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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은 왜 필요한가? -스테반 차르녹-

스테판 차녹

by 김경호 진실 2011. 5. 5. 09:37

본문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 (롬8:8)

 

주장 1. 구원에 이르는 상태와 지옥에 떨어질 상태가 있다.

영혼의 상태는 오직 두 가지뿐이다. 한 가지는 구원에 이를 상태요, 다른 한 가지는 지옥에 떨어질 상태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어느 한 가지 상태에 속하게 되어 있다.

성경은 육에 속한 사람들이 있고 성령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롬 8 : 8) 또한 육체를 따라 행하는 사람들이 있고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한다.(롬 8 : 13) 돼지처럼 죄 속에 뒹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 탁월하고 고결한 대상에 영혼의 즐거움을 두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에는 그 밖의 다른 상태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다. 성경은 전자(육에 속한 사람, 육체를 따라 행하는 자)를 가리켜 어두움이라고 부르고 후자(성령에 속한 사람,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사람)를 일컬어 빛이라고 부른다.(엡 5 : 8)

 

부패한 본성 속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은 아무리 고결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반대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것이다.(롬 8 : 8)

 

주장 2. 아담 안에서 죽었기에 다시 태어남이 필요하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 어떤 계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행위언약) 아담 안에서 인류가 범죄했다고 말하는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 계약(행위 언약)때문에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원죄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영혼의 상태는 중립 상태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며 또한 인간의 영혼은 백지 상태로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은 죄로 오염된 상태로 태어난다. 그러하기에 양질의 교육을 받아도 사람 속에 있는 부패함은 근절되지 않는 것이다.(시 58 : 3)

 

⑴ 선악의 분별도, 선을 행할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성경은 인간의 본성의 상태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한다.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엡 4 : 22) 여기에서 '유혹의' 라는 말은 - 악을 선이라고 나타냄으로써 우리를 속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하고 우리를 영원한 파멸로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이라는 말은 우리의 의지가 부패했다는 것을 증거한다. 왜냐하면 욕심에 이끌린다는 것은 의지가 부패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꾸 엉뚱한 시간을 가리키는 고장난 시계와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가운데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모든 기능들이 이렇게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하기에 인간은 더 나은 기초에 근거해서 다시 만들어지고 새롭게 창조되어야만 하는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⑵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음을 받았지 육체를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교활한 본성과 마귀적인 습성이 우리 안에 계속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오직 중생만이 자연적 출생으로 태어난 인간의 난폭성을 제거할 수 있다.

 

⑶ 선을 행할 수도 없는 무능력한 상태로 전락했다.

생명이 없는 사람은 움직일 수 없다. 또 건강하지도 않고 기력도 없는 사람은 맹렬하게 활동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를 결핍한 인간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 수 없다.

 

주장 3. 중생은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중생이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모르신다. 그러므로 영혼 안에서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중생은 동일한 한 성령께서 모든 사람들 가운데 활동하시는 것이다.(롬 8 : 9) 그러므로 중생한 사람들 안에는 동일한 기질이 발견된다.(의에 주리고 목마름, 애통함, 상한 심령,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 하나님과의 평화와 하나님의 평화를 구함)

 

자아와 우리 자신의 이성과 우리 자신의 의지를 세워 놓고 그것들 앞에 절하고 그것들을 섬기는 것은 감각 없는 형상을 세워 놓고 그 앞에 절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운 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형상을 숭배하는 것보다 더 사악한 우상숭배이다. 만일 모든 우상 숭배가 금지되었다면 외면적인 우상 숭배는 말할 것도 없고 내면적인 우상 숭배도 똑같이 금지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자아를 앞세우는 것이 부패한(거듭나지 못한) 본성의 핵심적인 요소라는 것이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우리 자신을 우리의 신(하나님)으로 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타락한 아담의 부패한 본성을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그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본성을 반드시 구비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본성이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서야 어찌 동행하겠으며"(암 3 : 3) 이런 연유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의 할례에 대해서(신 10 : 16) 줄기차게 말씀하신 것이다. 오직 마음에 할례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며(롬 2 : 29)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불결함에서 변화를 받지 않은 채로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주장 4. 중생 없는 자에게 행복을 주시겠는가 ?

창조 직후 인간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특권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는 지금의 그런 부적합함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중생(다시 태어나는)하는 것이다.

 

⑴거룩하신 분이 불결한 피조물과 교제하시겠는가 ?

하나님께서 거룩함을 갖추지 못한 어떤 사람을 천국시민으로 받아들이시고 그 사람과 친밀한 방식으로 풍성한 교제를 나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춰볼 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 : 7)

서로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는 두 개체 사이에 우호적인 교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어느 한 쪽이 변하여 상대편과 같아지지 않는 한 말이다. 늑대와 양, 어둠과 빛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본성이 바뀐다는 것은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약 1 : 17) 그러므로 인간의 편에서 변화가 일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⑵지혜로우신 분이 마귀의 자녀를 사랑하시겠는가 ?

거듭나지 않고도 하나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리라는 헛된 소망을 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겠다. 우리는 반드시 거룩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주장 5.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의 중생 때문이다.

중생에 관한 교리는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와 선생으로서 이 세상에 널리 반포해야 했던 여러 가지 핵심적인 교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가지였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 사이에 특징적인 차이점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도대체 무슨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무슨 영광을 받으실 수 있었겠는가 ?

 

⑴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함이다.

지옥의 원인이 되는 죄로부터 구원해 내시고 또한 죄의 결과가 되는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신다고 할 때, 그것이 죄책(심판과 멸망)에서만 구원하시는 것이고 죄악 된 본성은 그대로 남겨 두시는 것이겠는가 ?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반쪽 구원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극히 위대하신 구주께 결코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계획은 우리를 임박한 진노로부터 건져내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 진노를 초래하는 궁극적인 원인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그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딛 2 : 14)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처리하실 때 반드시 죄악 된 본성도 동시에 제거하신다.

 

⑵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다. (요일 3 : 8)

마귀의 일은 두 가지인데,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발생하는 비참이다. 그런데 만일 죄악 된 본성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마귀의 일은 완전하게 파괴되지 않은 것이다.

 

⑶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벧전 3 : 18)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방하신 원인이었던 우리의 부패함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인가 ?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에 적합한 옷을 입혀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신다. 또한 만일 그리스도께서 피조물의 본성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고 피조물 안에 있던 하나님을 향한 죄의 오염을 그대로 방치한 채로 그 피조물을 하나님께 인도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결과를 흡족하게 여기실 수 있겠는가 ?

 

주장 6. 중생이 필수적임을 알리시려고 성령께서 일하신다.

성령께서 임하신 목적은 중생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표명하시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기록하는 것이다.(딛 3 : 5, 살후 2 : 13)

만일 아버지 하나님과 어울리는 원리가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자녀다운 기질이 우리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

하나님과 하나님 경배하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는 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 마음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

또한 성령께서 우리의 본성이 변화되지 않고 있다면 우리 속에 어떻게 거하실 수 있겠는가 ? (고전 6 : 19)

 

주장 7. 중생은 영혼의 모든 지체에 필요하다.

영혼의 모든 기능은 한결같이 죄로 오염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혼의 모든 기능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 회복되어야만 한다. 인간의 상태는 시계의 핀 하나가 고장난 수준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부분에 죄와 사탄이 짓밟고 간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딛 1 : 15)

 

주장 8. 중생의 절대적 필요는 우둔한 자도 깨닫는다.

사람의 지복(至福)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적인 이성도 우리가 지순(至純)한 왕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어떻게든 반드시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철학자 플라톤 - "원래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신적인 원리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말되었다. 그런데 신은 다시금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신적인 본성을 가진 영혼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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