부활하고 있는 영지주의 의 소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성령을 어느 특정한 사람들만 받는 줄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무리들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모두가 받는 것이며 ”누구든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라 할 자가 없다“ 고 고전 12:3에 가르쳐 주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벌써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롬 8:9 참고).

요한복음은 <제4 복음서, The Fourth Gospel> 라고 하여 공관복음과 내용이 다른데 여기서는 예수님의 생애보다는 주님이 신성(神性)을 지닌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각시킵니다.  여기 요한복음서에 있어서도 비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Leon Morris. John's Gospel 참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예수님은 원래가 신성을 지니고 계신 하나님 즉,  성상위의 제이위이십니다. 그 신성에 인성을 덧입으신 분입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은 다른 복음에 흔한 예수님의 비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본 성도님들은  곧 요한복음에는 누가복음에서 흔히 보는 비유들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를 구하려 오신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를 믿으므로 영생을 얻다는 교리를 가르치려 하는 것이 요한복음의 목적입니다.

사도행전은 신약교회의 탄생, 복음이 유대인에게서 시작되어 이방으로, 전 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을 말하는데 처음에 유대인에게 복음이 전파되며 (예루살렘), 그 다음은 사마리아 인에게 (사도행전 8장), 그 다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행 10의 고넬료)에게 그리고 이방인 에게 (엡 19장) 에게 펴져 나가는 과정을 말하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로마에 압송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고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사도행전은 “유로구라 광풍”을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 1990년 뉴욕 신학생들과 함께 <수학 여행>차 풍랑이 일어나는 가이사라 항구에 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필자가 느낀 것은 <유로굴라 광풍>의 위력이 어떠했을까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1990년 2월말 그때의 가이사라 항구의 파도는 가히 유로글라를 상상할 수 있으리만큼 파고가 높았습니다.

다음 로마인서에서 빌레몬서 까지는 바울의 열 세 개의 편지가 이어지는데 이 13개의 편지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바를 정리한 교리입니다.  로마인서에서 복음의 성격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도록 하십시오. 로마인서는 1-11장은 복음의 교리를 설명하는 한편  12-16장은 성도의 실천생활을 가르쳐 줍니다. 고린도 전후서에서는 고린도교회의 잘못된 교리들을 바울이 바로 잡아주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정립해 주는데 그런 연고로 고린도교회의 잘 못된 교리들은 본받을 것이 못됩니다. 고린도후서는  고린도전서를 기록한 바울이 그 이후 고린도교인들의 신앙이 바로 잡혔는지 점검하는 내용으로 흔히 바울의 자서전 이라고 함니다.  갈라디아서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지는 것이며 의식이나 행위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면서 속지 말라고 경고하고, 에베소서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골로새서는 반대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 란 각도에서 교회를 설명합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교훈이고 목회서신인 딤전 딤후 디도는 목회자들에게 바울이 권하는 참 목회자상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옥중 서신인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바울이 로마 옥중에서 기록했다하여 옥중서신 이라고 불립니다.  빌립보서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기뻐하고 주님에게 의지하고 소망가운데 살아가기를 권면하고 있고, 빌레몬서는 빌레몬 집에서 노예로 있다가 실수한 연고로 해고당한 오네시므로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는 형제같이 그를 받아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 후에 나오는 일반서신 8개는 공관복음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바를 바울이 설명하여 바른 교리를 세운 것을 성도들이 실생활에 실제로 적용하는 내용이며, 히브리서부터 시작하여 유다서까지 8권을 말하는데 히브리서는 언약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구약의 의식법보다, 모세보다, 아론보다도 천사보다도 낫다는 것을 말하면서 구약의 의식법과 언약이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책으로 구약과 신약의 다리를 놓아 주는 성경입니다.

야고보서를 한 때 루터는 <초개서 straw epistle> 라고 하여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가 나중에 인정했지만 그가 그렇게 처음에 주저한 이유는 야고보서에는 행함을 많이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을 향하여는 하나님이 우리의 속마음을 아시지요.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아시지만, 한편 대인관계에서는 어떻게 믿음을 님에게 증명할 것인가요?  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 그 믿음이 증명되는 것일까? 아니지요. 왜냐 하면 세상에는  입으로만 예수를 형식적으로 고백하고 실제로는 회개도 회심도 없는 유기자들 (reprobates) 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구원이 없음은 당연하지요.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Professing Christian 들 중에는 구원을 얻은 자도 있고 얻지 못한 자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입으로 시인한다고 모두 구원을 얻은 자는 아니지요. 롬 10:15-16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고 가르쳐 줍니다.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다음에 나오는 요한서신 3개는 영지주의를 경계하는 내용이고 베드로 전후서는 가장 로마의 핍박이 심할 때 성도들이 믿음을 지켜 나갈 방도를 가르쳐 주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인내와 소망을 주는 성경 입니다. 유다서는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들을 경계하는 내용이고 계시록은 장차 종말에 일어날 일과 하늘나라에서 되어 질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게시록의 요절은 바로 17:14 할 절입니다. 이 한 절을 전개해 나간 것이 계시록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의 싸움을 묘사한 것이 계시록입니다. 성도는 지금 패배하는 것 같으나 나중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계 11장을 읽어보세요.  두 증은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신약성경의 맥락에서 생각해야하는데 그 구성을 보면

1장에서는 사도바울의 사도직의 입증과 복음의 성격을 말하고 이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진리의 말씀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2장에서는 복음의 권위를 입증하고, 율법이냐 혹은 그리스도냐? 란 명제를 놓고 바울이 은혜의 성격을 바로 가르쳐 주며,

3장은 율법의 성격을 말하면서 율법의 목적을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4장은 사라와 하갈의 예를 비유로 들어 율법과 은혜의 성격을 설명합니다..

5장은 믿음의 자유, 자유를 바로 행사하기, 영육간의 싸움 등에 관하여 말합니다.

6장은 성도의 윤리관 및 심기와 거두기 (sowing and reaping) 비유를 설명하고 결론을 맺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갈라디아 1장부터 차례로 자세히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1 끝-
http://tulipministries.com/bbs/view.php?id=theolog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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