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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 493주년>을 맞으며(김명도 박사)

김명도박사(미국)

by 김경호 진실 2010. 11. 3.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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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종교개혁은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교회가 바른 길을 잃고 성직자들은 교리 면이나 도덕면이나 윤리 면에서 극도로 타락되어 있었고, 일반 성도들은 진리와 비 진리를 구분할 능력도 없이 교회에서 지시하는 대로 순종할 뿐이었다. 오늘의 교계와 꼭 같은 사정이었다. 오늘의 기독교가 바로 그러하다. 목사들은 거짓을 가르치고 일반 교인들은 그것을 좋게 여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그 떄와 지금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오늘 다시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교회는 온갖 비 성경적인 방법으로 성도들의 재산을 유인하여 교회당을 크게 짓고 교회의 재산을 증식해 나갔다. 성경은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성도에게는 금물이었다. 설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라틴어로 행해 졌고, 말씀을 맡은 성직자들은 권위만 내 세울 뿐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일반 성도들은 성경에 무식한 성맹 (聖盲)들이었다.

 

이런 타락한 교회의 제도를 바로 고쳐서 진정한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1517년 10월 31일 낮 12시 독일 Wittenberg 성당에서 일어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었다. 그로부터 493 년이 흘렀다. 실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들 종교개혁 가들의 가르침과 오늘의 기독교를 비교해 보자. 종교개혁은 많은 피를 요구했고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의 무자비한 핍박과 학살에 귀한 목숨을 잃었다. 우리가 로마 천주교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 성경대로 믿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는 16세기 종교개혁 가들이 흘린 피 값으로 얻어진 것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그들의 고귀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Scotland 의 St. Andrews 성당 앞에서 천주교 추기경 Beaton 이 조소 (嘲笑)하는 가운데 성당 앞 인도에서 벌어진 Scotland 최초의 약관 25세의 순교자 Patrick Hamilton (1503-1528)의 화형을 잊을 길 없다. 이어서 20 미터 떨어진 같은 도로에서 같은 방법으로 순교당한 George Wishart(1513-1546) 영국 Oxford 대학 교정에서 Mary 여왕에게 순교당한 Nicholas Ridley (1500-1555), Hugh Latimore, (1485-1555), Cambridge 대학의 Thomas Cranmer (1489-1556) 같은 순교자 가 없었다면 개신교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종교개혁 가들의 주창은 1) 하나님의 전제주권, 2) 성경의 절대적 권위, 그리고 3) 성경의 생활화 등 세 가지를 삶의 철학으로 주장한 것이었다. 그들의 motto는 1.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2. Sola Fide(오직 믿음), 3. Sola Gratia(오직 은혜), 4.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그리고 5.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에게 영광) 등이었다.

 

이 다섯 가지에 대해서 천주교와 종교개혁 가들이 서로 정반대의 견해를 갖고 있었다. 천주교 신부들에게 이 다섯 가지를 “sola” 라는 말을 빼고 물으면 모두 긍정한다. 그러나 “오직”이란 말이 들어가면 모두 주먹을 쥐고 “이단”이라고 공격해 온다. 천주교는 성경의 권위, 믿음, 은혜, 그리스도, 하나님에게 영광 등을 믿지만 성경적 의미와는 다르게 믿는다. 로마천주교는 라고 외쳤다. 성경이 우선이 아니고 교회가 우선이라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란 <교황>을 말한다 (ex cathedra). 교황은 무오하며 성경도 교황이 해석한대로 믿어야한다고 가르친다.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이 서로 다를 때는 교황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칭의 개념 (稱義槪念) 을 보자. 우리가 의로워지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해서> 만 이루어진다. 이것이 성경적인 칭의의 사상이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유형교회인 그들의 천주교에 속해야 되며 천주교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친다. 구원을 받고 저 하는 자는 천주교의 유형교회의 가르침에 순종하며 영세(세례)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필수라고 하면서 수세중생설 (受洗重生說, Baptismal Regeneration)을 가르쳤다.

 

종교개혁 가들은 이를 반박,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 짐을 강조했다. 우리가 구원을 얻는 것은 어떤 공로를 세워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해 주시어(엡1:4) 믿음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만 (엡 2:8) 되어 진다는 독력구원(獨力救援, monergism) 을 가르쳤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협력구원(synergism)을 가르친다. 즉 그들의 말을 들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지만 우리가 세우는 공로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만일 사람이 자기 개인을 구원할 공로보다 더 많은 공로를 세우면 그 공로는 <여공 餘功 Supererogation> 이 되어 교회에 <예치,預置, deposit)> 해 두고 다른 사람에게 그 공로가 전가되어 그 사람의 구원에 도움을 준다고 가르친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세주” 라고 종교개혁 가들을 성경적으로 바로 가르쳤다. 그러나 로마 천주교는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마리아, Virgin Mary> 도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고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라고 가르쳤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다고 하는 소위 “동정녀무후수태설, Immaculate Conception of Virgin Mary" 라는 교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리아는 평생을 동정녀로 살다 죽었고 지금은 승천 (Assumption of Virgin Mary) 했다고 가르친다.

 

천주교의 제2차 <바티칸 공회 (Vatican II, 1962-1965)> 에서도 <연옥의 교리> 와 함께 이 모든 교리들이 재확인 되었다 그러므로 한 편에는 <바로 믿자> 는 종교개혁 가들과 또 다른 한 편에는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인 교리를 고집하는 천주교와 오랫동안 피눈물 나는 싸움이 있었다.

 

특히 1572년 8월 23일 저녁부터 24일 해 뜰 무렵까지 천주교의 명절인 <성 바돌로메오의 날> 에 프랑스 전국에서 칼빈을 따르는 개신교 성직자들과 일반 성도들 2 만 여명이 천주교인인 프랑스 Catharine 대왕대비에게 무참히 순교당하는 끔찍한 대 학살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비극이다.

 

그날 프랑스 황실은 찰스 9세의 여동생 마가렛 (Margaret) 이 나바르 공 (Duke of Navare> 와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서 많은 위그노족의 대표자들, 다시 말하면 개신교의 지도자들을 많이 초청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영악한 프랑스의 카사린 대왕대비는 위그노 족의 지도자 콜리니 (Coligny) 를 죽이고 이를 조사하려고 하는 세력이 무서워서 개신교도를 모두 대량 학살해 버렸다. 학자에 따라서는, 2만, 10만 20만 각각 계산이 다르다, 상당히 많은 개신교 (칼빈의 개혁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성도들을 ‘위그노 족’이라고 하는데 (Huguenots) 이들이 살해당함)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다.

 

영국 Scotland에서는 George Wishart (1513-46, John Knox 가 호위하던 상사) 와 Patrick Hamilton (1503-1528)이 St. Andrews 성당 앞에서 천주교 St. Andrews 교구를 담당하고 있던 David Beaton 천주교 추기경이 보는 가운데 장작 덤이 위에서 화형에 처해졌다(burned at the stake).

 

영국 Oxford 대학 교정에서는 Hugh Latimore 와 Nicholas Ridley 등 Cambridge 대학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종교개혁을 가르친다는 죄목으로 Oxford 대학으로 끌려와서 Oxford 대학 학생들에게 경고하기 위해서 바로 Oxford 대학 교학처 건물 앞 교정에서 1555년에 화형 당했는데 지금도 그들이 화형당하여 순교했던 자리에는 그들이 화형 당했던 모습을 그대로 담은 청동색 동상이 서 있다.

 

종교개혁을 도운 영국 Edward VI의 고문으로 있던 Thomas Cranmer 교수 (1489-1556) 는 Hugh Latimore, (1485-1555) 와 Nicholas Ridley (1500-1555) 가 화형당하는 모습을 보도록 강요당했고, 도 그 다음해인 1556 년에 같은 Oxford 대학의 교정에서 화형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누리는 참 신앙의 자유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고 실로 많은 사람들이 홀린 피의 대가임을 알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는가? 천주교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가? 이렇게 얻어진 개혁주의 신앙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가? 지금 천주교는 WCC 를 통해서 지상의 모든 백성을 천주교로 끌어드릴 술책을 쓰고 있다. 개신교 목사들 (J.I.Packer, Charls Colson 등) 이 천주교에 놀아나는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1994년에 만들어진 라는 개신교 천주교 협력 선교 기구 를 참고할 것).

 

그런데 그렇게 해서 이룩한 종교개혁이 요즘에 와서는 힘을 잃어갈 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제2의 종교개혁> 을 외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다. 종교개혁 사상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나 종교개혁 사상에 도전하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종교개혁의 내용을 모르는, 비교적 신학이 약한 사람들이다.

 

요즘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할 것 없이 신학교에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학교가 대부분이다. 목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의 기본인 성경원어 즉 헬라어 (Greek) 나 히브리어 (Hebrew) 는 이미 과목이 폐지된 지 오래다. 혹 원어를 강의한다고 해도 형식일 뿐 성경을 읽을 정도로 철저하게 가르치지 않는다. 신학교는 <안일주의>와 <적당주의>로 흘러가고 어려운 성경 원어 공부를 기피하는 학생들의 비위맞추기에 바쁘다.

 

오늘의 신학교와 교회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가? Martin Luther 나 John Calvin 이나 Francis Turretin 이 무덤에서 나와서 오늘 타락일로의 교회와 신학교를 본다면 통곡할 것이 분명하다. 원어를 모르고 무슨 재주로 성경을 바로 가르칠 수 있는가? 이래서 이단들이 창궐한다. 원어를 모른 채,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 기에는 너도 나도 성경 원어 공부에 열중했다.

 

 문예부흥이 일어날 무렵 남부 유럽 즉 이태리 스페인, 포튜갈 등에서는 문학, 미술, 회화에 집중했지만 북 구라파 (Northern Europe) 에서는 성경 원어공부에 중점을 두었다. 결과 문예부흥 (Renaissance) 직후 독일에서는 Reuchlin 이 <히브리어 사전)을 처음으로 만들어냈다. William Tyndale 은 감옥에 수감 중 간수가 “도와줄 일이 없는가?” 라고 묻자 그 간수에게 “히브리어 사전을 차입해 주시오” 라고 했다. 이것이 오늘의 목회자들과 그때의 종교 개혁가들의 차이이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오늘의 목회자들을 어떻게 보실까? 또한 요즘은 기독교를 많은 종교 중 하나로 가르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동일하다” 고 가르치는 신학교가 날로 늘어가고 기독교도 다른 종교와 다를 것이 없이 그 많은 종교 중의 하나라고 하는 독일의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에 속한 학자들의 생각을 복사한 사람들이 상상외로 많다.

 

18세기의 <종교사학파>가 그러했다. 그들은 기독교도 <원시 종교>의 하나로 취급하면서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바벨론 신화 집> (神話集) 인 Gilgamesh 라는 책을 참고하여 모세가 아닌 어떤 다른 학자가 편집하여 창세기를 기록했다고 가르친다. 성경을 성경대로 믿지 않은 독일의 타락한 신학자들의 엉터리 인본주의 신학이다. 이들이 모두 <신학박사> 이며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는데 지금 모두 어디에 가 있을까 궁금하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독일의 신학계는 세계의 신학의 흐름을 주름 잡았다. 그릇된 신학은 거의 독일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에 병균을 옮겨 놓았다.

 

맨 먼저 병균에 감염된 곳이 New York 의 Union 신학교의 Charles A. Briggs 교수였다. 그는 <성경해석에 고등비평을 도입해야한다> 고 부임하면서 첫날부터 그렇게 주장했다. 그 결과 학교에는 분쟁이 일어났고 드디어 Union 신학교는 노회에서 탈퇴했다. 물론 이런 신 신학은 그 후에 Princeton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Princeton 신학교에서 개혁주의 교수들이 대거 학교를 이탈하게 된 것은 우리가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종교개혁가인 요한 칼빈은 평생에 많은 책을 썼고 많은 설교를 했고 많은 강의를 했다. 그는 “나는 너무 바빠서 하늘의 태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잊을 지경이라“ 고 말한 적이 있을 만큼 늘 사역에 여념이 없었다. 그의 저작 중에는 Psychopannychia (1534) 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가 처음 쓴 책이다. 그 후 그는 1536년에 그의 대표작인 “기독교 강요”를 7장으로 간단히 정리해서 발표했고, 그로부터 23년 후 다시 그 책을 수정하여 총67장으로 구성된 4 권짜리 방대한 “기독교 강요”를 Latin 어로 완성하여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틀을 잡았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Theodore Beza 가 그를 오른 팔처럼 도왔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Francis Turretin (1619년 “Dort 신경” 초안을 만든 Benedict Turretin 의 아들) 이 누구보다도 칼빈주의 를 가장 정확히 정리하여 가장 널리 전파했는데 이런 노력은 그의 불휴의 명작인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기독교 변증 가요) 3권짜리에서 잘 나타난다. 그후 모든 조직신학 책들은 하나같이 Turretin 의 책을 참고하여 저술되었다. 그의 이 명저는 지금 $130에 팔리고 있지만 신학생이나 목회자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며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칼빈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문제의 “Psycopannychia” 라는 책은 “영혼수면설, Soul Sleep Doctrine"을 반박하는 내용이다. 오늘의 <여호와의 증인>이나 <안식교>의 교리를 비판한 책이다. 칼빈은 많은 책을 썼고, 주석 책도 많이 썼지만 ,그 중에서 3 가지 중요한 논문이 있는데 1. Reply to Sadoleto (1539) 라는 논문은 Geneva에서 사역하면서 쓴 것이고 천주교의 추기경인 Sadoleto 가 Geneva를 로마 천주교에 복종하라고 한 명령에 반박하여 쓴 글이다. 2.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1543) 은 종교개혁가인 Martin Bucer 의 요청으로 Charles V 황제에게 바치기 위한 논문이었다 3. The True Method of Giving Peace to Christendom and Reforming the Church (1548) 라는 논문도 천주교가 개신교를 압박하면서 개신교 지도자들이 천주교에 복종하라는 내용의 명령을 내린데 대한 반발로 작성된 논문이다.

 

이 세 가지 논문이나 그가 쓴 수많은 저작에 나타난 칼빈의 사상은 다섯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이것은 칼빈의 굳은 신념이고 이런 다섯 가지를 구현하려고 제네바에서 명문 제네바 아카데미 (Academy in Geneva, 오늘은 Universite de Geneve 로 승격) 를 세워 몸에 27가지 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끝가지 Geneva 의 Cathedral de St. Pierre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55세에 하나님 앞으로 갔다. 그의 마지막 말씀은 “나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1509-1564).

 

그의 무덤에는 얼마동안 묘비가 없었는데 너무도 그를 찾는 성도들이 많아서 당국은 나중에 JC 라는 두 글자가 들어있는 나무패를 무덤에 만들었으나 오늘에는 500 년 비바람에 그 표지조차 희미하다고 한다. 그의 생애를 오늘의 오만 방자하고 목에 힘을 주는 “사이비 성직자들” 과 비교해 보라.

 

<칼빈의 5가지 굳은 신념>이란 무엇인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 신앙문제에서는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라는 것. 2. 교회는 성경에서 명시한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 3.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오직 은혜로만 되어 진다는 것, 4.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두 가지 성례 즉 세례와 성찬만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5. 교회가 성경적 목회자와 성경적 교육자를 세워야 한다는 것 등 다섯 가지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마지막 다섯 번째 항목, 즉 “교회는 성경적 목회자” 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교회가 타락하고 이단이 창궐하는 것은 교회마다 “미자격 목사들” 이 편만하여 목회를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이 타락하면 교회가 결단 나고 교회가 제구실을 못하며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고 사회의 윤리와 도덕이 무너지면 국가가 무너진다. 이것은 로마제국의 경우를 보아 알 수 있는 진리이다.

 

그러면 이제 이 다섯 가지를 오늘의 기독교와 비교해 보도록 하자. 1. 성도의 신앙문제에 있어서는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이다. 개혁주의의 특징은 성경중심이다. 개혁주의 라고 하면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전제주권> 이다. 성경은 성직자만의 전용물이 아니며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 나라말 (vernacular) 로 번역해서 읽어야 한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성경이외에 전통을 중요시하여 성경과 전통을 대등 시 하는데 로마 천주교의 교황만 성경을 해석할 권리가 있으며 교황의 성경해석은 절대 무오 하여 모든 성도들이 비판 없이 따라야 한다고 천주교는 가르친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종교개혁 가들은 오직 성경을 부르짖었다. 교황이 성경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황위에 있다는 것을 알자. 교황도 성경에 복중해햐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 신학이다. 성경은 <우리 생활과 신앙의 유일한 법칙>이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하며 성경대로 살도록 애쓴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칼빈이 쓴 Genevan Catechism (제네바 요리문답) 에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진정으로 믿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할 마음이 있으며 성경을 읽고 마음속에 말씀이 뿌리가 박혀 우리 일상생활에 신앙의 열매가 맺혀지고 말씀에 홈빡 젖게 되면 그 말씀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결과를 낳는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하여 성경의 권위를 격하 (格下) 하려든다.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받지 아니한다. 대학에서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 보다는 하나의 수양서적으로 생각하는 교수들이 점점 늘어만 간다. David Noebel 이 쓴 역작 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을 보면 미국 대학의 80%가 무신론자이거나 불가지론자 (Agnostics) 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그들이 받은 <직통계시> 가 성경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성경으로 풀지 않고 성경을 그들이 받은 계시나 환상으로 풀려고 한다. 그들은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인하며 그들이 받는 계시나 환상도 하늘에서 온다고 믿고 그것들이 성경과 대등한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오직 성경>을 외쳤던 종교개혁가들의 생각을 뒤 엎으려한다.

 

<오직 성경, Sola Scriptura>이란 말은 성경의 충족성 (sufficiency of the Holy Writ) 을 포함한다. 이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데 그 계시는 종료되었고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에 필요한 모든 충분한 내용이 다 들어 있어서 더하지도 감하지도 말라고 가르친다(계 22:18-19; WCF 1:1).

 

요즘의 성도는 성경을 연구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하다. 성경은 하나님이 단회적(單回的, once for all) 인 계시로 주신 무오하고 정확한 <마지막 말씀, The Final Word> 이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유전이나 사람들의 주관적인 해석이나 환상이나 계시와 병행해서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며 항상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통해서 바른 뜻을 찾는다>. 이런 방법으로 성경공부를 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도는 말씀을 사랑하여 늘 읽고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성경대로 살자> 는 것이 율법주의 (Legalism) 가 아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 이라고 성경은 말 한다 (시 119:105). <율법주의> 란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공로가 되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요 14장 15, 21, 23,24 절 등에서 말씀을 순종하고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한다. 요이 6절, 요일 5:3 에서도 같은 말을 한다. 오늘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우지만 성경대로 살기를 기피하는 경향이다.

 

2, 예배에 관하여 중세의 문제는 예배 형태였다. 성경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지시한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면 예배를 받지 아니하시며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중세에서 천주교가 제 멋대로 사람의 방법으로 온갖 미신적인 방법으로 예배를 드렸듯, 오늘에도 역시 기독교의 문제는 예배이다.

 

문제가 되는 것이 어찌 예배뿐이랴 만 오늘의 예배를 하나님이 과연 받으실까 하고 생각해 본다.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오늘 아무렇게나 인간중심으로 <사람들 기분에 맞게 드려지는> 형식적인 예배가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라면 시간 낭비일뿐더러 제3계명에 명시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 되게 일컫는 죄> 를 범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소요리 문답 제56문에는 이런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무엇이뇨?” 대답은 이렇다 “하나님이 제3계명을 지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사람의 형벌은 피할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형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말하고 있다. 무서운 말이다.

 

대체로 오늘의 기독교 신자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전혀 모른 채 기분대로 예배하는 경향이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다. 칼빈 당시 즉 16세기의 천주교의 예배는 성경에 없는, 사람이 고안한 미신적인 의식을 도입하여 사람들이 제멋대로 겉으로 형식에 치우쳐 예배를 드렸다. 천주교의 성직자들이 제멋대로 예배를 인도했으며 이상한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가르쳤다.

 

칼빈은 예배에 관하여 말하기를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명시된 대로 만 드려야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대로 예배드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것을 아무리 사람들에게 말해도 설득하기 어렵다. 흔히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어떤 형식으로든지 열심히 예배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에서 지시하지 아니한 다른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에게 가증스러운 것이 된다“ 라고 했다. 

 

오늘 대부분의 교회의 예배를 보라. 예배하는 자들의 열심이 그처럼 대단하니 모두 하나님이 받으시며 하나님에게 영광 되는 예배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에게 <영광> 이 되려면 하나님이 예배를 받아야하고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려면 하나님이 원하는 예배가 되어야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하나님의 법대로 (성경에 지시한대로) 예배해야 하다. 이것이 개혁주의 예배관이다.

 

오늘의 예배는 몇 몇 미국의 정통적 교단을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 교회가 음악, 연극, 연예를 중심한 <극장 같은 분위기> 로 변해 버렸다. 본 튤립교육선교회를 지원하기로 약속하고 최근에 회원 가입한 한 성도는 그가 출석하던 교회가 전과 달리 최근에 와서 <극장으로 변해 버렸다> 고 하면서 그 교회를 떠나 미국의 <정통장로교회 OPC>로 이명 했다.

 

필자는 그분의 처사를 나무랄 이유가 없었다 성도가 언제 교회를 떠나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울 때” 그런 교회를 떠나야한다. 요즘은 성경말씀대로 찬송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도하고, 성경말씀대로 설교하면 별로 <재미가 없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말씀중심으로 살아야 하건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말씀 중심의 생활을 싫어한다. 말씀보다도 우선 <내 기분> 이다. “<내 기분대로 드리는 예배> 가 우선순위 첫째이다.“ “교리는 소용없다.“ “예배순서는 별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풍토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람이 고안해 낸 예배가 성경의 진리를 대신하고 있다. <비정상> 이 <정상> 이 되어 버렸다.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도 모두 감각이 마비되어 잘못을 잘못으로 지적할 능력조차 상실했다. 이런

 

신앙상태에서 마귀의 침입은 자연스럽게 침투하여 갖가지 이단들이 발생한다. 중세와 똑 같은 현상이 지금 우리들 눈앞에 벌어지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려야 하고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드리려면 성경에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예배를 드려야한다. 이것이 종교개혁 가들의 한결 같은 가르침이었다. 진리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대체로 예배에 대한 바른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3. 구원문제 마틴 루터가 지옥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어 희열에 넘쳐 종교개혁을 시작한 동기가 무엇인가? 그는 송곳으로 몸도 찔러 보았다 그러나 죄지을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Constantine 황제의 어머니 Helena 가 로마에 세운 St. Lateran Church 의 Scala Sancta를 맨 몸으로 속옷 바람에 오르락내리락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죄 지을 마음을 없이 하는 것은 아니었다. 로마인서 1:17을 읽으면서 “사람이 의로워 지는 것은 믿음으로 되어 진다”는 말씀을 읽고 새로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어 1517년 10월 31일에 그 놀라운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구원 문제는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이다. 구원문제를 바로 알려면 우선 우리의 죄가 얼마나 중하며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가를 알아야 한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한다. 영원한 죽음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끊어진다는 말이다. 칼빈은 그것을 알았다. 용서 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이룩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imputation)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외롭다고 보아 주시는 은혜> 를 입은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We are counted as righteous before our Holy God without our own merit of any kind).

 

그러나 이와 같은 중요한 구원의 교리가 오늘은 잘못 전해지고 있다. 막연하게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기도 하고 ”나를 따라서 하시오“ 하고는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앵무새처럼 따라하게 하고는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자신 만만하게 그의 ”구원을 선언하는“ 거짓 전도자들도 있다. 몇 마디 말을 따라하면 구원이 저절로 오는 것인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어떤 교파에서는 새로 출석한 사람을 발견하면 그 교회의 교인들이 둘러서서 “오 예수여, 오 예수여 오 예수여 오 예수여”를 반복하라고 한다. 처음엔 어색하여 거부감이 들지만 하도 극성스럽게 졸라대니 “오 예수여” 라고 한 마디 내 뱉으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모두 만족하여 물러간다. 참으로 이상한 전도방법이다. <오 예수여> 한 마디만 하면 그 사람이 중생했건 말건 구원 얻었다고 생각한다. 신학을 도모지 모르는 사람들의 소행이다.

 

이런 사기성 신학이 판을 치고 있건만 성도들은 성경에 무식하니 아무런 비판도 반항도 하지 않는다. 이런 행패는 독 버슷처럼 펴져 나가고 교인들은 독약을 마시고 있다. 영혼들이 병들어 간다. 불한당에게 매를 맞아 넘어진 영혼을 보고 모두 그냥 지나간다. 아무도 관심이 없다. 참으로 이상한 신앙풍토이다.

 

청교도 시절에 이런 일이 가능했겠는가? 그들은 바른 목사를 모시는 것이 평생에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았다. 오늘 그런 신앙이 어디 있는가?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주어도 사람을 잘 웃기면 그것으로 족하다. 교리가 생명보다 중하건만 교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직자와 교회는 타락 일로이다.

 

불행히도 오늘의 교계에는 신학을 모르는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비성경적 사이비 집단이 독버섯처럼 창궐한다. 근자에 교회에서 나오는 전도지를 보면 복음의 성격은 모호한 채 <사랑> 만 강조한다. UPCUSA 의 1967년 <새 신앙고백서 The Confession of 1967> 가 그렇다. 죄와 형벌에 관한 말보다 <화해>와 <사랑> 이라는 단어뿐이다.

 

요즘 Postmodernism 시대의 특징은 바로 rapprochement (라프로쉬망) 이다. “누가 무엇을 해도 모두 이해하고 사랑하고 수용하며 남이 무슨 짓을 해도 남을 비판하지 말고 서로 관용하자“ 는 <상호호혜주의 相互互惠主義> 가 몇 년 전에 신학계에 새로 등장한 Rapprochement 철학이며 다른 말로는 라고 한다.

 

이런 퇴폐적 세기말적 패륜적인 가르침은 프랑스 Sorbonne 대학의 석좌 교수였던 Michel Foucault를 비롯해서 그의 추종자 Richard Rotty, 또 Jacques Dirrida 등을 통해서 널리 펴져 나간다. Foucault 는 그의 책 Madness and Civilization (狂氣와 文明) 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펴 나갔는데 동성연애자인 그는 AIDS 로 죽었다.

 

이런 사상이 지금 어느 곳 할 것 없이 기독교에 깊숙이 파급되어 있어서 좀처럼 고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 지금의 현상유지가 최선의 방책이라고 생각하고 안일에 젖어 살아간다. 아주 놀라운 것은 심지어 개혁주의를 남보다 더 큰 소리로 부르짖으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나 도르트 신경 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이런 오류에 빠지고 있다. 그러므로 "All confessing Christians are not Christians" 라는 말이 오늘처럼 실감 있게 입증되는 때는 기독교 역사 2000년에 들어본 적이 없다.

 

분명 큰 배교(背敎, apostasy) 가 일어나고 있다. 요즘의 기독교의 특징은 전에 없던 큰 배교(Apostasy)인데 전에 성경대로 믿던 유명한 신학자들이나 목사들이 대거 성경에서 떠난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보자, 영국의 John R. Stott, Billy Graham, Gregory Boyd, Clark H. Pinnock 한국에서는 이동원 목사 (Richard Foster 의 신비주의 추천자) 등이 모두 이전과 달라졌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유명 목사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귀로] 들어야한다” 는 가르침이 편만하고 있고 대형교회가 그렇게 가르치니 군소교회들이 모두 비판 없이 따라간다는 슬픈 현상 앞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혼합주의와 뉴에이지, 메이슨교, 종교다원주의, 샤마니즘 모두를 수용하는 WCC 를 지지하며 한국에 까지 불러드린 목사들도 있지 않은가? 무서운 세상이다. 목사들도 믿지 못할 세상이 되었다. 요즘은 평신도가 목사보다 똑똑해야 살아 남는다. 그리고 바로 믿으려는 성도나 목사들에게는 무서운 핍박이 불어닥친다. 벌써 한편 에서는 Verichip 을 이마나 팔에 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 아닌가?

 

앞으로의 성도는 믿음을 지키려면 반드시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 영국의 성공회 의 제2인자로 성공회의 모든 업무를 총관장하는 Rewan Willams 라는 Archbishop of Canterbery (캔터베리 대주교) 가 최근에 히피가 쓴 책을 적극 추천했는데 그 책의 내용은 “교회 예배에서 진부한 찬송가 보다는 Beatles 들이 작사 하고 작곡한 노래가 더 적당하고 따라서 권할만하다” 는 것인데 이는 Rick Warren 목사가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 라는 책 영문판 285면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일치한다. 이런 책을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추천했다.

 

Richard Foster 목사 (Azusa 대학교수) 는 그의 책 Celebration of Discipline 이라는 책 (HarperSanFrancisco, 1988) 의 p.21에서 가장 비성경적인 뉴에이지 운동가 Thomas Merton 을 인용하며 신비주의자 Meister Eckhart 를 인용하면서 (p.40) 말하기를 “기도할 때는 손바닥을 위로 하여 기도하라‘ 라고 가르친다 (pp.28,31). 성경 어디에 기도할 때 손바닥을 위로하고 기도하라 고 가르치는가? 이런 사람이 뻐젓이 신학교의 교수로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어 교인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멀리 한국의 사이비 기독교 지도자들은 그를 한국에까지 초청해서 세마나를 인도하도록 하고 그 세미나에는 목회자 수천명이 운집한다. 이 무서운 죄를 어찌 하나님 앞에 감당하려는가?

 

근자에는 서울의 큰 교회가 천주교와 합동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그 다음 주일 설교는 후안무치하게 ”오직 믿음으로“ 라고 설교한다니 참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무섭지 않은가? 요즘의 특징은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지 않는 점이다. 하나님의 ”절대 거룩하심“ 을 인정하지 않는 풍조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

 

4. 성례식 중세에는 7가지 성례가 예배의 중심이었다. 천주교의 성례는 미사, 영세, 고해, 견진. 혼인 신품, 종부 등 일곱 가지 이다.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성경에 없는 것들로 사람이 만든 것들이다. 칼빈은 이런 것들을 우상이라고 했다.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례식은 마태복음 28:19의 세례와 고린도전서 11:23절 이하에서 명령한 성찬식 등 두 가지뿐이다. 성례식은 말씀과 함께 <은혜의 방편>이다. 은혜의 방편은 두 가지인데 <말씀> 과 <성례식> 이다.

 

성례식을 일년이 다가도 한 번도 하지 않는 교회도 있고, 성례식을 해도 말씀이 없는 교회도 있고 성례식, 특히 성찬식에 준비 없이 참여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다. 성찬식의 중요성과 의의를 모르는 증거이다. 천주교에서는 성찬식에 참여하면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찬식을 통해서는 죄를 용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할 뿐이다.

 

성찬식에도 Zwingli 의 <기념설>이나 천주교의 <화체설 (transubstantiation)> 혹은 루터교의 <공존설 혹은 공재설 (consubstatiation)> 등으로 이해하는 교회가 있지만 개혁주의는 <영적 임재설 (혹은 신비설)>을 믿는다. 성찬의 요소들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신비스럽게 참예 자들에게 임한다고 믿는다.

 

개신교 중에는 성례식이 아주 없는 교회도 있는데 이는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標識) 인 <말씀의 바른 선포>, <성례의 바른 집례>, <권징의 바른 행사> 등에 위배된다. 말씀을 바로 전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이고, 성례식을 바로 행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이고, 권징을 바로 행하지 않아도 거짓 교회이다, 샤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참 교회는 아니다. 성경에 순종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그리고 위의 세 가지 표지를 가지고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참교회 “true church" 인 것이다.

 

성찬식도 개방 식 (Open Communion Service) 가 있고, 폐쇄 식 성찬 (Closed Communion Service) 가 있고 또한 통제식 성찬 (Restricted Communion Service) 가 있다. 이 중에서 Calvin은 를 택했다. 이유는 개혁주의를 믿는 성도는 다른 교회에 출석해도 오늘 우리 교회에서 같이 성찬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아무나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개혁주의를 믿는 성도들, 성경대로 믿는 성도들이 같이 성찬에 첨예해야 한다.

 

5. 교회의 직분자 중세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천주교는 사람이 만든 온갖 이상한 미신적인 교리로 사람들의신앙 양심을 속박했다. 그리고 교회는 권세가 대단하여 교인들에게 마치 폭군적 자세로 임했다. 연보를 많이 하지 않거나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면 가차 없이 결혼 주례를 거부하거나 죽은 자의 매장을 거부했다. 칼빈은 이런 교회의 폭력성을 근절하며 참 교회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또한 로마 천주교에는 두 계급이 있는데 “가르치는 교회, teaching church" 와 ”배우는 교회, learning church" 이다. 가르치는 교회는 물론 교황의 지시를 받는 사제들이고 배우는 교회는 양같이 순한 일반 성도들이다. 칼빈은 이것을 고치려했다. 교회에서 목사와 교사의 구분을 성경대로 바로 세우려고 목사 장로 ,교사 집사 등 네 가지로 교회의 직원 제도를 성경대로 바로 잡아 놓았다. <바른 교훈을 하지 않는 자는 참 목사가 아니라> 고 Calvin 은 여기 저기 그의 저서에서 말했다.

 

그런데 오늘 교회들을 보라. 목사님들 중에 많은 분들이 말씀에 착념하기 보다는 세속에 물들어있다. 행정과 상담과 오락을 지도하는 분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이나 한국을 막론하고 그 많은 신학교들을 보라.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목사나 교사를 양성하기보다 “인기 있는 교회 지도자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은가? 신문에 나는 광고는 “지도자 양성” 일색이다. 말씀중심의 목회자가 아쉽다.

 

은혜의 방편이 말씀과 성례라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 말씀은 은혜를 받는 핵심이다. 말씀이 없이 교회는 존속할 필요가 없다. 말씀이 없는 성례식은 무의미하다. 말씀이 없는 교회는 거짓 교회이다. 말씀이 정말 <은혜의 방편> 이라면 종교개혁 가들의 가르침이 바르다. <말씀을 맡은 목사들>은 세상의 농담이나 만담이나 웃기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착념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래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라, 종교개혁 때 종교개혁 가들이 말씀을 바로 전파하여 그 말씀의 힘으로 하나님의 교회는 수 백년동안 그 말할 수 없는 험난한 핍박을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하면서도 오늘까지 굳건히 신앙을 지켜오지 않았던가? 그 힘이 어디서 나왔다고 생각하는가? 말씀에서 나온다.

 

오늘의 “목사” 가 아닌 “지도자”들은 말씀보다 “교회성장” 에 더욱 열을 올린다. 눈에 보이는 큰 대형 교회 건물, 수 천명 혹은 수 만명이 모이는 교세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러기위해서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야 그들이 교회에 계속 출석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귓맛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수단과 방법을 아끼지 않는다. Robert Schuller 가 그의 “교회성장 학교” 에 들어오는 신입생에게 인사하는 말, “교회 성장을 원하면 교회에서 죄 이야기를 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의 심령을 변화시키는 것은 말씀을 빙자한 <인위적인 교회성장> 이 아니라 신실히 전하는 말씀에 역사하는 성령의 감화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아갈 길은 자명해 진다. 어느 길인가? 바울의 말을 들어 보라 “내가 사람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에게 좋게 하랴 만일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었더면 내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 니라" (갈라디아 1:10).“ <성경대로 믿자>는 개혁주의가 공격을 받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교회는 항상 사탄의 세력에게 공격을 받아왔고 지금도 공격당하고 앞으로도 주님 재림 때 까지 계속 공격, 아니 과거 어느 때 보다 더 가혹한 공격을 당할 것이다.

 

지금의 공격은 문화적 타락으로 인하여 극히 자연스러운 공격인데 실상은 이런 <문화적 타락의 공격> 이 더욱 무섭고 위험하다. 문화의 타락은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하므로 나도 자연스럽게 그런 풍조를 아무 생각이나 비판 없이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가? 마치 전신을 마취당한 사람처럼 아무 느낌어 없다.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다. 이때야 말로 사탄이 작전을 펴기에 가장 좋은 기회인 것이다. 그래서 도처에서 목회자나 신학교 교수들이 넘어진다.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또한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된다고 베드로사도는 베드로전서 4장에서 말한다. 교회가 잘못되어가는 것을 사 이비 기독교인들이 방조하며 옛날 중세처럼 개혁주의 신앙가들을 지금도 핍박한다.

 

오늘 진정한 개혁주의 목사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는가? 미국의 경우는 정부로부터 외면당하고 동료 교역자에게 핍박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다. 이것이 이상한 오늘의 기독교의 풍토이다. 오는 10월 31일은 종교개혁 주일이다. 1517년 10월 31일 낮 12시 독일 한 가난한 광부의 아들이던 Martin Luther 가 신학박사가 되어 신학을 강의하던 그의 Wittenberg 성당의 정문에 95개조의 논문을 게재하여 (사진 참조) 교회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던 날인데 그로부터 상당히 많은 세월이 흘렀다.

 

많은 사람들이 참 신앙을 위하여 싸우다가 피를 흘리기도 하고 혹은 순교하여 얻은 개신교의 개혁주의가 지금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 교회는 성경관, 구원관, 성령론, 교회론에서 모두 빗나간다. 이렇게 빗나가는 기독교를 개혁주의 신앙으로 바로 잡으려는 것이 본 <튤립 교육 선교회> 와 <튤립 신학 연구원> 의 목적이요 사명이다.

 

종교개혁 주일을 맞으며, 지금은 분명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그러나 그 종교개혁은 어쩌면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는 이루어지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모두 개혁주의자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그 영광의 날을 위해서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힘 있게 전진에 전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Pro Regnum Christi !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하여)

 

10/23/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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