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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사역의 중요성 - 호라티우스 보나

호라티우스 보나르

by 김경호 진실 2010. 10. 26.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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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사역의 중요성

 

 

“소수의 살아 있는 자들이 기독교 사역에 미치는 영향은 다수의 미지근한 자들이 미치는 영양보다 훨씬크다!”

이것은 스위스 개혁자 오이콜람디우스 의 말이다.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이 교훈을 배운 그는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유익을 주고자 그 체험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자칭 그리스도의 사역자라고 말하는 사람의 숫자가 증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독교 사역에 반드시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원의 잡초” 나, 이스라엘 진영에 말썽을 일으킨 아간, 또는 사나운 풍랑의 원인인 요나와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그들도 정통 신앙을 갖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산 믿음 없이 뜨뜻미지근하게 마지못해 형식적인 사역을 수행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영적 생명을 모두 얼어 죽게 만든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의 사역에 치명적인 해를 가한다.

정통신학을 고수한다는 사람이 뜨뜻미지근하게 사역을 하게 되면, 사실 이단이나 일관성 없는 신학을 고수하는 사람이 사역하는 것보다 영혼들에게는 훨씬 더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세실은 “이 세상에 게으른 목사보다 더 해로운 사람은 없다”고 말했으며, 플레처는 “미지근한 목사는 태평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들어 낼 뿐이다”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런 목사들의 수가 증가한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이 나라에 축복이 될 수 있을까?

 

   만일 어떤 교파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의 교회가, 교회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 사이에 이 세상 아무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면서 초대교회의 모범으로 돌아가 그들처럼 살기를 원한다면, 즉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기 원한다면, 영혼을 보살피는 목회자 선정에 보다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즉 그들이 얼마나 많이 배웠으며 얼마나 재능이 많은지 보다는, 그들이 과연 영적인 사람이며 믿음과 열심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주님과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갖고 있는지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영적인 교사들의 수가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즉 신실치 못하고 일관성 없는 교사들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위 건전하고 신실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 교사들 중에 차갑고 냉랭한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참 종교라면 그것은 모든 것을 희생할 만큼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의 열심과 성의를 가지고 그것을 전파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런 열심 없이 전파한다면 그건 무신론자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들은 이런 종교적 열심을 싫어하거나 혐오 내지는 조롱할 수도 있고 심지어 핍박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만일 하나님과 구세주가 정말 살아 계시며 천국과지옥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에 합당한 열심과 사랑을 가지고 그 말씀을 전파해야지 그렇지 못한 것 다 위선이요 거짓이며 허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은 냉랭하고 차가운 목사들이 전하는 생명 없는 설교를 들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목사 자신도 자기가 설교하고 있는 것을 믿지 않는 판국에 우리가 그걸 꼭 믿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담. 또 만일 목사들이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자기들이 설교하는 교리를 믿고 있는 거라면, 그 교리에 땡전 한푼 벌지 못하는 우리가 그 교리를 좀 부인했기로서니 그게 뭐 그리 나쁜 일이람.”

 

   목회자의 사역이 손상되고 영혼들이 황폐해지는 원인은 꼭 그 목회자의 신앙이 건전치 못하다거나, 그가 의무를 게을리 한다거나, 그 생활이 자신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믿는 신조나 행실에 있어서 전혀 흠잡을 것이 없는 목사도, 얼마든지 교인들에게 영적 유익을 끼치는 대신 오히려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정통신학은 고수하지만 바싹 마른 물통과 같은 목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입으로는 인생의 도에 대해 설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서리가 초목을 죽이듯 그렇게 냉랭한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말로는 십자가를 선포하면서 실제로는 사람들을 십자가에서 쫓아내는 목사들도 있다. 심지어 양떼들에게 축도하는 순간마저 하나님과 양떼들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는 목사들이 있다.

온화한 입술을 통해 나오면 단비나 이슬처럼 사람들 영혼을 촉촉하게 위로할 수 있는 말이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오면 마치 눈이나 우박처럼 영혼을 싸늘하게 만들어 영적 생명을 시들게 한다.

이처럼 그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은 모두 참이요 말할 수 없이 소중한 것들이지만, 설교자 자신의 사랑이 부족해서 진지한 열성이 부족해서 그동안 주님을 떠난 영혼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기독교 사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죄인들을 회심시키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다. 신실한 목사라면 누구나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 할 때 마음이 불편할 것이다. 사람들의 박수갈채, 인기나 명성, 명예나 재산, 이 모든 것이 실은 다 헛된 것이다. 만일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지 못한다면, 성도들의 성장을 도모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사역은 모두 헛수고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 양심에 대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그동안 내 사역의 목적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구원받은 영혼들을 잘 인도해 주는 것이었는가? 그것이 정말 내 마음의 소원이었는가? 내가 하는 모든 설교와 심방의 목적도 이것 때문이었는가? 나는 과연 말할 때나 걸을 때나 나의 모든 삶 속에서 항상 이 생각을 하며 생활하고 있는가? 내가 기도하고 수고하며 금식하고 우는 이유도 과연 이것 때문인가?

나는 과연 나 자신이 구원 받은 것 다음으로 이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 일을 위해 모든 시간을 바치고 있는가? 또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고 있는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라면 기꺼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는가?

내 손으로 하는 이로 말미암아 주의 뜻과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나의 사역으로 인해 영혼들이 회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내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해 힘을 얻어 기쁘게 순례길을 계속 가는가, 아니면 수고의 열매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만족한 채 그 상태에 그대로 머룰러 있는가? 내 설교를 듣고 구원받은 사람은 물론 죄를 깨달은 사람조차 없지만 그저 의무적으로 설교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스도의 참 사역자라면 자신의 사역이 실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경우, 절대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자기가 세운 계획들이 순조롭게 진행해 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실제로 구원받는 영혼들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간주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 사역자는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갈4:19)라는 심정을 갖고 있다. 그의 사역이 성공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목사는 계속해서 죄인 회심시키는 일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한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고 오웬은 말했다. 성공의 비결을 간단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축복을 힘입어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다는 단호한 결심을 가지고 사역에 임한다면 분명히 성공할 것이다.

어떤 어려움에 부딪혀도 반드시 극복하겠다는 결심 아래 그 사역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를 계산해 본 다음, 그 눙을 오직 위에 있는 상에만 고정시키고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며 자기 길을 가기로 결심한 사람, 이런 사람만이 승리할 수 있다.

 

  그리스도에 대해 그저 냉담하고 무심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사탄은 아주 적극적인 자세로 작전을 개시했다. 따라서 이제는 정면으로 사탄과 대결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다. 게다가 사람들의 양심이 얼마나 무뎌졌는지, 하나님은 노아 홍수 이전처럼 그들이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 진력하고 계신다. 또 성령께서 역사하시어 이 땅에 전례 없는 부흥을 허락하셨다. 따라서 지금은 아주 놀라운 때로, 우리는 그것이 지속되는 한 이때를 잘 이용할 필요가 있다.

 

 

   모든 의심과 곤고함, 콕콕 찌르는 양심의 아픔, 만족을 얻지 못한 채 무언가 갈급해 하는 영혼, 오직 그리스도만이 이 모든 것의 진정한 목표요 평안한 안식처다.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요, 교리나 어떤 형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요, 어떤 종교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시고,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하시며, 영원한 언약에 인치신, 하나님이요 동시에 인간이신 그리스도,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는”(골2;3), 모든 빛과 진리의 보고되신 그리스도, 성령으로 충만하신 무한한 그릇이요, 빛을 비춰 무지를 깨우치는 계몽자요,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요, 영혼을 소생케 하는 분이요, 보혜사이신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요1:16)이다. 그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목표요 안식처다. 큰 유혹자 사탄이 무저갱에 갇히고 모든 싸움이 완전한 승리로 긑날 때까지, 오직 그리스도만이 불안하고 초조한 영혼들의 피난처요, 굳건한 반석이요, 평안한 집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랑거리지만 머지않아 시대의 유물이 될 수도 있는 이 “진지한 열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진지한 열성 있어야 이 시대의 들뜬 열기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는 차분한 축복으로 진정시킬 수 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진정제나 마약 또는 가짜 치료제에 불과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하나님의 치료제로서 가장 신속하고 영원한 효력을 발한다.

다른 사람이 어떤 “견해”를 제시한다고 해서 우리도 “견해”로 맞서면 절대 안 된다. 우리가 휘둘러야 할 무기는 하나님의 진리다. 즉 “성령의 검‘ 으로 인간의 이론에 맞서야 한다. 그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가 그동안 얼마나 어리석은 궤변을 거미줄처럼 짜놓고 그 속에 스스로 빠져 파멸을 초래했는지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견해가 아니라 진리요,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이며, 종교가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문학이나 과학이 아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사랑을 아는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나 자신이 참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영혼이나 다른 사람들의 영혼들 다룰 때, 주께서 심판주로 오실 그날으 기다리는 자답지 않게 다루는 나 자신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처럼 놀라운 일에 완전히 몰입하지 못한 채,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할 여유를 갖고 있는 나 자신을 보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문제들에 대해 그렇게 가볍고 냉랭하게 설교할 수 있는지 그 점에 대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렇게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보고도 어떻게 그대로 방관하고 있을 수 있는지, 그들이 내 말을 듣든 말든 또 그로 이해 내게 어떤 고통이나 곤란이 생기든 안 생기든, 전혀 개의치 말고 주님을 위해 그들에게 가서 회해를 촉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정말 어이가 없을 뿐이다. 

 

  강대상에서 설교를 끝내고 내려올 때마다 거의 언제나, 내게는 이제 진지함도 열심도 없다는 생각에 양심이 찔린다. 설교할 때 미사여구를 충분히 사용하지 않았다거나 우아하게 하지 못했다거나 무례한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양심이 찔린 적은 없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생각들 때문에 항상 양심이 찔린다.

 

 

“어떻게 그런 심정을 가지고 생사에 관한 설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교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무심하고 졸린듯한 말투로 말할 수 있었을까? 너는 네가 설교하는 것을 정말 믿고 있는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설교인가?, 장난삼아 한 설교인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에게 죄는 이러한 것이며 여러분 앞에는 많은 고통과 비참함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울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큰 소리로 울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어야 하지 않은가? 그래서 저들로 하여금 열심을 내서 생명과 사망에 간해 알고 싶어하도록 만들었어야 하지 않은가?”

 

 

진실로 나의 양심은 귀가 멍멍하도록 큰소리로 이렇게 외치는데, 졸린 나의 영혼은 그래도 깨어나려 하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이렇게 무감각하고 강팍한 마음을 갖고 있을 수 있을까! 오 주님 이 불신앙과 완악함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도구로서 다른 사람들을 불신앙과 완악함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오, 주님,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바로 그 일이 우리 영혼에서 먼저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혼을 인도하는 이들에게 주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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