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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포스터 신비주의

리처드 포스터

by 김경호 진실 2011. 1. 5.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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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처드 포스터의 가르침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포스터의 관상 기도 권유에 초점을 맞추었다.

포스터는 신비주의적인 내재신론 신관으로 흐르는 수련을 부인할 수 없게 보증하고 있었다.

 

포스터는 관상 기도의 미덕과 유익에 대해 머튼을 당당하게 인용한다.

포스터는 관상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책 혹은 설교에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이해력과 빛을 주신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포스터가 관상적인 영성의 본보기라고 말하는 신비가들의 진술을 들어보자.

 

- 인류라는 가족의 심령은 성령이다.  : 바실 페닝턴

- 신이 온 세상 안에 계심을 안다.      : 노리치의 줄리안

- 내가 사랑하는 신은 높은 산, 완만한 계곡의 숲, 사람의 발질이 닿지 않은 무인도,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는 강물이다.   : 십자가의 요한

- 여기(관상 기도의 순간) 모든 것이 신이다.

   신은 어디에나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 귀용 부인

 

이 신비가들의 침묵이나 포스터의 침묵은 같은 것이다.

포스터 자신이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포스터는 이 신비가들을 본보기로 삼음으로써 우리에게 그들을 따르라고 말한다.

 

포스터가 권장하는 신비가들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신비 사상의 자식이 바로 내재신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주의는 위의 신비가들이 그랬듯이 사람들로 하여금

내재신론을 믿게 한다.

그리고 포스터는 이 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신비가들을 관상 기도의 수호자들로서 권한다는 것은,

포스터 자신 역시 알든 모르든, 신비가들의 내재신론을 보증한다는 뜻이다.

 

포스터가 침묵이라 하는 것은 외형적인 침묵이 아니다.

포스터는 저서 "기도"에서 호흡 기도를 권장한다.

단어 하나 혹은 짧은 문구를 택해서 호흡과 함께 반복하는 것이 호흡 기도다.

이것은 전형적인 관상적 신비주의다.

포스터는 1978년에 나온 "영적훈련과 성장" 초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분명하게 밝혔다.

"기독교 명상은 채우기 위해 마음을 비우는 시도다."

 

"기도"에서는 이처럼 충고한 한 신비가의 말을 인용한다.

"당신은 한 가지 생각에 마음을 묶어야 한다."

 

나는 한때 포스터의 호흡 기도를 지금은 기독교인이 된 전 뉴에이지 신봉자에게 연결했다.

이 사람은 이런 말로 내가 발견한 연관을 확인해 주었다.

"맞아요. 호흡 기도는 내가 아쉬탄가 요가를 할 때 썼던 방법이에요."

 

 

나는 포스터에게 다가가서 정중하게 물었다.

"오늘날의 가톨릭 관상 기도 운동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포스터는 이렇게 대답했다.

"일부는 좋고 일부는 나쁘다고 보여집니다."

그는 이렇게 강조하며 말했다.

"그렇지만 토머스 머튼은 하나님의 백성을 깨우려고 했습니다!"

이제야 포스터가 머튼의 신념에 깊이 공감하는 줄 알게 됐다.

 

머튼은 이런 견해를 피력한다.

"나는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다르다고 보지 않는다

나는 불교도만큼 선해지고자 한다."

 

왜 관상 기도 운동이 복음주의적인 교회에 잠재적인 위험이 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발언을 하는 머튼의 의도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머튼은 관상 기도에서 불교의 각성을 발견했다.

 

리처드 포스터는 머튼의 신비 기도에 대해 신선한 언어를 동원해 이렇게 쓰고 있다.

"토머스 머튼은 20세기 그 어떤 인물보다도 기도의 생활을 널리 알리고 이해시킨 인물이다."

포스터는 머튼의 책 "관상 기도"를 필독서로 꼽는다.

"머튼은 지금도 수많은 남녀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머튼의 책들이 "영적 생활에 더 깊이 들어가길 갈구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담고 있다고 극찬한다.

 

"동양으로 향한 그의 여정에서 불교의 잔에서 흠뻑 마신" 이란 표현은 바로

머튼을 두고 한 말이다.

 

왜 자타 공인의 뉴에이지 지지자들이 포스터의 책을 팔고 권하는가?

답은 분명하다.

포스터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에이이지 신봉자들은 자신이 하는 침묵 기도를 알아본다.

뉴에이지 지지자들은 침묵이 사람을 어디로 끌로 가는지 알고 있다.

 

포스터는 안타깝게도 성경이 인정하지 않는 전통에 이끌렸다.

관상 기도 수련의 정당성을 지지하기 위해 성경에 호소할 때 포스터가 뽑을 수 있는 구절은

시편 62편1절뿐이다.

이 구절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한 신성한 단어 혹은 호흡에 집중함으로써 생각을 뛰어넘게 된다는 암시는

결코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어떤 포스터 옹호자는 포스터가 기독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다메섹 길 위에서 경험한 바로 그것,

즉 하나님 임재의 직접적인 경험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라고 변호했다.

 

바울은 이 상황에서 어떤 수련 방법을 쓴 것이 아니다.

바울은 기도문 혹은 호흡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로 밀려 들어 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바울이 이 경험을 하기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본문에서 언급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바울은 여러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결코 어떤 수련 방법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바울은 다양한 영적 선물에 대해 말했지만,

이 선물은 가르칠 수 있는 일련의 기법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 선물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자에게 주신 것이다.

이 점에서 포스터는 성경에 나오는 신비한 요소를 필시 끄집어낼 것이다.

그러나 포스터는 성경으로 자신의 신비주의를 변호할 수 없다.

포스터가 다음과 같은 말로 청중을 가르치는 것은 유감천만하다.

 

하나님은 은혜를 받는 수단으로서 영적인 삶의 훈련을 우리에게 주셨다.

훈련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하고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변혁시키신다.

 

이 입장을 취하려 하는 이들에게 시름 섞인 솔로몬의 경고를 들려주고자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잠30:5-6)

 

사도 바울 또한 이렇게 적고 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 (행20:27).

이 구절을 배경으로 놓을 때, 바울이 교회에게 보낸 편지 어디에서든

침묵을 발견한 수 있다면, 나는 리처드 포스터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겠다.

나는 이 책의 초판에서 비슷한 도전을 했으나 지금까지 어떤 응답도 받지 못했다.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부흥과개혁사, pp117-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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