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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리차드 십스

리차드 십스

by 김경호 진실 2011. 5. 4.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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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리차드 십스-

예수 그리스도를 포도나무에 비유하고, 교회를 포도원에 비유하고, 그리스도인을 포도나무 줄기에 비유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비유입니다. 포도나무 줄기인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수분과 영양분을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니고 있는 감미로움이라는 것은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파생되는 감미로움입니다.

“저희는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1. 사사기 9장 9절과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포도나무는 과실을 많이 맺는 나무입니다. 감람나무와 포도나무는 자신들의 감미로움을 포기하고 왕이 될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과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써 사람과 하나님을 소생시킨다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점에서 포도나무와 같습니다.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은 의의 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심으신 나무입니다. 열매를 맺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 기울이는 포도나무입니다.

2. 또 포도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을 뿐 아니라 특별하게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정말 차고 넘칠 정도로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포도나무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열매 때문만이 아니라, 풍족하게 열매를 맺기 때문에도 포도나무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마땅한 대로 행하기만 하면, 주의 일에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가 될 것이라고 미리 말씀되어 있습니다.

3.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아는 대로 포도나무는 가지를 솎아 낸다고 해서 이전보다 못해지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가지를 치고 잘라 냅니다(요 15:2).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은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이전보다 더 악해지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가장 뛰어난 포도나무라 해도 전지 작업이 필요하고 손질이 필요한 법입니다. 가장 비옥한 땅이라 해도 경작이 필요한 법입니다. 가장 좋은 천이라 해도 세탁이 필요한 법입니다. 가장 좋은 광물이라 해도 불 속에 넣을 필요가 있는 법입니다.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실생활 속에서 사용하는 가장 탁월한 것들 속에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장 탁월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저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의 손질과 전지 작업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전보다 못하게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이전보다 더 좋아집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많은 부패함이 씻겨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에 전지 작업을 하면 포도나무가 이전보다 더 나빠지기는커녕 흐트러진 것들을 잘라 냄으로써 포도나무의 힘이 무익하게 소진되는 것을 방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통해서 이전보다 성숙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영광은 특별히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애굽에 있을 때 가장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애굽 사람들은 포도나무를 자르고 박멸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바로 그곳에서 교회는 역사상 가장 왕성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의 핍박을 인해 자신의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 원수들의 모든 악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동안보다 더 영광스러운 지위에 있어 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 다니엘이나 그 밖의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교회는 얼마나 영광스러웠습니까?

4. 또 겉모양을 볼 때 포도나무는 볼품이 없고 보기 흉한 나무입니다. 관상하기에 아름답거나 보기 좋은 나무가 아닙니다. 하지만 겉모양은 볼품이 없을지라도 열매는 풍성하게 맺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외적인 형세나 모양을 볼 때, 그것은 추하고 고난으로 인해 손상을 입었으며, 이 땅에서는 활기 없는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입니다(골 3:3). 이 세상에서 그들의 생명은 많은 고난과 시련, 연약함과 결점에 가려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와 같은 것들에 쉽게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태가 겉으로 볼 때는 아무런 풍채나 고운 모양이 없었지만, 내적으로는 모든 영광으로 충만했던 것처럼 교회의 아름다움 역시 그 내면에 있습니다. 외관상 보기에 교회는 포도나무와 같이 볼품이 전혀 없으며 구불구불하고 반듯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포도나무에는 사람이 좋아할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셈입니다. 오직 거기에 맺히는 열매만이 사람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나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경우가 마치 포도나무와 똑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경우 외적인 통치 체제에 있어서 다른 통치 체제가 가지고 있는 묘한 정책이나 외적인 영광을 소유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교회를 통치하는 하나님의 은밀한 내적 역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모든 묘한 정책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수치로부터 영광을 이끌어내시며,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이끌어 내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낮추게 하시고, 그 다음에 높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탁월한 역사를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사람을 겸비케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사용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나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서 보게 되는 외적인 초라함을 비난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들이 짓밟히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단지 포도나무와 같아서 볼품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그것은 숨기워져 있을 뿐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포도나무가 본래 어떤 것인지 아주 탁월하게 기록해 놓았습니다(겔 15:3). 포도나무 자체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그릇을 걸어 놓을 못 하나도 만들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부서지기 쉬운 나무라서, 열매를 맺는 것 말고는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을 한 사람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 사람이 있는 처소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모든 사람들 중에서 제일 못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람이든지 제일 못난 사람이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포도나무와 같이 열매를 맺는다면 비록 겉모양을 볼품이 없을지라도 가장 탁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불에 던지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의 입술에서 나오는 신앙 고백을 자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세례를 받았고, 설교를 듣고 있으며, 성경을 읽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도록 합시다. 여러분의 열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농부가 포도나무 가지를 손질하고 전지하는 것은 열매를 맺게 하고자 함이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의 열매는 어디에 있습니까? 만일 아무런 열매도 못 맺는다면, 그리스도인은 현존하는 사람들 중에 가장 못난 사람입니다. 가장 못났다고 말하는 것은 좋은 방편들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니까 하는 말입니다. 좋은 상황 가운데서 그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못난 사람이며, 그가 장차 겪을 고통은 더 클 것입니다. 은혜의 방편을 부족함 없이 누리면서도 황량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차라리 그런 은혜의 방편을 누리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가슴 치며 후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은혜의 방편을 누리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 사람들은 입이 있어도 핑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5.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포도나무는 얼마나 약한지 지지대를 사용해 지탱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락없이 땅에 쓰러져 버리고 맙니다. 교회의 상태가 바로 그와 똑같습니다. 교회는 자신을 지켜 줄 울타리를 늘 필요로 하고 자신을 받쳐 줄 지지대가 반드시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능력이십니다. 교회는 놀라울 정도로 연약한 나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놀라울 정도로 연약하며, 셀 수 없이 많은 비참함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또 그들에게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 상처와 연약함 때문에, 반드시 지원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기력이 없는 연약한 것들, 양, 어린 양, 비둘기에 비유합니다. 식물에 비유할 때는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라는 것도 강력한 도움을 늘 필요로 하는 식물입니다. 솔로몬은 사반에 대해서 말하면서 사반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잠 30:26)다고 말합니다. 사반은 포도나무처럼 연약한 존재이지만, 그들 머리 위에는 견고한 바위가 있고 그 아래서 그들은 안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비록 연약하다 할지라도 그들을 지탱해 주는 강한 도움이 늘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정장관과 목사직의 규례를 통해서, 특히 그의 성령을 통해서 그 백성들을 지켜 주시고 지원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이 왕성하게 커 가고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십니다.

적용 1.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들은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가 포도나무일진대 우리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우리에게서 생겨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틀림없는 사실인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열매를 맺도록 하심인데,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삶과 행실 속에서, 또 우리의 말과 몸가짐과 행동 가운데서 마땅히 맺어야 하는 과실을 맺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아직까지 우리 위에 내린 적이 결코 없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가기 전에 반드시 그 은혜의 이슬이 우리 가운데 내려야 하는데도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길가에 죽은 나무가 있어도 사람은 그냥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돌보는 과수원에 죽은 나무가 있으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방목장이나 놀고 있는 땅에 난 잡초는 그냥 놔둘지 몰라도, 정원에 난 잡초는 주저하지 않고 뽑아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정원에 심겨진 백합화요, 하나님의 과수원에 심겨진 포도나무라면, 우리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고 성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뽑아 버리실 것입니다. 모든 재앙 중에 가장 참혹한 재앙은, 은혜의 방편을 풍성하고 넘치게 누리지만, 그러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들입니다(마 11:21).

적용 2. 우리가 포도나무요 하나님의 포도나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다음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돌봐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포도나무가 심겨진 장소를 특별한 관심으로 돌보십니다. 우리는 은혜로운 사람들과 경건한 가정들을 수많이 보게 되는데, 이들은 그 삶이나 실천에 있어서 양심적으로 행동합니다. 그들을 볼 때 우리는 위대한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탁월한 포도나무들과 그들이 살고 있는 장소를 애지중지 돌보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합니다. 그늘과 보호가 그들에게서 떠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머무는 곳마다 그들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과실을 많이 맺는 포도나무마다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 65:8).

만일 그리스도인이 열매를 많이 맺고 더 열매를 맺고자 애쓴다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의 손길이 그를 건드리지도 못하게 금령을 내리십니다. ‘그는 내 포도나무이니 아무런 해도 끼치지 말라!’고 말입니다.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시 105:15). 사탄 자신과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포도나무에 해를 가하지 말라는 금령에 묶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혹 하나님의 포도나무가 사탄이나 피조물의 괴롭힘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은 결국 유익을 가져오게끔 되어 있습니다. 제정신 있는 사람이라면 포도나무를 잘라 내 버리려고 하는 사람을 과수원에 들어오도록 허락하겠습니까?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포도원에는 아직 어려서 자라나고 있는 포도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크고 위대한 포도나무들만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포도나무들도 마찬가지로 돌봐 주십니다. 그리스도는 어린양을 보살펴 주십니다.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양을 먹이라!”(요 21:15).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작은 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마 18:10). 성경의 또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사 42:3). 또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약속하십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

적용 3. 그 다음 적용은 연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리고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소중히 여기시는데, 어리고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낙심하는 것이 과연 옳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극히 적은 열매를 맺는다고 가정합시다. 아! 그렇다 할지라도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사 65:8)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나무인 것이 확실하다면, 낙심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포도나무라는 것은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것으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종류의 열매를 맺는가 하는 것으로도 증명됩니다. 만일 그 열매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으며 성령의 독특한 풍미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비록 그 양이 많지 않을지라도 그 나무는 분명히 포도나무요 가시나무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처음에 과실을 많이 맺지 못한다고 해서 낙심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여러 단계가 있고 여러 종류의 토양이 있으며 여러 수준의 나이가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씀드리는 까닭은 선하지만 낙심한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같지 않은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낙심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 분량의 은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정해진 것이 결코 아니며 진실한 은혜를 지니고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시고 즐거운 뜻에 따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도구로서 계획하신 바에 따라 알맞은 분량대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거나 교회에서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목적을 품고 계실 때, 그들의 소명에 합당하게 은혜로 준비시켜 주십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만큼 은혜를 많이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지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자기 자신의 은혜를 어떻게 나누어주셔야 하는지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결점 가운데 안주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인해서 탄식하고 그것들을 증오하며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한다면, 그러는 가운데 온전함에 이르고자 애쓴다면,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많은 결점은 우리 구원에 하등 해를 끼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점 속에서 당신의 능력을 더 온전히 드러내실 것입니다(고후 12:9).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많이 맺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참된 열매냐 하는 것입니다. 열매가 참된 열매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만일 진실한 은혜라면 반드시 싹이 틀 것이고 가지를 뻗을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언제까지나 그렇게 연약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성장에 대한 갈망과 갈증과 함께 성장하기 위한 노력과 진실함이 있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거니와 낙심하지 말도록 합시다. 비록 우리의 영적 성장이나 성숙이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을지라도 낙심하지 말도록 합시다. 그리스도인마다 각각 나름대로 분량이 있습니다.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더 멀리 나아가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며 은혜로 은혜에 이르러야 하지만 아주 작은 것에도 복이 있으며 그 작은 것을 잘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약속이 있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마 13:12).

그리스도께서는 교활한 여우가 어리고 작은 포도 열매를 해치지 않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길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인해서 낙심하고 낙심한 나머지 옛날 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이 절대 없도록 합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을 낚아채고 낙심시킬 목적으로 놓아진 유혹이나 함정이나 덫을 언제 그리고 어떻게 제거해야 하는지 제일 잘 아십니다. 위대한 포도나무 재배 기술자이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믿고 위임하도록 합시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좋은 방편들을 활용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 세상과 마귀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도록 내버려두어도, 하나님은 자신의 포도나무를 안전하게 지키실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연약하고 어린것일수록 하나님은 더 많은 돌봄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질문.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여부를 어떤 식으로 알 수 있습니까?

답변.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 기준을 시금석으로 삼으면 여러분의 죄가 용서받았는지 그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1) 죄사함을 받기 전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2) 죄사함을 받은 후에 일어나는 일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만일 여러분이 겸손하고 진실하게 죄를 고백한다면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그러므로 내가 죄 용서받았다는 것을 느낌으로 경험하든 그렇지 못하든 만일 내가 진심으로 철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죄를 고백했다면, 내 죄는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만일 죄 용서 받았다는 느낌을 우리가 손쉽게 경험하게 된다면 우리는 사탄의 유혹에 대해서 지나치게 자신만만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혜와 긍휼 가운데 우리가 그런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잠시 보류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심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우리 죄를 고백했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 죄를 사하셨다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만일, 내가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시인해 놓고서도 하나님께서 차용증서를 소각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죄를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틀림없이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면 그와 동시에 (죄에 반기를 들 수 있는) 능력도 그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마 9:2,6). 하나님께로 돌이킬 힘이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순종할 힘이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 영위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사람의 죄는 용서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항상 그를 앞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능력이 자신 안에 발휘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죄사함을 받았는지 그 여부에 대해서 의심을 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제해 주시고 용서 해 주시게 되면, 불의를 모두 제해 달라는 기도를 들으신 후에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양심에서 어느 정도 평안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도 어쩌면 양심의 평안을 많이 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않을 정도만큼의 평안은 틀림없이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다시 말해서 믿음으로 인해서 우리의 죄가 사면되었으니,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정도의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안에 있는 하나님을 감히 바라볼 수 있는 담대함이 어느 정도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차용증서가 소각되고 그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시금석입니다.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나, 아히도벨 같은 사람이나, 사울과 같은 사람은 그 마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정도의 담대함을 가지고 그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넷째로, 죄를 용서받으면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많이 넓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여인을 향해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눅 7:47).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뜨거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영혼 위에 빛나셨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죄사함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사랑의 분량에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죄사함의 확신을 더욱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더욱 불타오르도록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분노하시고 성이 나 있고 진노가 가라앉지 않은 하나님을 영혼이 사랑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니, 그런 경우에 오히려 영혼은 아예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이 사람의 경우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기 때문입니다.

다섯 번째로, 또 죄를 용서받으면, 그것은 그 사람을 적당하게, 즉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인자하고 용서를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대개의 경우 자기 자신의 양심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온화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한 사람들은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반면에 잔인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의 경우, 바로 그런 됨됨이가 그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인식으로 뜨거워지거나 녹아내린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고."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자비로운 태도를 취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지체요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를 용서받기 위하여 애쓰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의 권세를 제거하시고 굴복시키시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와 그에 따르는 모든 심판을 완전히 제하시도록 합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한 몸에 누리며 산다 해도, 우리는 단지 비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모든 쾌락을 한 몸에 누리며 사는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은 역적(逆賊)이 감옥 안에서 누리는 자유에 불과합니다. 비록 이 사람이 원하는 모든 것이 완벽한 서비스와 함께 하나도 빠짐없이 조달된다 해도, 그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면 그의 마음은 얼어붙게 되고 그의 용기는 꺾여집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밖에 있는 가장 미천한 짐마차의 마부나 맥주잔을 나르는 사람(tankard bearer)이 자신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그리고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처지를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신의 죄를 사면(赦免) 받지 못하고,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의 형편도 이와 똑같습니다. 자신의 죄가 하나님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자신을 대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무장시켜서 자신을 대적하여 복수를 감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상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위안도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영혼 사이에 있는 분쟁을 멈추지 않는다면(take up) 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인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죄사함을 확신하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경우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얻기까지 한 시간도 편안한 마음으로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의 삶은 불확실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지옥이나 파멸과 우리 사이에는 한 걸음 차이밖에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쉴 새 없이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렸을 때 지은 죄와 성인이 된 후에 지은 죄, 알고 지은 죄와 모르고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고, 무슨 죄든지 다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모든 불의를 제하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선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은혜의 언약 아래서 발휘되는 하나님의 긍휼과 타락하기 이전 아담에게 발휘된 바 있는 하나님의 긍휼은 너무나 현격한 차이가 나서 서로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타락하기 이전에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선을 베푸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사람을 선하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람에게 선을 베푸셨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타락하였고 지금의 형편과 같이 저주받은 상태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죄인에게 선을 베풀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습니다. 실로 이것은 모든 것을 이기는 선하심입니다. 가인은 저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 우리는 그렇게 말한 가인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질병을 다 고치시는 의사이십니다. 하나님은 진홍같이 붉은 죄라할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만드실 수 있습니다(사 1:18).

우리 안에 소원을 두시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즐거운 뜻을 따라 모든 일을 정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 안에서 비록 작은 능력을 발견하더라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받은 바 은혜의 양에 아주 만족해하는 사람은 분명히 온유한 심령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모습에 마냥 만족해하며 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실하게 노력해도 우리가 소망하는 만큼 성장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뒤떨어진다고 해도 우리의 위로를 위해 알아야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꺼져 가는 심지를 결코 끄지 아니하신다는 것과, 우리가 전에 말한 것처럼 성장을 향한 노력에 진실함과 성실함이 있다면 그것이 우리의 완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열왕기상 14:13에서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이는 여로보암의 집 가운데서 저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으니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모든 죄는 질병입니다.

모든 죄는 질병입니다. 모든 죄는 질병과 같이 점점 자라나 그 증세가 점점 심해집니다. 사도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딤후 3:13)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죄가 질병이라면 그것을 즉시 미리 예방하십시오. 우리가 보는 것처럼 이단자들과 그와 같은 사람들은 처음에도 물론 건전하지 않지만 가면 갈수록 구제불능의 상태로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만일 우리가 우리 영혼의 질병을 가볍게 여기고 방치해 둔다면, 그것은 은혜를 소멸시킬 것이요 쉽게 회개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은 악한 기질만을 영혼 안에 양산할 것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사람이 사악하고 패역한 길 가운데 오랫동안 머물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양심의 두려움 가운데 내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양심은 도무지 평안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를 힐책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까지 죄악 투성이요 사악한 피조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여러 번 거듭하여 긍휼을 베푸셨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 내가 은혜의 모든 수단에 저항하고 그것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은 자기들의 삶이 오랫동안 패역의 삶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과 자기들이 양심이 책망과 말씀과 성령의 견책을 패역한 생활로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는 것을 숙고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 사람이 평안을 찾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죄 가운데 오래 거하는 것은 당연히 그 치료를 어렵게 만듭니다. 설령 그것을 치료하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해서는 늘 단호하고 분명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나는 틀림없이 회개를 할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지금까지 해 오던 일을 계속할 것이다. 다 잘 될 것이다. 등등 이런 식으로 우물쭈물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마치 병든 사람이, 또는 아주 심각하게 상처를 입은 사람이 다 잘 될 것이다. 라고 말해 놓고는 의사를 부르지 않고 미적미적거리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자기 몸이 아파 죽게 되었는데도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물며 왜 우리 영혼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행동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완고함을 철저하게 깨뜨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우리 자신의 죄를 더욱더 심각한 것으로 부각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상처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죄를 찔러 상처입힌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 죄를 우리 목전에 나열하시고 우리를 증언대로 몰아쳐서 우리 죄를 우리 안에 깊이 확신시켜 주지 않으시면 이 모든 방침들은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확신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죄에 대한 확신은 우리 속에 참회하는 마음을 만들어 내고, 그 마음은 겸손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구석구석에 투명하고 강력한 빛을 비추어 주시고 그것과 함께 우리 마음을 겸손케 만드는 능력의 영을 부어 주시도록 갈망하십시오.

자신의 부패를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

전보다 부패한 모습을 더 많이 본다고 놀라지 마십시오. 어떤 사람들은 이전의 모습보다 더 많은 부패의 연기가 자기 자신들을 괴롭히기 시작하면 자기들의 상태가 이전보다 더 악화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부패의 모습이 이전보다 더 많이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패의 정도는 이전보다 훨씬 덜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를 더 많이 보면 볼수록 우리는 죄를 더 많이 혐오하게 되므로 결국 우리의 부패는 덜하게 됩니다.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둘 사이의 갈등은 더욱 심해집니다. 육체와 영혼은 서로 가장 가까이에 붙어 있습니다. 은혜가 더할수록 영적인 생명도 풍성해지고 영적인 생명이 풍성해 질수록 반대되는 것에 대한 적대감도 강해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패를 가장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생기 있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육체적 방종에 자신을 방임할 경우, 그는 자신의 부패 때문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무 것에도 매여 있지 않고 아무 것에도 구속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순서는 먼저 상처를 입히고, 그 다음 그 상처를 치료하시는 것이다. 시험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시험받으셨다는 것을 생각하라. 내가 당하는 시험에 따라서 은혜와 위로가 나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와 사탄이 우리에게 입힌 모든 상처들을 회복시키신다. 그분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신다. 마치 어머니가 가장 병약한 자녀를 보다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가장 약한 자에게 가장 자비롭게 마음을 기울이신다.

진실로 상함을 입은 영혼을 죄를 가장 사악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하나님의 호의를 가장 선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시고 우리 자신을 상처 입히실 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연합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낮추실 때 우리도 우리 자신을 낮추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상처를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들의 죄로 찔러 상처 입힌 그분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강철처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인 우리를 향해 베풀어 주시는 성실하심의 한 부분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거룩한 절망이야말로 진실한 소망을 품게 하는 토대가 된다. 그리스도의 양떼는 연약하고 늘 이것저것이 부족한 양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양떼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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