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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중의 기적 (리차드 십스)

리차드 십스

by 김경호 진실 2011. 5. 4. 09:11

본문

기적 중의 기적 (리차드 십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많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당시 유대인들은 시리아 왕인 르신과 북이 이스라엘 왕인 베가에게 성이 포위되어 큰 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선지자는 백성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두 왕은 혼자서 타다가 꺼져 버릴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 "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는 놀라서 떨고 있는 왕과 백성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하여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한 징조를 구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나이다." 하고 거절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고집불통의 완고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대항하는 종교를 만들어 냈습니다.
즉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제단이 너무나 소박하고 촌스럽게 여겨져서 그것을 무시하고 다메섹에서 보았던 그런 제단을 새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과 계획을 숭배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집을 피우면 서도 왕은 몹시 두려됐습니다. 왕과 백성들의 마음은 적들 앞에서 마치 '숲 속의 나뭇잎처럼' 흔들리고 떨리며 전율하였습니다. 또 왕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그의 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그 또한 하나님의 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를 그냥 내버려 두셨기 때문에 그는 계속 악한 길로 갔으며 자신처럼 악한 왕들과 동맹 관계를 맺어 친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악한 왕으로부터 위기 앞에서 가장 적게 두려워하는 사람은 위기 속에서 가장 비겁하게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위험이 아직 미치지 않았을 때에 그는 너무나 완고하고 자신만만했지만, 막상 위험이 닥쳤을 때는 마치 '숲 속의 나뭇잎'과도 같이 떨며 두려워했습니다. 악한 사람은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께 아무런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미혹하는 영에 더욱 이끌려서 마귀와 자신의 방법들을 더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왕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적인 시리아의 왕을 더 신뢰하였으며 마침내는 자신을 가장 신뢰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방법들, 이러저러한 세상의 도움들, 즉 하나님보다는 마귀와 거짓을 더 신뢰하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지지 못한 혈과 육 의 본성입니다.

선지자는 아하스에게 이 왕들이 결코 주의 교회를 해칠 수 없다는 확신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징조를 구하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왕이 징조 구하기를 거절하자, 선지자는 거룩한 분노 속에서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게 하려느냐?" 즉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징조를 주시지만, 그들은 그의 복된 은혜를 싫어하고 무시한다는 책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징조를 주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과 인간의 굽힐 줄 모르는 완고함 사이에서 일어 나는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 이 인간의 악함과 맞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징 조를 구하려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들에게 징조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의 악한 계교와 싸워 이기실 것입니다. 그의 자비하심은 인간의 사악함을 능가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봅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것이 그 당시에 꼭 들어맞는 징조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적인 은혜의 약속으로서 선지자가 그 말을 한 지 약 800 년 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바로 기적 중의 기적, 은혜 중의 은혜 그리고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입니다. 장차 올 은혜는 현재의 고난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징조가 고난의 때에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처녀가 잉태하여

우리는 요한계시록 13장 8절 말씀처럼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모두 메시야가 오셔서 그들에게 완전한 위로를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그리고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리스도가 주시는 위로를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에 오시기 전부터 선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메시야가 올 것이란 약속은 모든 약속 가운데 가장 큰 약속입니다. 그리고 모든 약속들의 근원이 되는 약속입니다. 모든 약속들은 교회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의 약속이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약속이든 그리스도를 위한 약속이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약속을 받아 그것을 우리에게 전해 주며, 또한 우리에게 유익이 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것을 이행하실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어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않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 되게 하시고 육신이 되게 하셨다면, 그가 그보다 작은 약속들과 복 또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말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장차 이루어질 것인데 지금 그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어떻게 그 약속이 깨뜨려지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가 육신을 입으시는 것과 관련해서는 장차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이전부터 그의 교회와 언제나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으면서 그분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언약의 천사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 영적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그들보다 앞서 가신 굳건한 반석임을 이미 깨닫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37장 30절의 “제2년에는 또 거기서 난 것을 먹을 것이요”라는 말씀에 나타나듯이 성경에서 장차 있을 일에 대한 징조를 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믿음은 장차 이루어질 일을 마치 지금의 일처럼 여기게 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우리들의 하찮은 일들과 작은 필요들까지도 모두 위로하고 살피시겠다는 그리스도의 큰 약속으로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실한 사도가 “하나님께서 독생자까지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어 주셨다.”고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더 큰 것도 주시고,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을 위해 여러분들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것들은 이미 약속받은 여러 가지 큰 복들로부터 충분히 추론될 수 있는 축복들입니다. 우리의 육체를 땅에서, 무덤 속에서 일으켜 세울 하나님이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또한 우리를 구하실 수 없겠습니까? 그가 그의 교회를 고통 가운데서 구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이 죽음의 선고를 받았던 나 또한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만약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과 장차 이루어질 큰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성도들은 ‘장차 이루어질’ 그리스도의 위대한 약속을 통해서 모든 고난의 때마다 위로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메시야가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고 죽음당한 그는 우리의 믿음을 더 굳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아무리 작은 일 속에서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의 말은 더욱 특별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 구절에 대한 많은 글들이 있습니다.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잉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의 탄생” 등등.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생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알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그리스도의 직임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본질상 우리와 함께 계시며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그의 직임에 의해서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 나타난 신성의 여러 가지특성들을 알게 됩니다.

“보라”는 말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 우리의 주의를 모으고자 할 때 항상 서두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여기서 삼중의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신앙의 눈에만 보이는 일들을 “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약속과 성취 사이의 모든 간격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이루어지지 않은 때와 이루어질 때를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 말은 주의를 집중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확신에 찬 일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셋째, 주의를 집중할 뿐만 아니라 찬양의 의미를 나타내 줍니다. 기이하고 경탄스러운 일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처녀가 잉태해야만 하며, 처녀가 어머니가 되어야 하며,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신기한 일들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초이성적이고 초본성적인 적절한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성은 이 일을 비웃습니다. 마귀는 이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시기합니다. 천사들도 이 사실을 알고 놀랍니다. 영혼 스스로도 그 일들을 찬양할 수 있는 적절한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왜 하필이면 처녀일까요? 하나님이 세상에 태어나야 한다면 처녀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 적절합니다. 그리스도는 일반적인 잉태의 방법으로 세상에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담의 후손으로 오셨지만 아담에게서 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거룩하게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위해 바쳐지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흠과 티가 없어야 했고, 스스로의 죄도 없어야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순결한 삶과 말씀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뿌리가 없이도 싹이 났던 아론의 지팡이를 통해 예표로 나타났습니다. 마른 막대기에서는 어떤 수액도 생겨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지팡이에서 싹이 나게 하셨습니다.
처녀 마리아는 몸을 제공하였지만, 지혜로운 창조자는 성령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지 수납자일 뿐이었고 성령이 행위자였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동정녀가 그리스도를 잉태하였을지라도 그리스도가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역시 잉태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잉태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입었던 은혜는 전혀 없었으며 그들의 마음속에서도 역시 그리스도를 잉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역시 어느 정도는 동정녀의 마음, 정결한 마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의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주의 약속을 기뻐할 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에 살아 계실 것입니다. "언제 그리스도가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살아 계십니까?”라고 여러분이 질문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부어주시며, 영원한 삶의 특권과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그 은혜로운 약속을 우리의 마음이 겸손하고 기쁘게 받아들이는 바로 그 때, 그리스도는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고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가 탄생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겸손하고 믿음 있는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잉태할 수를 있는 마음은 겸손하고 믿음 있는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겸손한 마음은 매사에 자기를 부인하는 마음입니다. 믿음 있는 마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약속을 의지하는 겸손함과 믿음을 주실 때,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서 잉태될 것입니다.

본문은 이제 그리스도의 잉태 뿐 아니라 탄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셨으니 경건의 비밀이 크다고 찬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모든 고통들을 우리와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처럼 잉태되었고, 여러 달 동안 태에 머무르셨으며, 우리들이 태어난 것처럼 태어나셔서 우리들처럼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모든 고통들을 우리와 함께 지고 가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처럼 잉태되었고, 여러 달 동안 태에 머무르셨으며, 우리들이 태어난 것처럼 태어나셔서 우리들처럼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우리들과 똑같이 잉태되고 출생하고, 젖을 먹고,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우리들과 같이 굶주리고 목마르고 고난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를 잉태해야 하고 우리의 말과 행위 속에서 그를 나타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 속에 계셔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 속에 계셔야만 하며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우리의 외면적인 삶 가운데서도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외면적인 모든 삶은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말했듯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들이 행동 속에서 나타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우리의 영혼 속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가 행동하시는 것처럼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단지 유추된 진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동일한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아음에 자신의 인을 치실 것입니다. 그가 신성과 인성을 결합하여 가진 것은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의 근원이 됩니다. 마치 우리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묶어 주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모든 은혜를 주시는 근거가 되듯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와 아무 상관도 없는 자들입니다.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히브리어에서는 이름이 존재를 나타내 줍니다. 유사 구절이 이사야 9장 6절에 나옵니다."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즉 그는 그렇게 믿어질 것이며, 자신이 그러함을 보여줄 것이며, 또한 참으로 그러할 것입니다. 이 유사구절은 예수가 '임마누엘'로 불리지 않았다고 반대 주장을 펴는 유대인들의 비방에 좋은 해답이 되고 있습니다. "유다는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은 안전히 거할 것이라. 이것이 그의 이름이니 그는 의의 왕으로 불릴 것이라'(렘 33:16). 그는 참으로 여호와 우리의 의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를 얻지 못합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여러 차례 동일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이 가장 중요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나머지 다른 구절들을 대신하여 이 두 구절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외에도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직분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임마누엘은 본성과 직분 모두에 다 해당되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면서 사람이라는 그의 본성,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그의 직분에 관계된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람' 이 되지 않고는 우리도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타락 전에는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나, 관계가 깨어져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까지는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임마누엘' 이십니다. 우선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 속에 계시다'는 의미의 본성에 관계된 점에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과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은 타락 이후 언제나 낮선 관계 속에 있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귀를 제외한다면 인간의 거룩하지 못함과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보다 더 심각할 정도로 낯선 관계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전에는 그토록 심각하게 대립되었던 인간과 하나님의 본성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 이라는 이 한 단어 속에는 하늘과 땅이 있고, 인간과 하나님이 있으며, 무한과 유한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보라'라는 서두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된 구원자

세상의 참된 구원자는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구원자에게서 받는 유익의 분량과, 구원자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지려 하는 악의 분량을 고려한다면, 이둘 모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 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할 것입니다.
첫째, 그가 하나님과 사람을 하나되게 하셨으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들이고 우리 죄로 인해 당연히 처벌받는 그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천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시고 우리를 그 곳으로 데려가셔야만 합니다. 하나님 외에 누가 이런 일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비참함,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은 어느 곳에서냐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악과 관련해서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까? 그는 우리 대적자들의 한가운데서 우리들을 위해 변호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은 대적자나 죄, 하나님의 진노, 그리고 우리와 하늘 사이에 있는 모든 방해자들보다 훨씬 높으신 분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외에 누구겠습니까? 선이나 악, 그리고 영원한 행복의 상태를 보존하고 영원한 악으로부터 자유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이어야만 합니다. 이 위대한 원리들을 여기서 살펴봅시다.

둘째, 그가 하나님이어야만 되는 것처럼 그는 인간이 될 필요도 있습니다. 사람은 죄에 빠져 있고,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며,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도 없습니다"(히 9:22). 그래서 그는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히 2:17)이 되어 그가 구원하려 하는 그 인간의 본성을 취하셔야만 했습니다. 또 적응과 공감이 필요했습니다. 적응은 머리와 몸이, 거룩하게 된 자와 거룩하게 한 자가 모두 하나의 본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공감은 그가 인간의 연약함에 접촉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의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각각 다른 인격을 가진 두 인격이라면 두 그리스도가 있게 되며 한 인격은 다른 인격과 전혀 교통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으로서의 두 본성에 의하여 구원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난받아야 했고, 그것을 이기셔야 했으며, 고난을 충족시키셔야 했습니다. 그는 우리 기도를 들으실 뿐 아니라 응답해 주십니다. 두 본성은 모든 중보 사역의 요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으시고 고난 당하셨으며 인성을 견디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젊어지고 진노 속으로 침몰하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이 모든 행동들 속에는 신성과 인성이 동시에 깃들여 있었습니다. 보다 작은 일들은 인성에 의해서 행하여졌고, 보다 큰 일들은 신성에 의해서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인 '임마누엘'로 만들기 위해서 행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거룩에 합당한 방법과 그의 거룩을 충족시키는 방법으로써 천국에 데려가야만 했습니다.

사도가 에베소서 3장 12절에서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도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신인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하나님과 사람을 화해시키려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임마누엘이 없이는 하나님의 순결한 본성과 인간의 오염된 본성이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신인이신 그분이 없이는 그 간격을 어떻게 채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하지만 죄는 없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성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본성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하고 하나님 또한 우리 안에서 분노하십니다. 우리는 차라리 하나님이 없기를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오히려 마귀에게 복종하며 그의 영에 이끌려 모든 신성모독과 음란함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에든지 대항하여 스스로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께 대항하여 스스로 높아지는 것을 당연히 여겼고, 교만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임마누엘로 믿자 하나님의 공의는 단번에 충족되었고,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화목하게 되어, 믿는 자들의 마음속에서 아버지가 되셨습니다(고후 5:18).
그리고 우리는 그의 아들로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더욱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의 순결한 본성처럼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성령에 의해 온전해지고 정결하게 될 때까지 더욱더 친밀해질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에,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를 친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노를 젊어지시고 그것을 충족시키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를 친밀하게 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다음은 성령을 통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우리 마음속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와 교제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많은 것들이 이야기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과 위로에 대해서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것은 기이한 일이어서 천사들이나 천사들보다 더 큰 존재들이라 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와 동일하게 되신 것은 하나님의 너무나 놀라운 사랑과 자비, 그리고 자아 겸비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평케 하기 위하여 그 외 독생자를 주심으로써 우리와 하나가 되신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놀라운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외아들이 인간의 본성을 입으신 것은 또한 놀라운 겸손과 비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천사들보다도 더 높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않으셨으므로 천사들은 하나님의 신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신부들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며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그는 신랑이며 우리는 신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합당한 일로 생각하며 찬양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써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은 그를 에워싸지는 못하고 단지 외칠 뿐이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3). 하나님과 우리가 화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속한 모든 피조물들 또한 그 평화를 누렸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찬양할 만한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그 일을 다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천국에서 역시 그 일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를 넘어서는 어떤 일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을 믿음으로써 이해하도록 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그 일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의 인성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또한 그의 사랑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겠습니까? 즉,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롬 8:31). 이제 우리는 모든 대적자들을 향하여 거룩한 태도로 비웃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교회나 우리 자신이 어떤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이 임마누엘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교회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대적자들, 지옥, 세상, 그리고 사단과 같은 요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계시므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사야 선지자가 8장 7~8절에서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라고 교회를 위로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 위로로써 위로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는 임마누엘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가진 개인적인 고통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은 자비로운 구원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은 고통없이 인성을 입으시지 않으시고 우리의 가난과 비참한 본성을 취하셨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을 겪으셨으며,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고난당하셨으며, 핍박받는 자들과 함께 핍박받으셨습니다. 또 그는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는 인간의 삶에 깃든 모든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그는 우리들처럼 잉태되었고 출생되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삶을 사셨으므로 우리의 가난, 우리의 압박, 우리의 비천함, 또 하나님과 원수된 상태, 양심의 고통, 사단으로부터 받는 시험을 긍휼히 여기며 책망하실 수 있습니다. 그 또한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사단에게 시험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모든 위로 가운데서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임마누엘의 위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맞이하게 될 그 죽음의 시간에도 임마누엘을 기억합시다. 야곱이 애굽으로 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쌔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했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 46: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하셨으며 가나안에 장사되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무덤 속에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임마누엘이 거기서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무덤 속에 들어가실 것이며 우리를 다시 티끌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므로 죽음과 죄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진노와 그 밖의 모든 것을 이기셔서 언제나 복된 분이시며, 모든 것들에 대하여 승리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롬 8:35).

그는 우리의 본성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언제나 우리를 위해서 계시는 분입니다. 그는 우리가 모일 때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입니다."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그는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특별히 우리가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 우리를 넉넉히 위로해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그와 함께 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임마누엘로부터 조금이라도 위로 받은 사람이 라면 그는 성령을 경험한 사람이며 그분께 더욱더 가까이 가고자 소원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으로서 나의 임마누엘임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의 인성을 거룩케 하신 성령에 의해서라면 저는 그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고자하며 더욱더 그와 같이 되고자 소원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만약 그의 편에 서 있다면, 사람과 소망과 이해 속에서 내가 그와 가까이 있다면, 내가 교회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 내적으로 더욱더 그와 함께 있고 그와 같이 되고자 한다면, 외적으로도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의 편에 서며 그의 선한 일들을 한다면, 이것은 내가 그를 즐거워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사랑과 관심과 믿음과 우리의 모든 속사람 속에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함께 일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임마누엘이 그로 인하여 우리를 신뢰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와 그의 교회를 위하여 언제나 선한 말을 하게 하며, 우리가 그를 무시할 때 책망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메로스를 저주하라 ‥‥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삿 5:23).
하나님은 우리가 열왕기하 4장 32절에서 여호수아가 "누가 나의 편에 서겠는가? 누가?”라 외쳤던 것처럼 우리가 그의 편에 서는지,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지 우리에게 기대를 두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고, 아무런 증거도 하지 않는다면, 기도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할 때나 우리를 대적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지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언제 갑자기 질병이나, 연약함이나, 위험이 닥쳐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임마누엘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그는 우리들을 그가 계신 곳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천국을 버려두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죽음의 날이 이를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곳에서 내려오셨으며 이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하는 안식과 영광의 장소인 천국으로 가고 있음을 생각합시다. 우리는 영원히 그와 함께 교통하기를 소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혜의 장소인 이 땅과 영광의 장소인 그 곳에서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고난 당하신 그분에게로 나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가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빌 1:23)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있게 하소서”(요 17:24).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믿는 자는 모두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오실 때 계셨던 그곳에 있데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이 사실을 간직하시고, 여러분도 그러한 은혜들을 누리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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