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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옥 전도사님 생애 요약

조수옥전도사

by 김경호 진실 2010. 10. 24.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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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를 거부한 초량교회 조수옥(趙壽玉) 여전도사

“초량교회라면 경남의 신사참배 투쟁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초량교회는 1892년에 세워진 경상남도에서 제일 큰 교회입니다. 그때 교회의 성도수가 약500명이었습니다. 권찰이 50명정도, 집사가 10명 정도였습니다. 이약신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경찰의 압력에 못 이겨 사임하고 평양으로 옮겼죠...... 남겨진 교회는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양 장로를 중심으로 장로진이 건실한 신앙위에 서 있었습니다...... 조수옥 증언 53,54쪽...”

조수옥 여전도사는 1914년 12월1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 읍내동에서 출생하여 20세가 되던 해에 결홍 하였으나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1935년,22세때) 남편의 외도로 파혼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통영에서 간호사, 봉재교사로 일하다가 1937년 6월 25세의 젊은 나이로 사천군 삼천포 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그 후 삼천포교회는 총회결의에 따라 신사참배 강요를 섰으며 한편 삼천포 시에서는 전교인을 신사참배 시키기 위하여 강제 소집하였으나 조전도사는 끝까지 반대하여 경찰서장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다. 1938년 11월 초량교회는 갈 곳 없는 조 전도사를 전도사로 받아 드려 시무케 하였다.

그 당시 초량교회에서는 강루식 집사를 위시한 많은 교인들이 산리기도처에 비밀리 모여 기도하는 등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교회 저변에 깔려 있었다. 조 전도사는 이에 동조하여 작은 모임이 있을 때 마다 음성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9년 8월에는 남의 눈에 띠지 않기 위하여 부산 수영 해수욕장에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반대 운동 모의를 하였다. 이때 참석한 인사로는 한상동 목사, 사모 김차숙, 한정교 목사, 사모 이정, 윤술룡 목사, 이인재 전도사, 백영옥 집사, 김현숙 전도사, 배학수, 조수옥 등 이었다.

1940년 1월 초량교회를 사면하고 부산 호주 선교부 소속 부산지방 순회 전도부인으로 위촉받아 전도 활동을 계속하였다. 계속되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과 운동자금 지원 등으로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초읍동 자택에서 검거되어 북부산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그 후 1941년 8월25일 평양형무소로 이송되었으며 그때 같이 구속된 인사로는 여러사람이 있었으나 초량교회와 관련된 인사로는 제3대 주기철 목사, 방계성 장로(주기철 목사 시기 당회 서기). 제6대 한상동 목사, 손명복전도사(초량교회 설립 산리 기도처 전도하, 해방후 온천교회 초대 교역자) 등이 있었다.

조수옥 전도사는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동시 축옥하였다. 1945년 12월 이약신 목사의 권면으로 마산 인애원(仁愛院)을 설립하여 많은 불우 청소년을 양육하였으며 현재의 경남종합사회복지관이 그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전국여전도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정부 및 가종 단체의 위원 또는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86년 5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경남지방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거점이 였던 초량교회, 그 시기 초량교회에서 시무하였던 교역자들, 주기철 목사 방계성 장로 손명복 전도사 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오랜 세월 환란 풍파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지켜온 조수옥 여전도사는 초량교회 115년 역사 속의 한 떨기 아름답고 신선한 꽃으로 자리 잡고있다. 그는 2002년 10월 28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초량교회 역사관 제공
 
http://www.seonjija.net/seon/?mid=sub3_16&document_srl=5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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