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이 문제를 연구하는 동안 우연히 관상 기도라는 용어를 알게 됐다.
그 즉시 관상 기도가 뉴에이지 배경이 있다는 데 토를 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용어가 기도 중의 묵상을 뜻한다고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관상 기도가 실제로 무엇을 포함하는지를 다음 글이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관상 기도의 좀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면, 조만간 공, 빔, 무를 경험한다
심원한 신비의 침국
무념무상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황당하게도 나는 이 "신비한 침묵"이, 뉴에이지 수련자들이 침묵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똑같은 방법들, 즉 만트라와 호흡법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됐다!
관상 기도는 이성이 아니라 심령이 신을 관조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도의 말 혹은 거룩한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다.
관상 기도 교사와 선사인 윌리기스 제이거는 이렇게 주장하면서 이 점을 드러낸다.
단어의 뜻을 숙고하지 말라.
사고와 고찰을 그쳐야 한다.
모든 신비주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러 그 말을 고요히 "소리 내라."
모든 감정과 생각은 떨쳐 버리라.
이 주에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글 가운데 하나는 14세기, 무영의 저자가 쓴
"무지의 구름"이다.
이 책은 핵심을 따지자면 관상 기도로 초심자들을 이렇게 인도하는 책이다.
말을 적게 하라. 두 음절보다는 한 음절이 낫다
이 말로 망각의 구름 아래로 모든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이 말의 근거는, 진정으로 신을 알기 위해서는 신비주의를 연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은 가라앉아야 하고 꺼 버려야 한다.
그래야 신의 임재가 기다리고 있는 무지의 구름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수련하는 자들은 만약 그 거룩한 말들이 기독교적인 것이면,
수련자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고 믿는다.
방법이 신비주의 혹은 동야적인 수련론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일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안되는가?
왜 이런 신비주의 기도법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면 안 되는가?"
이 질문의 답은 사실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의 어떤 구절은 신비 경험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나온 신비주의를 인정한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정당한 신비 경험은 언제나 하나님이 일으키신다.
그것도 어떤 사람들에게 특정한 계시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결코 의식의 전환과 같은 방법에 의존하지 않았다.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부흥과개혁사, pp4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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