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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3)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10. 7. 30.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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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3)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rvkim@yahoo.com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 그 세 번째 시간으로 갈라디아서 2장을 같이 공부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연구할 수 있는데

I.  1-10  복음은 하나뿐이다.
II. 11-21  교리와 행위의 일치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도독 합시다.
갈라디아서는 전체를 통하여 율법과 은혜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로마서와 함께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책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이 안디옥을 중심으로 3차 전도여행을 마친 후 로마에 가서 로마를 중심으로 스페인까지 선교하려 할 때 바울은 우선 로마의 교인들에게  기독교의 구원의 교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로마인서 1장에서 11장 까지를 기록한 사실을 상기하면 교리를 바로 가르치는 것은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기독교의 교리 즉 구원의 도리를 가르친 후, 로마인서 12장부터 16장 까지 에서는 앞서 11장까지에서 설명한 기독교의 교리에 입각한 성도의 실천생활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즘의 특징은 교회마다 교리를 등한히 한다는 것입니다.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교회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간혹 몇몇 교회가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지요만 그 수는 적습니다. 성경책을 끼고 30년을 교회에 출석해도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모르는 이유는 교회에서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는 믿는 도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어느 종교에나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믿는 대상, 믿는 내용 (교리), 믿는 법, 믿는 목적 등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는 아주 별개의 유일한 참 종교임에도 일반 교인들은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교리를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필자가 필라델피아에서 목회할 때 한 목자님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성경공부시간에 가르쳤더니 지루하다고 하며 다른 재미 잇는 성경공부를 하자” 고 하더라고 하면서 탄식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바른 교리를 모르면 믿은 도리를 모를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이단에 빠집니다.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교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우리가 믿어야할 내용입니다. Barth 가 말하는 것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1919년 발간한 그의 책 <로마인서 주석> 책에서 “Die Bibel enthaltet das Wort des Gottes” 즉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있다” 고 했습니다.  Barth 의 말대로라면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 도 들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과연 Barth 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고 계시에 대한 증거” 라는 말을 합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영감은 믿지만 성경의 무소설은 믿지 않습니다. 모두
교리에 충실하지 않는 소치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교리는 필요 없으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믿기만 하라“ 라고 성도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한편, 요새  Tony Jones, Doug Paggit, Brian McLaren, Donald Neal Walsh 같은 사람들이 주창하는 소위 Emergent Church Movement (에머징 교회 운동) 에서는 “교리를 공부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지금은 교리를 공부하지 말고 실천생활에 전념해야 한다. 교리공부를 하다 보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싸우게 되고 서로 반목하고 교회가 분렬된다“ 라는 회괴한 주장을 폅니다. 문제는 교리 (성경내용) 을 모르고 어떻게 실천생활을 바로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입니다. 요즘 한창 독버섯 처럼 창궐하는 ”에머징 교회 운동가“ 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며 세상은 점점 좋아지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닥아오는 미래는 유토피아 (Utopia)가 온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더 살기 좋은 ”이상향“ 이 도래한다고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단적 집단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Hegel의 변증법을 본 받아 ”희망신학“을 주창한 Moltmann 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탓입니다.

   갈라디아서 전체가 율법과 은혜를 다루면서 기독교의 교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갈라디아 2장 16절 말씀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의롭다함은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란 말씀은 우리 모두가 외워야 할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입니다. 또한 이어서 가라디아 2:20은 참으로 멋진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스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가요?  아마 여러분께서는 이 성경구절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여러 번 들으신 줄입니다.

그럼 이제 첫째 부분인 갈라디아 2:1-10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복음은 하나뿐이라는 내용인데 여기서 무엇을 공부할 수 있는지 보도록 합시다.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인데 기록한 분들이 여럿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합하여 성경을 기록한  분들은 모두 45명이 1,500년간에 걸쳐서 기록했지만 인간 면에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모두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메시야를 다루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들 성경기록자들은 모두 시대가 다릅니다. 모세는 기원전 1500년 전 사람입니다. 다윗은 기원전 900년 경 사람이고 이사야는 기원전 700년, 예례미야는 기원전 600년 전 사람, 다니엘은 기원전 500년대 사람입니다. 성경도, 학식도, 성격도, 취미도 모두 서로 다릅니다. 직업도 다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성경기록자들은 하나같이 메시야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면에서 볼 때는 믿을 수 없는 기척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간중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특별한 섭리로 역사하여 이들 많은 성경기록자를 택하시고 이들에게<유기적 영감> (organic inspiration) 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영감은 유기적 영감입니다. 기계적 영감이 아닙니다. 기계적 영감이 옳다고 생각하면 성경기록자들의 다른 문체(style) 을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성경기록자들에게 마치 학교에서 선생이 학생들에게 강의내용을 불러주고 학생들은 그것을 받아 적듯 그렇게 성경이 기록되었다면 성경의 각권마다 독특한 문체의 차이 (idiosyncrasy)를 설명할 도리가 없게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성경기록자들을 택하여 계시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들의 성격, 학식, 교육, 취미 등을 모두 살리시면서 죄성 만 없이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역사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기계적 영감설" 에 반하여 “유기적 영감설” 이라 하고 영어로는 “organic inspiration" 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적 영감설은 언제나 ”유기적 영감설“입니다.  기계적 영감설 (mechanic inspiration) 이 맞는다고 가정하면 구약성경의 경우 문체가 쉬운 에스더서와 문체가 상당히 어려운 이사야서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또 신약의 경우, 요한복음은 문체가 다른 복음서에 비해서 쉽습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어렵습니다.  기계적 영감설이 맞다면 모든 성경의 문체가 모두 왜 동일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Nigel Turner 는 James Mouton 의 Trilogy 인 "Greek New Testament Grammar"의 제3권 "Syntax of Greek New Testament" (Edinburgh: T.&T.Clark, 1920)을 쓰면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James Hope Mouton 은 Adolf Deissmann 을 이어 신약 헬라어를 전문으로 연구한 영국 Manchester University 의 교수로 그의 trilogy (3권으로 된 한 질) 쓰다가 제1차 대전중 1917년 4월 지중해에서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고 제2권은 그의 Manchester University 의 제자였던 Wilbur F. Howard 가 끝내고 제3권은 Nigel Turner 가 완성했습니다. 이 세권의 책은 A.T.Robertson 의 "A Greek Grammar of the New Testament in the Light of Historical Research" (Nashville, Tenn.: Broadman, 1920, 1980pp.) 과 함께 신약 헬라어 연구의 sine qua non (필요불가결한) 명저입니다.

   신약 성경에 있어서도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복응이 다르고 바울의 복음이 다르다고 하는 분들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가자에서 대속의 죽음을 위해서 오신 분이고 죽은 지 사흘 만에 죽은가 가운데서 살아나시고 40일간 이 땅에 계시다가 승천하시어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는 우리가 모두 주일마다 사도신경으로 외우는 진리입니다. 바울의 신학이 이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신학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3-4에 보면 바울이 복음을 가장 간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과 바울의 복음이 다른 것이 없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의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이방인의 선교사로 일생을 보냈고 베드로는 “할례” 즉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으니 그는 유대인의 선교사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두 기둥이 있었는데 바로 이방인의 선교사 바울과 유대인의 선교사 베드로입니다. 이 두 사람의 신학이 서로 다르고 이 두 사람의 신학이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참 신앙에는 복음이 여럿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뿐입니다. 그는 로고스 (말씀) 자체 이십니다.  사람들은 성경 각권의 문체가 다르다고 해서 복음이 여러 가지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문체가 다른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실 때에 성경저자 각자의 성격이나 학식을 철폐하지 않고 살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경을 기록하도록 역사했기 때문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사도들의 복음과 예수님의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또 Princeton 대학교 종교학 교수인 Elaine Pagels 가 그의 책 “Gnostic Gospels” 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사 복음서는 원래가  여성위주로 기록된 것이었는데 중도에서 누군가가 남성위주의 복음으로 대체했기 때문에 다시 여성위주의 복음으로 다시 원상복구해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것은 크게 잘 못입니다. 그가 주장하는 “도마 복음” 은 초대교회에 나온 영지주의 문서로서 정경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또 Albert Schweitzer 가 그의 저서 “Quest of Historical Jesus” (역사 예수 탐구) 라는 책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적도 행했고 죽은 자도 살리셨고 병자도 살리셨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렸지만 그가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않게 되자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다는 주창은 터무니없는 자유주의 신학의 허구의 전형적인 예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Bultmann 이 말하는 것처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행적은 실제 그대로 행해 진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으니 옥석을 가리듯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과 실체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제자들이 주님을 미화하기 위하여 일어난 것으로 거짓 기록한 것은 서로 구분해야 한다” 는 소위 “비신화화작업” 이것을 영어로는 demythologization 이라고 하는데  이런 사상은 모두 아무 근거 없는 학설로 성경을 헐뜯기 위한 자유주의자들의 허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대적할 분별력 (discernment) 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은 너무도 속임수가 많아서 눈을 바로 뜨지 않으면 속임을 당하여 영혼이 파괴됩니다.  “거짓 복음” 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주님이 늘 “사람의 미혹을 주의하라” 고 경고 하신 일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이런 무리들은 도처에서 교인들을 진리를 믿지 못하도록
유인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의 저자 마다 강조하는 면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기록자들은 각각 자기들이 보는 관점 (perspective)이 다르고 강조하는 점이 다릅니다. 가령 마태복음을 읽노라면 다른 복음과는 달리 구약에서의 인용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서에는 흔히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 란 구절이 마태 19:24 절 등 몇 구절 뿐으로 이런 표현 사용하기를 주저합니다. 대부분 “천국, he basileia ton ouranon” 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왜?  마태복음이 강조하는 점은 예수는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메시야 그 분이며 그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유대인의 왕 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부각시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태복음은 유대인들만 위해서 기록된 것은 아니고 유대인들을 안중에 두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하나님” 이란 말을 입에 담기를 몹시 황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 이라는 말 (elohim) 이 있건만, 대신 “아도나이”라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여호와를 부릅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성향을 아는 마태복음 기록자 유대인 마태는 그의 복음에서 “하나님” 이란 말을 가급적 피하고 “천국 he basileia ton ouranon" 이라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가복음은 로마사람들을 안중에 두고 거기에 초점을 맟추어 기록했습니다. 간결하면서도 다른 복음서에 있는 내용은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로마사람들에게도 알려진 “다리다 굼” “에바다” 같은 아람어 (Aramaic) 도 등장하고, <브라이도리온> 이라는 로마사람들의 언어인 Latin 도 등장합니다.  

   누가는 누가 자신이 헬라 사람이며 유대인이 아닙니다. 헬라 사람인 누가는 헬라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누가 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누가는 직업이 의사여서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유식한 사람답게 누가복음은 문체 (style)가 어렵습니다. 어렵다는 말은 문법적으로 hypertactic sentence 즉 복문(複文)이 많다는 말입니다.  문법적으로 말하면, 단문(單文)이 있고, 중문(重文)이 있고, 복문 (複文)이 있습니다.

   흔히 알기 쉽게 설명하면 “새가 날아 간다”라는 문장은 단문입니다. 하나의 독립한 문장입니다. 그러나 “새는 날아갔고 배가 떨어졌다“ 라고 하면 이것은 중문(重文 Compound Sentence)입니다. 대등접속사 (對等接續詞)로 연결된 두 개의 독립문장입니다. 그러나 "새가 날아갔기 때문에 배가 떨어졌다” 라고 한다면 이는 복문 (Complex Sentence 複文)입니다. 이유는 두 개의 문장이 종속접속사(從屬接續詞)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새가 날아 갔기 때문에“ 라는 절은 종속절이 되고 ”내가 떨어졌다“ 란 부분은 주절이 됩니다. 이 처럼 종속절(從屬節과 주절(主節)을 가지고 있는 문장을 복문이라고 하는데 누가복음은 이런 북문이 많은 것이 하나의 특징이고 또 하나의 특징은 사용된 단어가 문어체 (文語體literary style) 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언어는 <Koine Greek> 이라는 언어로 다른 말로는 <Hellenistic Greek>  이라고도 합니다. 기원 1세기 중동지방 시장에서 평민들이 사용하던 구어체 (口語體 colloquial Greek) 을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원어인 그리스어로  읽어보면 누가복음의 헬라어는 요한복음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인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  요한 계시록의 문체는 모두 쉽습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헬라어 기초를 공부한 학생은 <요한복음> 부터 원어로 읽어 가며 헬라어를 익히는 것이고 구약의 히브리어 기초를 공부한 학생은 <에스더>서를 연습 삼아 읽으면서 히브리어를 익힙니다.

   신약성경의 헬라어와 구약성경의 히브리어는 언어구조나 어족 (語族) 이 다릅니다. 전자는 인도유럽언어 (Indo-European language family) 이고 후자는 셈어족 (Semitic language family)입니다. 그러르모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헬라어나 프랑스어, 독일서, 스페인어, 포로토갈 어 이태리어, Latin 어가 쉬운 것입니다. 러시아어는 또 다른 어족인 Slavic Language Family 에 속합니다. 오래전 Holand의 언어학자 Zamenhof 박사가 세게의 언어를 통일해 보려고 <Esperanto>(에스페란토 어) 를 만들었으나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Latin 어는 “죽은 언어” 이지만 의학계 나 법조계 나 신학에서는 아직도 많이 사용됩니다. 신학의 조직신학 시간에는 Latin 어를 모르면 신학 술어의 뜻을 정확히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저자들이 강조하는 점이 다르다고 해서 이들이 전한 복음이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다르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체가 다르고 강조하는 점이 다르지만 내용은 즉 <복음의 멧세지>는 모두 동일한 apt세지로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말씀 바로 그 진리의 말씀> 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을 막론하고 모든 성경기록자들은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기록한 것이므로 하나님은 바로 진리 그 자체임으로 본질상 절대로 거짓을 말할 수 없고 거짓을 말하지 못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베드로후서 1:21 에는 “예언은 언제든지 사사로이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기록한 것이라” 고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사탄은 항상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고 다른 복음을 믿게 합니다. <다른 복음> 은 없습니다. 기독교에는 오직 하나의 복음, 즉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다른 종류의 복음이 홍수처럼 범남하는 이유는 “사탄이 바른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우리의 생각과 다음을 혼미하게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 입니다. 오늘은 과거 어느 때 보다 성경의 권위가 훼손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교회와 성직자들은 점점 핍박을 받아 그 수효가 줄어듭니다. 진리를 말하면 “인기” 가 없어 남에게 매도 당합니다. 무서운 배도의 세상입니다.

   본문에 돌아가서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교주의자들>은 바울의 복음은 베드로의 복음과도 다르고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도 다르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바울의 복음을 잘 못 이해한데서 온 오해입니다.  옛날 프리스톤 신학교에  독일과 영국으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이 침공할 때 프린스톤 신학교 신약학 교수였던 John Gresham Machen 박사는 <Origin of Paul's Religion> (바울 종교의 기원) 이라는 책을 써서 이와 같은 사상을 반박했습니다. 다른 여러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저자 마다 서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같은 하나의 복음을 전하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관점(觀點)과 강조하는 점이 다를 뿐, 복음은 같습니다.  오직 하나의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유대교 주의자들이 바울의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다르고 베드로가 전하는 복음과도 다르다고 힐난하는 이유는 사도들과 바울을 이간질 하려는 흉계에 기인합니다.  이런 핍박을 받는 바울은 그가 전하는 복음은 “남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고 특히 유대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다른 사도들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라” 는 것을 입중하기 위해서 본문에서 14년 만에 처음으로 한 번만 예루살렘에 올라갔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복음과 동일하다는 것을 입중하기 위하여 그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의 복음을 다른 사도들이 모두 인정했다 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할례를 받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내용이 훼손될 것을 우려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같은 생각은 올바른 생각입니다. 이것은 비단 바울만의 관심사가 아니라 우리 온 성도들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서로 눈감아 주며 은혜 스럽게 지내는 것이 피차에 유익하다‘ 는 말을 공공연히 합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오늘 기독교 교계가 혼탁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거짓과 타협할 수 없습니다.  거짓을 용납하던 소아세아의 교회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거짓과 이단을 참 교회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들과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일고 끝까지 싸워야 합니다.  이단을 용납하는 것이 주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자신을 하나님에게 드리기를 힘쓰라” 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딤 2:15에 엄하게 명령합니다.  이단적 사상을 용서하는 것은 “은혜” 가 아닙니다. 복음의 진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교계에서는 새로운 철학용어가 유행하는데 그것이 소위 <Rapprochement> (라프로쉬망) 입니다.  Rapprochement 은 프랑스 말입니다. 우리 말로 번역하자면, “상호 호혜주의”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의 진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남을 비판하지 말 것이며 내 진리나 상대방 진리나 진리는 여러 가지 이므로 서로 자기의 진리를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는 철학 사상인데 이런 사상이 요즘 교회에 파급되어 교회를 무서운 속도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절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성경은 이슬람교의 <코란경>이나 힌두교의 <Upanishad> 나 <Veda> 혹은 <Bhagavad Gita> 나 유교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모르몬교의 <모르몬경> 기독교의 <성경> 이나 모두  다를 바가 없이 동등한 권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사탄의 작간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앞서도 언급했듯이, 바울에게는 이방인이 할례를 받는 여부가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가 왜곡되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2:6-10을 읽어보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다른 사도들의 가르침과 상치(相馳)됩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수정했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부분은 잘못되었다고 삭제했습니까?  아닙니다. 다른 사도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액면 그대로 가감 없이 수정 없이 그대로 인쳐 주신 것입니다. 9절을 보니 사도들이 바울에게 <교제의 악수>를 청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도들과 바울이 같은 마음으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동역자로 인정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바울의 다른 점이 있다면,  모두 같은 복음을 가지고 각자가 전할 분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한 가지 뿐입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신앙체계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사도들은 자기 개인의 뜻대로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5:27에 “성령이 임하시면 보혜사 성령께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여 나를 증거할 것이라” 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승천 후 몇 날이 안되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120문도에게 성령이 감림하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유대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에게와 (고넬료) 와 <사마리아> 와 에베소의 <이방인들>에게도 모두 성령을 주어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1:8 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민수기 11장을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는 일이 힘들어 하나님에게 기도했더니 <70인 장로>를 세워서 이스라엘 백성을 돕는 일을 하도록 하나님이 기도하는 모세에게 명령했습니다,

모세는 실로 어려움을 많이 당했습니다. 그가 인도해 낸 백성이 이런저런 불평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날씨가 덥다. 물이 없다. 고기가 없다. 애급에 있을 때가 좋았다느니 여러 가지로 모세를 괴롭히니 모세가 하나님에게 기도하여 심지어 “죽여 달” 고 까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친 모세의 기도에 응답하면서 이 “어려운 짐”을 혼자 질 것이 아니라 나누어지도록 하겠다고 하시면서 민수기 11:16-1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로 네가 아는 자 70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문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지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대목은 “네게 임한 신 (성령) 을 그들 (70인 장로) 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란 부분입니다. 아주 눈여겨 볼 중요한 부분 입니다. 옛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성령을 주시어 감당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모세 한 사람에게만 주었던 이 성령의 감당하는 은사를 이제는 70인에게 모두 나누어 주시어 백성을 인도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사도행전 에서는 70인 만 아니라  사도행전 2장의 유대인이든 (예루살렘), 사도행전 10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유대의 고넬로 같이 이방인으로 유대교에 입교하지는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이나 사도행전 19장의 이방인 들 (행 19장에 나타나는 에베소 장로들 ) 이나 사마리아 인들 (사도행전 8장) 등 어느 나라 민족이든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백성을 구원하도록 성령의 역사로 능력을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백성을 애급에서 인도할 사실은 구원의 모형입니다. 모세 한 사라에게만 주어젔던 특별한 능력을 모세 당시 70 인에게도 주어 성령의 능력을 주었고 신약 교회 탄생인
사도행전 2장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 전할 사명의 능력을 주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뿐, 그 복음은 그리스도가 전해 주신 말씀이며 바울이나 베드로나 사도들이 모두 같은 복음을 가지고 사역했고 주님의 승천하신 후 몇 날이 안되어 성령이 예루살렘에, 유다에, 사마리아에, 에베소에, 즉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사마리아의 사마리아 인들, 유대의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무리들, 그리고 에베소의 이방인등 모든 민족에게 성령을 부어주어 복음을 전하는 신약교회를 세워 주셨다는 말을 다시 강조합니다.


II. 갈라디아 2:11-21 내용을 공부합시다.
여기서는 성도의 <신앙생활은 표리가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게바 (베드로)를 책망하는 내용을 읽어 봅니다. 왜 책망합니까?  베드로는 왜 책망을 받습니까?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하다가 때마침 야고보에게서 온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오자 베드로가 속히 그 자리를 피하여 이방인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아니했던 것 처럼 다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표리가 부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중생하면 생활이 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이 빌립보 3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전 것은
모두 분토같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이 가장 귀한 것을 알며 그리스도의 종으로 날마다 그리스도를 닮아 가려고“ 애를 씁니다.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고 구원의 열매입니다. 여기 2:11절 이하에서 베드로는 처신을 잘 못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이나 유대인의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베드로도 잘 압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이면서도 아직 유대교의 율법의 종이 되어 처신(處身)한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신앙엔 타협이 있을 수 없습니다.  “눈가림” 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골로새 3:23에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 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잡혀간 아벳느고, 메삭, 사드락 등 16세의 젊은 유대 청소년들은 바벨론의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단 3:18절에 “우리가 평일보다 일곱배나 뜨거운  풀무에 던져지면 그 풀무에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건저 주실 것이며 만약 건져 주지 아니할지라도 우리가 왕의 신들에게 절하지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라고 했는데, 아, 이 얼마나
본문의 베드로와 대조가 되는 신앙입니까?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원하십니다. 오늘 이와 같은 믿음을 볼 수 있을까요?

   요즘은 누가 아무리 잘못하고 이단 사상을 도입해도 침묵해야하며, 절대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에게서 만 아니라 바울에게서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베드로의 면전에서 정면으로 그의 “이중인격성(二重人格性)”을 꾸짖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배울 점입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우리는 바로 잡아 줄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지적해주지 않아 그 사람이 그 죄 때무에 죽으면 그의 피 값을 우리 손에서 찾겠노라” 고 에스겔 3:18 과 33:7-9에 두 번씩이나 강조하여 경고하십니다.  잘 못하는 형제, 특히 교리에 오류를 범하는 형제는 목숨을 걸고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말을 듣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자기 죄로 죽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만 우리는 문책받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고넬료에게 전도한 사람으로 이방인을 성도의 권속으로 영입한 장본인인데 어찌하여 안디옥에서 이방인과같이 먹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올라오니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성도는 항상 신앙과 행위가 일치해야 합니다. 표리(表裏) 가 부동(不同) 한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오늘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힘을 잃어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작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앞에서 비겁하게 행하는 베드로는 분명 그의 신앙에 문제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닭 울기전에 세 번 주님을 부인한 적도 있었던 일을 우리 모두 압니다. 실수가 많은 것은 베드로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실수를 범합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신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것은 유대인의 핍박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도 바로 신앙생활 하려면 늘 핍박을 받습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건성으로 믿는 “사이비 신자” 들
과는 다르므로 그들에게서 핍박을 받게 마련입니다. 성경에서도 경건하게 살려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딤후 3:12에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핍박들이 우리의 사역을 중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친척과 명예와 재신과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 하리” 라고 한 마틴 루터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비록 “동역자” 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수하게 보존하기 위해서는 베드로에게 쓴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바람직 합니다. 우리에게 큰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빛의
자녀들처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빛과 어두움은 서로 상극(相剋)입니다. 빛을 비우처
어두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신앙입니다. 불의와 타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생활에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봅시다. 우리는 어떻게 불의와 타협하면서 성경 말씀을 위반하고 있는지 반성합시다.  그리고 회개합시다.  “회개” 라는 구약의 히브리어 “shub" 란
단어는 “가던 길을 돌아온다” 는 말입니다. 자동차 운전하다가 길을 잘못들어 가던 길을 반대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 성경의 "metanoeo" 는 ‘생각이 변한다“는 말입니다.
가롯 유다 처럼 “후회”하는 것 (metamelomai) 가 아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2: 16절 이하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지 설명합니다. 우리가 의로워 지는 것은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흔히 우리는 우리의 공로를 내 세워 구원과 연관지으려고 합니다. “내가 이런 일을 했으니 구원을 얻을 자격이 있다” 는 태도인데 이는 극히 비성경적입니다.  구원은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모른채 선행하는 것은 이사야 64:6에서 “더러운 옷” 같다고 합니다.  성경적 교훈은 “우리는 하나님의 은례에 의하여,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We are saved by grace, through
faith and in Christ alone (에베소서 2:8).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고 우리의 노력은 가산되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노력할 필요가 무엇인가?  이제 구원은 얻었으니 나가서 마음대로 먹고 마시자“ 라고 말하는데 이는 잘 못된 생각입니다.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된 자“ 에게는  변화가  생깁니다(고후 5:17). 믿음의 열매가 있게 됩니다. 거듭난 사람은 그 속에 오늘 갈라디아 2:20 말씀처럼,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려 주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됩니다. 갈라디아 2:20을 다시 한 번 보세요. 그리고 외우세요.  하나님께로 난자는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고 요일 3:9 에 말합니다.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거듭난 증거입니다.  거듭났다고 하면서도 죄를 상습적으로 습관적으로 짓는 사람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증거입니다. 거듭난 사람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상습적으로‘ 죄를 짓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거듭난 사람과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오늘 공부의 결론으로 복음은 하나뿐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베드로가 전한 복음, 사도들이 전한 복음 모두 같은 그리스도의 복음인데 사역 분야가 다를 뿐입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사소한 일은 덮어준다고 해도 복음의 근간을 흔드는 이단 사상은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되며 십자가의 군사로 싸워야 합니다.  압력에 위축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앞서간 신앙의 선조들이 모두 그런 신앙 자세였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종교개혁가들이 말했듯이, “은혜에 의하여” (by grace), “믿음을 통해서” (through faith) “그리스도 안에서” (in Christ)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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