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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회 창립 20주년을 맞으며 생각나는 사람들

김명도박사(미국)

by 김경호 진실 2010. 11. 26.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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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회 창립 20주년을 맞으며 생각나는 사람들

                                                                                                          튤립 교육 선교회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오늘은 2010년 10월 20일 우리 튤립 교육 선교회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들어내며 태어난지
꼭 20 주년이 되는 날이다. 20년을 누가 짧은 세월이라 하겠는가?  흔히 하는 말로 강산이
두 번 바뀌지 않았는가?   하기야 고향을 떠나온 지 60년이 흘렀으면 강산이 여섯 번 변한셈인데 그 시절 그 때 어여쁜 어머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니 강산이 두 번 변했다고
한들 별수 가 생기는 것도 아닌 듯 하다.

튤립 교육 선교회 창립 20 주년을 맞는 감회는 본 선교회 홈페이지 “크리스찬의 시사마당”에서 언급한 바 있다.  어머니가 애기를 출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사도 바울이 전도하는 것을 해산하는 일에 비유했을까?  참으로 무슨 일이든 주를 위해서 하는 일, 특히 세상을 따라가지 않고 진리의 길을 홀로 외롭게 걸어가는 선교 사역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다.

나의 인생의 사분의 일을 바쳐 선교활동을 하면서 그간 에피소드도 많다.  요즘은 선교활동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라디오 방송은 말할 것 없고,  테입을 만들어도, CD 를 만들어도, 전도지를 만들어도, 인터넷을 해도 모두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러나 들어 내놓고 아들에게도 재정 지원을 호소할 수는 없다. 내게 있는 것 중에서 먹는 것과 입는 것을 아껴가며 선교에 필요한 기재를 구입하고 우표를 구입하고 봉투와 label 을 구입하여 충당한다.  

필라델피아에서 라디오 방송 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CBS 신앙상담” 프로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방송을 마지고 나오려고 하니 어느 집사님 한분이 나를 보자는 연락이 왔다. 이런 경우는 대개 두 가지 중 하나이다. 한 가지는 방송내용에 거부감을 느끼고 위해를 가하려는 부류의 사람인 경우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방송에 은혜를 받고 새로운 진리를 터득하여 감사 하여 점심이라도 사주려고 만나자는 분도 있다.  

이 날 만난 사람은 순복음 교회 집사였는데 순복음식으로 방송하면 매월 얼마씩을 도와주겠다는 말을 했다.  돈이 목적이라면 왜 전도를 하겠는가? 차라리 다른 세상일을 할 수 있는 능력도 내게 있지 않은가?  다른 세상 직업 능력이 없어서 선교 사업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법정 통역 같은 직업도 있지 않은가? 사실  목회하면서 생활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전화세를 못내게 되자 전화가 끊긴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필라델피아 법정에서 법정 통역으로 일하면서  어려운 생계를 꾸려 나간 적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업이었다.

과거 20년간 정신없이 열한가지 모자를 쓰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나름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애를 썼다. 때로는 자식들한테 혹은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 이 일에 매달려 나의 젊은 시절을 모두 주님의 제단에 불살랐다. 때문에 자녀들이 비뚫어져 이젠 고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막내 딸은 나와 거리감을 두고 지금  머나먼 독일에서 살고 있다. 아들 하나는 내가 고생하는 목회를 보고 여린 마음이 극도로 상했다. 아들 하나는 장로로 교회를 도울지언정 목사는 안 하겠다고 한다. 그 말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지난 날 목회지를 여러번 옮기면서 얼마나 내가 자식들을 고생시켰던가? 목회 현장을 목격한 자식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생각하니 참으로 목회자 이전에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데 주객이 전도되어 가정을 돌보지 못한 죄가 크다. 딤전 5:8 의 구절이 생각난다. 이제 와서 뉘우쳐도 이제 돌이킬 수 있는 길이 없다.  결과는 고시란히 내가 안고 가야한다.

그런데 그 머나먼 길을 떠날 날이 날로 가까워 오니 한편 환희에 넘치먼서도 자식들에 대한 죄책감이 앞선다. 모든 목회자가 나 같은 생각일까?  옛날 같이 신학을 공부하던 장모 목사는 프린스톤 한인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는데 너무 목회에 전념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아들들이 빗나가 엘리트
인 사모가 고생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목회자님들 중에서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분도 분명히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교회란 무엇인가?  아마 나처럼 교회 때문에 고생한 분도 많지 않을 것이다. 신학을 나와 전도사로 신일교회라는 교회를 조직하여 처녀 목회를 시작했다.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열정을 가지고 목회에 임했다. 설교도, 전도도, 심방도 열심히 했다. 젊은 시절이 아닌가?  그러나 5년 남짓한 이 교회에서의 목회 생활엔 파란이 많았다.  감리교 집사님 한 가정과 같이 개혁주의 장로교회를 시작했다. 맞을 리가 없다. 설교가 끝나면 “숨이 막힌다” 는 말만 해 댔다.

교회 초창기에는 흔히 볼 수 있듯 가정에서 예배를 드린다.  우리 신일교회도 전도사 인 나의 가정에서 주일 오전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저의 집에서 교인들에게 대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집사님 한분이 믿음을 “과시”하면서 “전도사님, 뚜껑을 열어 봅시다‘ 라고 하면서 성경 토론을 하자고 했다. ”뚜껑 얼어보아야 예수 밖에 안 나옵니다“ 라고 했더니 마구 졸라대어 그날 점심 먹고 오후 1시부터 요한계시록 20장 가지고 토론을 시작했는데 그 날 마라톤 토론은 다음날 아침 7:30까지 계속 되었다.  계산해 보니 18시간 동안 계속해셔 마라톤 토론을 한 것이다. 그 분은 서울의 감리교 유형기 감독에게서 배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믿는 분이었고 나는  Louis Berkhof 의 무쳔년설을 믿는 사람이었으니 서로 의견이
맞을 리가 없었다.   그 후 그는 교회를 떠났다.

얼마 후 몇 가정이 전도되자 이번에는 어느 집사님이 새벽 4시에 전화를 걸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인사 행정을 지시했다, 불응했더니 그 다음 주일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동부의 30마일은 길이 잘 다듬어진 서부와 달라서 길이 순탄치 않아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공장에 나가 일하며 생활비를 벌어 드리는 아내가 집에 저녁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려 안개가 자욱한 저녁 시골길을 시속 20마일로 운전하여 심방을 해도 집사님의 상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다. 남아 있는 교인들은 “믿음 좋은” 집사님이 나갔다고 하면서 몇 가정이 교회를 떠났다.

그리고 나서 또 교인들의 수가 늘었다.  열심히 전도했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목사 안수를 받고 난 후에 생긴 일이다.  어느 날 성찬식을 거행하는데 집사님 한분이 맨 앞줄에 앉아 소리내어 울고 있었다. 엄숙한 성찬식 자리라서 그런가 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은 그 다음 주일 예배에 결석했다. 심방하여 이유를 알아보니 <옷이 두 벌 있는 목사는 가짜 목사> 라는 것이다. 그는 어느 목사의 아들이었다. 그의 선친 목사는 가난하여 옷이 한 벌, 사과 상자로 책상을 하고 성경을 읽으며 설교문을 작성했다고 했다.  그래서 목사는 평생 같은 옷만 입고 다녀 교인들에게 만족감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드시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신학교 시절 여러 교수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나는  여름이건 겨울이건 매일 같은 검정색 양복만 입고 다닌다. 내가 존경하는 한부선 목사님은 늘 회색 양복이다. 장레식때 관속에 누어 있던 한부선 목사님은 역시 그 희색 양복을 걸치고 계셨다. 신학교 시절 거의 모든 교수들이 같은 옷을 늘 입고 다녔다. 그래서 은연중 물들어서 나는 남이 권해 주기전에 내가 자청하여 양복을 해 입거나 사 입은 적이 없다. 지금 입고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검은 옷도 12년이 넘었다.

검은 옷은 여러 가지로 편리하다. 성찬식 할 때, 장례식 할때, 결혼식 주례할 때 언제든지 어울리는 것이 검정색 옷이다. 그런데 그 울던 집사는 그 후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또 “믿음 좋은” 분이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은 목사의 실책이라고 하며 몇 가정이 교회를 떠났다. 목사의 가정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이제 인내심이 한계에 다달았다. 그 때 총회 어른들이 저의 어려운 사정을 보시고 총회
총무로 일하도록 길을 열어 주어 총무 일을 보다가 후에 다시 총회가 어려워져서 목회지를 찾았으나 이번엔 장로 한 사람이 추장이 되어 당파를 이루어 새 신자가 교회에 들어오면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해서 새신자를  예배후 자기 집으로 초청하여 저녁을 대접하고는 장로에게 충성하도록 종용하곤 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본 새 신자들 중에 똑똑한 사람들은 교회출석을 기피했고 결국 다른 교회로 떠난 분들이 많았다.  심방을 가도 응하지 않았다. “교회 기본이 되어 있지 않다” 는 이유에서 였다,  한 장로가 주축이되어 모든 장로를 통솔하고 모든 집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드려 목사를 몰아세우는 분위기여서 그 교회 20년 역사에 담임목사가 6명 갈렸다.  그 중에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많다.  내가 제일 마지막 목사로 기록되었는데 추방된 모든 목사들 중가장 오랫동안 인내한 목사였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성장한  목회자의 자녀가 무엇을 생각했을까 는 가히 짐작 할만하다.  미국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서는 보편적인 병폐로 만연되어 있다. 누가 미국에서 한인 교회를 목회할 용기가 있겠는가?   1984년 서울에 나가 모 대형교회에 간 적이 있다. 담임목사는 그야말로 “황제” 였다. 비서가 여럿이 옷을 받아 걸고, 코피를 내오고 일정을 보고하고, 기사가 목사를 태우고 싸우나로 모시는 모습을 보고 “하늘에서 무슨 상을 받을까?” 하고 생각하며 미국에서 고생하는 목회자들과 머릿속으로 비교해보며 쓴 웃음을 지은 일이 있다.

선교회를 조직하게 된 것도 이런 여러 가지 내 자신의 쓰라린 경험에서 교회를 바로 세워 보자는 이유도 들어있다.  왜 교회가 이렇게 되어가야 하는가?  어느 미국 신학교 학생하나는 논문을 쓰는데 내가 목회하던 필라델피아 한인 개혁장로교회를 주제로 연구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허락하지 않았다. 선교회는 교회를 바로 세우고 신앙을 개혁주의로 바로 잡기 위해서 세워졌다.

선교회을 운영하면서 잊지 못할 분이 많다. Rowland Heights 에 소재한 동부 평강교회 김삼도 목사님은 내가 그분을 도와 중고생 대학생을 중심으로 영어목회 (English Ministry) 를 하던 교회의 목사님이신데  자주 부족한 나를 단에 세워주시고 선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도와 주셨으며 늘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 선교회를 소개해 주고 계시다. 얾마나 고마운 분인가?   그 다음으로는 공광식 목사님을 잊지 못하다. 그는 팔라델피아 노회에 저와 같이 계시던 분으로 몇 년전 더운 서부로 이사 오셔서 같이 자주 만나는 가정이다.  늘 좋은 말씀으로 격려해주고 얼마 안 되는 수입에서 선교회를 돕고 계시다. 공목사님은 나와 대학교 선후배 관계이다.  

구병융 목사님은 콤퓨터에 문외한인 나에게 온갖 기술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베풀어 인터넷 방송을 가능하게 한 분으로 늘 감사하게 생각하는 분이다.  이번에 촬영하는 You Tube Camera 도 그분이 설치해주셨다. 앞으로 익숙해지면 내 힘으로 You Tube 로 신학강의 나 설교 혹은 칼럼을 촬영하여 인터넷에 올리려고 한다.  그 외에 나의 사랑하는 칼빈 신학교 제자 신복희 전도사, 김종식 전도사 등이 얼마씩 선교회를 돕고 있어서 감사한 일이다.

선교회에서 방송으로 전도하여 열매를 얻은 최초의 인물은 신소희 권사였지만 폐암으로 일찍 주님에게 가셨고 지금 80의 고령인 이영우 집사님이 그 다음이다..  한국에서 법과 대학을 나와 이곳 나성 한인회 조직에 관여한 공로자인 이영우 집사님은 내가 방송을 통해서 만난 여러분 중 한 사람이다. 개혁주의 신앙을 처음 듣는다고 하던 그가 이제는 선교회에서 만든 200 여개의 테입을 들고 난 후로 기독교의 개혁주의 신학자 가 되어 나에게 무한한 기쁨을 준다.  지금은 그 분이 거동이 불편하여 밖에서 만나지는 못하고 전화로 가끔 조언을 듣는다. 그는 과거 한경직 목사님의 “비디오 통신강좌” 의 나성 사무실 총책임자로 있던 분이기도 하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만나서 점심을 같이하며 선교회 사업을 논의하던 기쁨도 이제는 사라지고 지금은 그분을 밖에서 뵙지 못하고 전화로만 통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 밖에 영국에서 늘 좋은 말씀을 해 주시며 열심히 사역하시는 최찬영 목사님을 잊을 수 없고 또 성경 원어 학자이신 서울 진명교회 신학교 의 리종연 박사를 생각한다. 모두 좋으신 분들이다. 난서울교회를 섬기며 서울 건국대학교 교수이신 김 교수님도 선교를 통해 만난 좋은 분이다. 모두 개혁주의 신앙으로 성경대로 믿기를 원하는 신앙의 동지들이다. 이런 분들은 귀하다.  튤립 선교회를 통해서 이런 훌륭한 분들을 알게 해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한다.

창림 20년이면 웬만한 단체 같으면 성대히 잔치를 하며 모종의 event 가 있을 것이지만
우리 선교회는 그런 격식을 초월했다.  매일 매일을 마지막 날 인 것 처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다하면서 열심히 전도할 뿐이다.  내가 길러낸 제자들의 수가 상당히 많은데 오늘
그 제자 중 한 사람이 멀리 Colorado 주에서 꼬박 이틀을 걸려 자동차로 이곳에 와서 어느 Buffet 집에 가서 우리 세 식구에게 점심을 사주어서 실로 오랜만에 제자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도 학생시절엔 젊었었는데 이제는 많이 늙었다. 가는 세월을 누가 막겠는가?  주의 일을 하는 것 만이 세월을 보상받는 길이다.

선교회에서 앞으로 하고 실은 일들이 산처럼 많은데 아직 하나님이 길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 동역자도 필요하다. 월례 싱앙강좌, 월간 회지 발행, 튤립 신학 연구원 활성화, 방송전도, 어느 하나도 쉬운 것이 없다.  지금은 자원 봉사자들을 많이 보내주시며 모든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 지도록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뿐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기도를 간절히 부탁한다.        
                                       -선교회 탄생 20주년에 생각나는 사람들, 끝-
              

   글: 선교회 회장 김명도 교수 (2010년 10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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