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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2)

김명도박사 강의

by 김경호 진실 2010. 7. 30.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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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강해 (2)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rvkim@yahoo.com

오늘은 갈라디아서 강해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지난 시간 서론에 이어 오늘부터 갈라디아서 본문 제1장부터 공부하겠습니다.  제1장은 다음과 같이 분류하여 공부할 수 있습니다.

  I 1-5절은 서론
II. 6-10 다른 복음은 없다
III. 11-17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
IV 18-24 그의 복음이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4 부분으로 나나우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I. 1-5의 서론 부분을 봅시다.
   바울은 신약성경에 13개의 편지를 썼는데 모두 초두에 서론을 말하지만 여기 갈라디아 서신에서는 서론 부분이 1절에서 5절까지 그의 다른 서신들에 비해서 비교적 서론이 긴 편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진리의 복음을 바로 가르쳤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교주의자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유대교의 모든 법을 지키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방인은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남자 되는 이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월삭을 지켜야 하고, 절기를 지켜야 하고, 제7일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바울의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고 그들이 가르침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 서론부분이 긴 이유는 이들 유대교 주의자들이 바울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인정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유대교주의자들의 주장은 바울은 주님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바가 없기 때문에 사도의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초두에 서론을 통해서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의 직분을 받은 사도됨을 입증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목사의 권위를 무시하고 스스로 주장하는 일들이 있는데 어느 교회에서는 그 교회 서울대학 공대를 나온 집사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가 주장하기를 “목사님이 신학공부하는 동안 나는 서울대학 공대에서 공부 했습니다” 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역자의 영적인 지도를 받지 않으려고 목사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무리들도 심심치 않게 봅니다. 더욱이 오늘과 같은 Postmodernism 시대엔 더욱 그러합니다.  타락한 인간의 심성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심성이 변하는 것은 성령이 내 마음에서 역사
하여 거듭나 새사람이 될 때입니다.

  Postmodernism 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무엇이든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이란 존재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상대적이므로
목사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대등한 관계에서 해석하려 듭니다. 이들에게는 성경도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고 다른 종교의 모든 경전, 이를테면, 유교의 사서오경, 힌두교의 Veda, Upanishad, Baghavad Gita 나
이슬람교의 Qu'ran 경도 모두 동일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타종교들이 통합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니 모든 것이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도 저들 나름대로의 진리가 있으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니다.  아주 무서운 사상입니다.

  두 번째로, 후기근대주의 의 주창은 모든 것이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성경을 보는 관점도 주관적입니다. 성경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 라고 불리는  독일의 Friedrich Schleiermacher 의 “의식신학”과 같은 사상입니다

  후기근대주의 의 또 한 가지 사상은 모든 것이 정서위주입니다 (Emotionalism). 무엇이든
내 기분에 안 맞으면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내 기분대로 예배드리기를 원합니다. 개혁주의 예배는 하나님 중심이고 하나님이 성경에서 명령하대로 예배를 드려야하는데 후기근대주의 를 믿는 신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은 아랑곳 없고 자기 기분에 맞도록 예배 형식을 고쳐서 예배를 드립니다. 요즘 어느 교회에 가도 예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는 크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만휼히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예배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징벌이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으 법대로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패역한
세대는 자기 감정에 맞게 예배를 드리려고 하고 있고 목사들이 앞장서서 그런 예배를 주장합니다.  이런 교인들 중심 (수은자 중심) 의 예배에서는 자연히 설교는 하나님 중심 아니고 교인들 중심으로 인본주의적으로 흘러가서 이 세상에서 무병장수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오늘의 대부분의 교회의 설교가 이렇게 흘러갑니다. 그런 예배를 부추기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Joel Osteen 이나 Bruce Wilkinson, William Paul Young, Rick Warren, Tony Jones, Doug Paggit, Donald Neal Walsh  같은 목사들입니다.  이런 목사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라는 말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끝으로 후기근대주의의 또 한 가지 사상은 모든 것이 개인주의입니다.  Individualism입니다. 개인에게 유익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는 습성입니다.  저녁예배가 있음에도 개인의 사정을 핑계로 불참하고, 성경을 읽고 해석하여 살아갈 때도 본인의 이익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 말씀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을 따르며 온갖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모든 것이 개인중심이 므로 목사도 개개인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설교를 하나님의 온전한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개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설교하려고 애를 씁니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손상을 받게 됩니다.  이런 후기근대주의 사상은 모든 오늘 날 교회에 너무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고치기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오늘의 교계는 제2종교개혁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미국의 제1차 제2차 각성을 거쳐 이제 제3차 각성운동으로 돌아가기도 힘든 지점까지 왔습니다. 문제는 교회의 타락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에 이제는 고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대로 계속하다가 주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경고할 책임은 바로 믿는 모든 성도에게 있습니다 (겔 3장과 33장을 읽으세요).

II 갈라디아 1:6-10을 보십시다.
   여기에서는 다른 복음은 없으니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는 복음 아닌 것을 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에는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러합니다. 다이아몬드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물건에만 진짜 가짜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도 가짜와 진짜가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얼마나 많은 진짜 크리스챤들이 순교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얼마나 많은 가짜 신자들이 교회를 핍박했는지도 보여 줍니다.  복음에도 진짜가 있고 가짜가 있습니다. 분문 1:8절에 보면 “천사들이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서운 말입니다.

   여기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은 원문에서 “anathema” 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영어 성경에는 “accursed” 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는 <위에 놓여 있다> 는 말입니다. <위에 놓여 있다> 는 말은 하나님 앞에 놓여있다는 말입니다. “ana” 라는 말은 “위에” 라는 뜻이고 “thema” 는 “tithemi” 에서 나온 말로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놓였다는 말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최종적으로 놓여 있으니 “만일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거짓 가르침이었다면 취소할 수 있는 기회가 없이 그대로 심판을 받아 지옥에 내려간다” 는 말이니 무서운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성도와 목회자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을 모릅니다.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자기 편한 대로 “거짓 복음” 을 전하고도 태연자약하게 지내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을 죄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문답 제56문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3계명을 지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뇨?” 라는 질문이 있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3계명을 지키라 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에게 범죄하면 사람의 형벌은 면제 받을지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아주 엄하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말씀은 모두 진리이고 진리의 말씀은 모두 남김없이 그대로 꼭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인간은 그 심성이 패역해져서 하나님을 싫어하고 자행자지하기를 좋아합니다. 패역한 인간은 하나님 없이 자기의 뜻대로 살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의식구조는 세 종류로 분리됩니다. 첫째, 아담의 의식구조가 있습니다. 모든 사물을 하나님의 해석대로 해석하는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타락한 인간의 의식구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해석하려는 의식 구조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문제가 많지요.예를 들어서 포목점에 가서 옷감을 산다고 가정합시다. 집에서 가지고 간 잣대로 재어보니 그 옷감은 치수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인의 잣대로 재어보니 치수가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꼭 맞는 것입니다. 누구의 잣대가 정확할까요?  누구의 판단이 맞는 것일까요?   포목집 주인의 잣대는 나라의 度量衡法에 따라서 인준해준 공인된 잣대입니다. 내 잣대는
내가 내 마음대로 만들어 네게는 쓸모가 있어도 대외적으로는 쓸모가 없습니다. 대외적으로 쓸모가 없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입니다.

  이와 같이 자기중심의 인간은 모든 사물 판단의 기준이 필연코 실수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는 잣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런 잣대로 판단하는 어느 것도 바로 판단할 수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인간이 자의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끝으로 중생한 사람의 의식구조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잣대에 맟추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하기 전과 같은 완전한 상태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구원에는 세 가지 국면 (aspects) 이 있습니다.  "과거면"과 "현재면"과 "미래 면"입니다. 과거 면에 있어서 구원의 설질은 진정으로 중생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모든 죄, 과거, 현재, 미래에 지을 죄마저 모두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 죄만 지어도 지옥에 내려갑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옥에 내려가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의 죄도 남김없이 모든 죄를 용서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로 되어 진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면으로 볼 때 우리는 구원을 얻었으므로 죽는 즉시 영혼이 주님에게 올라갑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또한 현재면이 있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용서함 받았다고 해도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아직 죄의 몸을 쓰고 살고 있고, 사탄이 우리를 부단히 시험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영혼이 거듭나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육신은 아직 부활하지 못한 탓에 죄를 짓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은 세상에 아주 없다” 고 롬 3:11, 3:23이나 전도서 7:20 등에 말합니다. 이 몸이 부활하는 것은 주님이 재림할 때입니다. 성도가 죽으면 죽는 즉시 영혼은 하나님에게 올라가지만 (고후 5:7: 빌 1;23) 몸은 땅속에 묻혀 있다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 주님과 함께 오는 영혼과 연합하여 “영화로운 몸 (glorified body)" 를 입어 고통과 슬픔과 근심 걱정이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아니면 우리가 죽기 전에 주님이 재림하시면 그 때 살아 있는 우리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주님에게 가게됩니다 (고전 15:51) 또한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현재 사탄이 아직 우리를 부단히 시험합니다.  사탄이 아직 불 못에 던져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는 이 땅에서 부단히 싸웁니다. 나 자신과 싸우고 사탄과 싸웁니다.  그래서 험하고 높은 이 길을 싸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John Bunyan 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쓴 “천로역정” 이란 책을 아실 것입니다. 기독도가 장망성을 떠나서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신앙앙생활의 여정을 그린  책입니다.  이 세상은 싸움의 연속입니다. 자신의 죄와 싸우고 사탄과 싸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교회를 “전투적 교회 Church Militant" 라고 합니다.  즉 이 세상에 살 동안은 성도가 구원을 얻었지만 성화가 계속된다는 말입니다. 성화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죽을 때 끝납니다. 그래서 바울도 성경을 쓰면서도 아직까지 성화되지 못한 채 성화가 계속 중이라고 빌립보 3:·12에 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을 이미 얻었으니 이제는 기도할 필요도 없고 회개할 필요도 없고 마음대로 살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구원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잘못된 태도를 신학에서는 "도덕폐기론, Antinomianism"이라고 합니다. 위험한 사상입니다.  구원을 얻었어도 우리가 완전해 진 것이 아니고 점점 성화되어가는, 즉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는 우리는 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묵상하고 아름다운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며 살아 갑니다. 구원을 얻으면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구원의 마지막 국면은 미래면입니다. 미래면은 세상 종말이되어 주님이 재림하고 사탄이 불 못에 던져지고 불신자들과 “다른 예수”를 믿는 사이비 신자들과 사이비 목사들 사이비 부흥사 사이비 신학교교수들이 모두 지옥에 내려가는 대 심판의 날입니다. 그때는 우리의 싸울 대상이 없습니다. 우리 몸이 영화로운 몸을 입었으니 죄와 싸울 일이 없고 사탄도 불 못에 던져 졌으니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지 못합니다. 구원이 완성되는 때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final consummation” 때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관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나 아직도 구원의 완성은 미래에 도래한다는 진리를 발견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Schon aber noch nicht (Already but not yet) 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으나 미래에 이루어진다” 라고 합니다. 이 신학 용어를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화란의 신약학 신학자로 작년 2009년에 소천한 Herman
Ridderbos입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복음>, 즉 선지자와 사도들이 가르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분명히 오늘 갈라디아서 1장 본문이 말하는 데 같은 말을 8절과 9절에 두 번 말하고 있음을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어느 부분을 강조할 때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다시 말하노니” 라는 말, 혹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원어로 “amen amen lego humin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여기 본문에서도 8절과 9절에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여 쓰고 있는 것을 보는데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만큼 바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복음이 아닌 복음은 구원이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 2000년을 돌아보면 다른 복음을 전하다가 이단으로 정죄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몬타누수 같은 사람은 소아세아 프리기아 (Phrygia)에서 예수님의 재림 날 자를 예언하고 굴속에 들어가 Maximila 와 Priscilla 등두 여자와 동거하면서 이상한 교리를 가르쳤는데 Tertullian 같은 훌륭한 초대교회 교부도 한 때 몬타누수 (Montanus) 파에 빠졌던 일이 있습니다.  Tertullian은 법률가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법률가가 예수를 믿어 지도자가 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칼빈도 그렇고, 마틴 루터도 그러하고 세대주의를 미국에 퍼트린 Cyrus Ingerson Scofield도 변호사 였습니다. 삼위일체란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바로 법률가 출신의 교부 Tertullian 이었습니다.

  Arius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보호를 받던 아리우스는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예수님은 인간과 하나님의 중간 상태라고 하다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던 Athanasius (아다나시우스) 와의 논쟁으로 결국 니케아 공회가 열리는데 까지 이르렀고
당시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e)가 주재한 재판에서 결국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바른 믿음의 도리를 정리한 니케아 신경 (Nicene Creed 325) 이 나오게 되었고 얼마 후
후세 사람들이 정통신학자 아다나시우스 의 신앙을 체계화하여 “아다나시우스 신경”
(Athanasian Creed) 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아다나시우스가 만든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이 아다나시우스의 정통 교리를 정립하여 만든 정통신경으로 모두 44 조목에 달하는 매우 긴 신앙고백서입니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서 외우고 있는 사도신경도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후세 사람들이 사도들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만든 신앙고백서 인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도신경을 외우지 않는다고 그 교회를 이단시 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는 사도신경 말고도 성경적, 개혁주의적 신앙고백서가 많은데 이중 어느 것을 수용해도 되는  것입니다. 다만 교회에서 대부분 사도신경을 수용하는 이유는 사도신경이 가장 세련된 신경이라는 장점 때문입니다. Philip Schaff 가 쓴 “Creeds of Christendom” (기독교계 신조들) 이라는 3권짜리 책을 보면 수 없는 신앙고백서를 보게 됩니다. 그 모든 신앙고백서 보다 사도신경이 간단하면서도 우리가 믿어야 할 교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에 교회마다 사도 신경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고백서는 반드시 외워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내가 참된 마음으로 받아 드리는가 하는 것입니다. 외워도 되고 읽어도 무방합니다. 필자가 1998년 8월에 부흥회를 인도하려 갔던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의 어느 미국 방송국 직원들이 출석하는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이 아닌 “아다나시우스 신경“를 교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다나시우스 신경은 모두 44조목인데 믿는 기독교의 교리를 가장 정확하고 가장 면밀하게 성경의 중요한 핵심 가르침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을 눈 여겨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사람을 기쁘게 하랴  내가 만일 사람을 기쁘게 할 것이면 하나님의 증이 아니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목회하는 목사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듣기 원하는 말> 을 할 것인가? 아니며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말> 을 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말세에 사람들이 진리에서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 것을 미리 예언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싫어합니다. “십자가” 와 “부활” 을 전해도 감동이 없고 그런 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무병장수하고 이상한 체험을 하며 체험 중심의 신앙생활을 원합니다. 목회자들은 저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설교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기독교 교리에 아주 무식해 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마치 복음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을 가르치는 교과서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상상이외로 많습니다.  어디를 가도 진리의 말씀을 바로 전하는 목사는 배척당합니다. 기복신앙을 전하는 사람, 체험중심의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이 인기를 누리는 이상한 신앙풍토로 교계가 변해 버렸습니다.

  오늘 성경은 바울을 통해서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고 말합니다. 그러면 복음이 무엇입니까?  다음 11-17 절까지 말씀을 보십시다.

III. 갈라디아 1:11-17 말씀의 교훈
   여기서는 복음은 하나님의 계시 란 것을 설명합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무엇인가는 고린도전서 15:3-4에 아주 간략하게 그러면서도 함축성 있게 설명해 줍니다. 즉 “성경대로 주께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삼일 만에 살아나신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무리 우수한 best seller 라고 해도 십자가와 부활이 없으면 그것은 거짓 복음으로 쓰레기 통에 들어갈 가짜 복음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성도는 Joel Osteen 의 긍정의 삶이나 Bruce Wilkinson의 야베스의 기도나 Rick Warren의 목적이 이끄는 교회, Paul Young 의 Shack, Napoleon Hill 의 “성공하는 비결” (Seven Keys to Success,) Rhonda Byrne 의 “Secret” 같은 책들을 가짜 복음을 전하는 서적들로 분류하고 배척하고 매도하는 것입니다.  릭 워런의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는 분별력이 없는 목사들 간에 인기라서 너도 나도 구독하고 있고, Rhonda Byrne의 "Secret" 이라는 책은 청소년들에게 대 인기입니다. 이런 책들이 기독교를 좀 먹고 있습니다.  특히 Young 의 "Shack "이라는 책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독하는 불량서적 중 불랑서적입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고도로 오도하고 있습니다. 패역한 세대는 이런 서적들을 탐독하여 점점 성경에서 멀어져 갑니다.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을 “나의 복음” 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그가 만든 복음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만 주신 특별 계시의 말씀> 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본문 1:11절 이하에서 말하기를 그가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주님 지상에 계실 당시에는 에수님으로부터 직접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나중에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이방인의 선교사로 부름을 받은 분이고 그의 13개의 신약성경은 모두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은 오늘도 이런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두 성경이 완성되기 전 성경 기록 과정에서 하나님이 선정한 45명에게 하나님은 자기를 나태 내어 특별 계시를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말씀을 모두 마친 지금, 성경이 완성된 지금에는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하시는 것입니다.

  흔히 히 13:8 말씀을 가지고 아직도 하나님이 계시를 주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들은 성경을 모르는 분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다” 는 말은 예수님의 사역이 변함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령 예수님이 늘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순절을 다시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노아의 홍수가 반복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히 13:8 은 예수님의 인격이 영원토록 변함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성경을 곡해 합니까?

IV. 갈라디아 1:18-24 의 교훈
    여기서는 바울이 그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오해와 공격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도용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바울 자신이 고안한 복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여기 18절에서 24절 까지는 그가 사람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님을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15일간 있으면서  다른 사도들을 본 적이 없다고 하는 말은 다른 사도를 만난 적도 없으니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다른 사도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으로 증명합니다. 바울은 20절에서 그가 하는 말이 하나님 앞에서 참말이고 거짓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복음이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 공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갈라디아 1장을 공부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제2장을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 강해 #2, 끝-
http://tulipministries.com/bbs/view.php?id=theology&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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