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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굿윈

토마스 굿윈

by 김경호 진실 2010. 12. 9.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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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굿윈은 정부의 박해에 대한 청교도들의 저항으로 유명한 지역인 노포크의 야머스 인근의 롤스비에서 1600년 10월 5일에 태어났다. 이러한 지역적 기풍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의 부모인 리차드와 캐더린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아들을 목회자가 되도록 훈련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이에는 개인적 모범을 보이는 것 및 지역 학교들에 토마스를 보내어 최상의 고전 교육을 제공하고자 노력한 일들이 포함되었다.

어린 시절 굿윈은 여리고 부드러운 양심의 소유자였다. 이미 여섯 살 때부터 그는 성령에 대한 생생한 인상 및 체험 속에서 자신의 죄 때문에 통곡하였고 “하나님과 그분의 일에 대한 생각들로 인해 기쁨의 빛들을” 체험했다. 열세살 때 굿윈은 “청교도의 둥지”였던 케임브리지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때 윌리엄 퍼킨스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케임브리지에 강하게 남아있었다. “이스라엘을 달콤하게 떨어뜨리는 사람”(the sweet dropper of Israel)이었던 리차드 십스 또한 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트리니티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설교했는데, 덧없고 공상적인 수사학에 의존하는 설교보다는 참된 영적 교화를 주는 말씀을 열망했던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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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윈은 1616년에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학사를 받았고, 조기졸업을 하려는 목적으로 성캐더린의 홀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1620년에는 석사학위를 받고 펠로우와 강사직을 얻었다. 함께 일하던 펠로우들로는 존 애로우스미스, 윌리엄 스퍼스토우, 그리고 윌리엄

스트롱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후일 굿윈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같이 일했다. 이 청교도들 가운데 일부는 수사학과 알미니안주의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진리를 섬길 수 없다고 말하며 굿윈을 설득하려 했다. 게다가 굿윈은 십스의 설교 및 칼리지 예배에서 전해지는 존 프레스톤의 설교의 영향들로부터 도저히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청교도주의 및 신학에 대한 굿윈의 관심은 일년 정도 더 요동쳤고, 특히 주의 만찬을 받기 직전에 종종 떠오르곤 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굿윈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강도높고 심원한 각성을 가져다 주셨다. 그는 스무살 생일을 맞은 직후인 1620년 10월 2일에 회심했다. 그날 오후 그는 친구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냈다. 한편 친구들 중 한 명은 그들에게 함께 장례식에 참석하자고 권했다. 토마스 베인브릿지가 개인의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초점을 두고 있는 누가복음 19:41~42의 본문을 놓고 장례설교를 전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굿윈에게 그의 끔찍한 죄악들과 마음의 본질적인 타락상 및 모든 영적 선에 대한 반감,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굿윈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보여주시기 위해 그 설교를 사용하셨다. 몇 시간 후에 “우리가 회심한 이후에는 그토록 신실하시고 당신의 말씀에 충실하신 그 하나님 앞에서,” 굿윈은 에스겔서 16장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즉각적 말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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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이후 굿윈은 자신의 성향을 퍼킨스, 베인즈, 십스 및 프레스톤의 신학적 전통에 일치시켰다. 그는 향후 개인적 명성을 결코 추구하지 않는 것과 그대신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앞으로 찾아올 모든 시간을 사용할 때의 척도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국교회 신학자들이 선호하는 형식적으로 세련된 설교 스타일을 버렸는데, 이는 그런 행태는 오직 설교자에게만 주의를 끄는데 도움을 주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대신 그는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을 추구하는 청교도의 “간명한 설교 스타일”을 받아들였다. 굿윈의 설교는 진지하고 경험적이며 목회적이 되어갔다.

1620년부터 1627년까지 굿윈은 개인적인 믿음의 확신을 추구했다. 경건한 목회자인 프라이스 오브 킹스린(굿윈이 “만나본 사람 가운데 경험적 측면으로 가장 그리스도와 친밀한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한)과 서신 및 대화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으로 살고, 성화를 위해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생명과 힘 및 신앙을 통한 위로와 기쁨을 공급받아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후일 그는 이 영적 투쟁의 시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오직 내 안에서 은혜의 표지를 찾으며 수년간 그리스도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내가 다시 주의를 그분께로 돌려 믿음의 대상(the object of faith)인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값없는 사랑에 대한 신앙으로 살게 되기까지는 7년의 세월이 걸렸다.”

굿윈의 영혼은 결국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alone) 안식을 발견했다. 그의 설교는 점점 그리스도 중심적이 되어갔다. 그는 다음과 같은 십스의 조언에 동의할 수 있었다: “젊은이여, 선한 일을 통해 유익을 끼치려면 자네는 복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설교해야만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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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에 로드 주교가 탄핵된 이후 굿윈은 비국교도주의자들로 하여금 잉글랜드로 돌아올 것을 요청하는 의회의 초청에 응답했다. 1642년 4월 27일에 의회 앞에서 설교했으며 곧이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구성원으로 임명되었다. 회중교회주의자 모임 내에서 그의 위치가 계속해서 상승했기 때문에 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인 동시에 가장 큰 방해자”라고 불렸다. 총회의 243번에 걸치는 회기의 기록에 따르면 굿윈은 최다 연설자로서 무려 357회를 발언했다. 굿윈을 포함해 필립 나이, 시드락 심프슨, 윌리엄 브릿지, 그리고 제러마이어 버로우즈는 다섯 “비국교도 형제들”(Dissenting Brethren)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변증적 담화>(1644)를 통해 회중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총회에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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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가 정회된 이후 굿윈은 추가적인 임명을 받았다. 1649년에 굿윈과 조셉 카릴 및 에드워드 레이놀즈는 옥스퍼드대의 강사로 임명되었다. 1649년 6월 7일에는 굿윈과 존 오웬이 함께 국가적 감사를 위한 특별한 날에 하원에서 설교했다. 다음날에 하원은 두 사람을 옥스퍼드대의 각 칼리지의 학장으로 임명했다. 1650년에 굿윈은 옥스퍼드의 막달렌 칼리지의 학장이 되었고 오웬은 크라이스트 처치의 학장에 임명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간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크롬웰이 곧 총장으로서의 권력을 오웬이 중심이 된 위원회에 넘겼기 때문이다. 굿윈도 크롬웰의 가까운 조언자가 되었고 호국경이 지명한 옥스퍼드대의 위원이 되었다.

굿윈은 막달렌 칼리지를 성경의 진리와 경험적 칼빈주의 교리에 충실한 기관으로 만드는데 기여를 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같은 학문적 탁월함을 요구하는 동시에 그들의 영적 생활을 단순하고 단호하게 다루어, 청교도적 강조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파는 상점”을 운영한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그러나 클래런던 경이 후일 언급한대로 바로 이 기간이 “옥스퍼드대가 모든 학문 영역에 있어서 넘치는 비상한 유익과 바른 지식을 추수해내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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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8년 9월 3일 크롬웰이 죽기 전에 굿윈은 크롬웰로부터 회중교회주의자들의 총회를 개최하는 것에 대해 허락을 받았고 이에 관련된 신앙 고백서를 작성했다. 1658년 9월 29일에 굿윈, 오웬, 필립 나이, 윌리엄 브릿지, 조셉 카릴, 그리고 윌리엄 그린힐은 신앙과 질서에 관한 사보이 선언문을 내놓았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회중주의에 맞게 편집한 것으로서 약 120개의 회중주의적 독립 교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오웬은 이 선언문의 서두에 있는 매우 긴 서문을 작성한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며, 굿윈은 선언문 전체의 초안 작성에 책임을 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각 회중교회들의 대표들로부터 승인을 얻기 위해 그들에게 전달되었고 1658년 10월 12일에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10월 14일에 굿윈은 리차드 크롬웰에게 이 선언문을 전할 대표단을 이끌었다. 결국 이 문서는 영국 회중교회주의의 신앙고백적 표준이 되었다. 1680년 5월 12일에 보스톤의 미국 회중교회들은 이것에 미세한 변경을 가해서 자신들의 것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1660년 찰스 2세가 즉위하고 이에 따라 청교도의 권력이 사라짐에 따라 굿윈은 옥스퍼드를 떠나야 한다는 압박을 느꼈다. 그와 대부분의 회중교회 회중들은 런던으로 이주해서 새로운 교회를 시작했다. 사실상 영국의 종교적 상황에 대해 반대적인 확신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 즉위한 찰스 2세는 국교회체제로의 일치를 꾀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시행했다. 따라서 1662년에 2,000여명의 경건한 목회자들이 국교회로부터 추방되었다. 이미 회중교회에 속해있었고 정부와 관련되어 임명된 직위가 없던 굿윈은 국교회로부터의 추방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찰스 2세 치하에서 수년간의 핍박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설교했다. 아울러 대부분의 기성 교회의 목사들이 도시를 떠나게 만든 무시무시한 역병에도 불구하고 그는 런던의 회중과 함께 했다. 굿윈은 자신의 말년을 설교와 목회사역과 저술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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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윈의 작품들의 첫 모음집은 1681년부터 1704년 사이에 런던에서 존 오웬과 토마스 바론과 토마스 굿윈 주니어의 편집 하에 2절판 다섯권짜리로 출판되었다. 이의 축약판은 1847년부터 1850년 사이에 런던에서 네권짜리로 출간되었다.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이 열두권짜리 재인쇄 전집은 니콜의 청교도 신학자 재발간 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1861년부터 1866년 사이에 제임스 니콜이 재편집해 내어놓은 것이다. 이는 원래의 다섯권짜리 전집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하겠다.

굿윈은 육중하고 빈틈이 없는 철저한 주해를 시도한다. 그의 작품의 첫 편집자(1681)는 이렇게 평하고 있다: “그는 논점의 밑바닥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 철저히 연구해 파헤치는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스스로가 표현했듯이, 깊숙이 들어가 뚫고 나아가지 않은채 그저 피상적인 지식만 얻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에드문드 칼라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글을 살필 때 우리는 굿윈이 단순히 단어를 연구한 것이 아니라 (단어속의) 사물의 의미의 본질을 연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굿윈의 스타일은 간명하고 친숙하지만, 한편으로는 장황하고 세련되지 못한 측면이 있으며 다소 지루하다.” 우리는 굿윈의 작품을 읽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깊이와 지루함이 상반되게 존재하는 동시에, 그는 따뜻함과 경험적 측면의 놀라운 감각을 아울러 제공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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