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규 (2007.06.17) http://kmcmi.org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성경은 믿는 자의 마지막 종착지가 새 하늘과 새 땅인 반면에 불신자는 영원 지옥이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중생한 성도가 믿음을 잃고 지옥에 떨어질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중생한 사람도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있을까?’ 혹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을까?’라는 형태로 바꿀 수도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에서 다룹니다.
먼저 요한복음 10:28-29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는 성도가 얻은 구원을 4중으로 보장합니다. 중생한 성도는 믿음을 잃고 지옥에 떨어질 수 없고, 중생한 사람은 궁극적으로 타락할 수 없고, 구원은 취소될 수 없다고 철저하게 못 박습니다.
좀 더 세밀하게 살펴봅시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영생’은 그 단어 자체가 이미 중단 없이 영원히 지속됨을 의미합니다. 도중에 갑자기 사라질 생명이라면 영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는 말씀은 표현 형태만 부정문으로 바뀌었을 뿐 내용은 영생을 주신다는 긍정문 표현과 똑같아서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셋째로 영생을 얻은 자를 주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고, 넷째로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가 없다고 확정합니다.
이 말씀은 성도의 영생을 빼앗으려는 대적자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누가복음 11:21절은 그 존재를 “강한 자”에 비유했습니다. 실제로 마귀는 여러 상황 속에서 성도들을 죄에 빠지도록 유혹합니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를 넘어뜨립니다(고전 10:12). 그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던 다윗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간음죄와 살인죄에 빠졌습니다. 일단 성도가 죄에 빠지면 마귀는 회개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막습니다. 조롱도 하고 송사도 하고 절망을 심어서,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성도는 강한 죄의 세력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창 4:7).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더 강한 자”(22)이며,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선언하신 분입니다. 그분께서 성도를 은혜로 붙들고 계심이 세 번째 구원의 보장입니다. 그래서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는 못합니다(롬 6:14). 잠시 혹은 장기간 동안 죄의 세력에 눌리기도 하지만 더 강한 자 되시는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고후 2:14) 하십니다. 대적자는 다윗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국 다윗을 회개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다윗으로 하여금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롬 4:7-8)며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죄에 빠진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자라면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십니다(요 6:39).
예수님만이 아니라 전능하신 아버지께서도 그 손으로 성도를 보호하신다는 것이 네 번째 구원의 보장입니다. 베드로전서 1:5절은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확신 속에서 담대하게 외쳤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이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면 선택 받은 그의 구원은 끝까지 안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택한 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면 구원하는 도중에 실패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죄 사함의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자들을 송사할 수 없습니다(롬 8:33-34). 또한 믿음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인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믿음은 상실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고 말합니다.
성도의 견인을 불확실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는 말씀과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5-6)는 말씀을 증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절들은 오늘의 참 성도가 내일에 불신자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차분히 생각해보면, 파선할 배는 겉모양만 그럴듯하였지 처음부터 거친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튼튼한 배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맛만 보았지, 받아들여서 소화시키고 내 것으로 만든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처럼 겉모양은 성도이지만 내용적으로 성도가 아닌 거짓 성도가 있음을 이 말씀 외에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딤후 3:5)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주님께서 도무지 알지 못하는 자로 여기시며 오히려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는 책망을 하시고 쫓아내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 7:22-23). 돌밭에 떨어져서 순식간에 자라지만 결국은 시들고 마는 씨앗과, 가시덤불로 인해 결국 결실하지 못하는 씨앗 역시 초반에는 탁월한 성도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중생하지 않은 거짓 성도입니다.
신앙 현장에서 간혹 기질적으로 종교성이 매우 뛰어나서 종교적 활동에 아주 열성을 보이다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신앙을 아주 버리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이 경우도 처음부터 무늬만 성도였지 중생한 참 성도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섣부르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참 성도라고 할지라도 한 동안이나 꽤 장기간 동안 마치 믿음에서 파선한 것처럼 여겨지는 기간을 보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지로 구원을 상실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상실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참 성도도 욥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참 성도도 베드로처럼 요동할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심각한 죄에 빠지고 오랫동안 회개치 않은 채 지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 성도는 결코 침몰되는 일이 없습니다. 저항하는 힘이 약화되어도 그는 계속해서 죄에 저항하며 의를 갈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 속에 선한 일을 시작했다면 선택한 자가 온갖 죄를 범하도록 방치해 두시지 않습니다. 그의 양심을 찔러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숨겨놓은 죄를 계속 지적받게 하십니다. 다윗은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회개했고, 베드로는 닭울음소리를 듣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평범한 닭울음소리였지만, 베드로에게 있어서 그 닭은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 역할을 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교회 종소리를 듣고 회개한 분도 있고, 억울하게 따귀를 맞고 회개한 분이 있습니다. 닭울음소리나 종소리나 따귀 때리기를 초신자 전도 프로그램으로 도입한다면 우스운 일이겠지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회개에 이르게 하십니다.
때로는 죄를 고집하는 완고한 마음을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서 쓰라린 고통을 겪게도 하십니다. 환난을 당하거나 충격적인 사건을 겪기도 합니다. 이때도 성도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죄 값을 치르는 것은 아닙니다. 죄 값은 이미 예수님께서 다 치러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쓰라린 고통은 참 아들을 향해 사랑의 매를 드는 아버지의 징계와 같습니다. 죄 값에 합당한 형량을 치르도록 하시는 심판이 아니라 아픈 만큼 성숙해지도록 도우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아르미니안은 성도의 견인 교리가 성도를 방종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견인은 불확실하여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 잘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 역시 심각한 방종을 만들 가능성은 동일하게 있습니다. 명백한 성경진리를 숨기고 오히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조장하여 신앙적 열심과 헌신을 고무시키려는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꾀를 더 지혜롭게 여기는 교만하고 어리석은 태도에 불과합니다.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모르는 돼지는 선물로 주어도 먹지 못할 그것을 발로 짓밟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이아몬드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발로 밟기가 힘듭니다. 이처럼 복음의 가치를 참으로 아는 자라면,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까 마음껏 죄를 즐기겠다는 태도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자신이 거지인 줄로만 알고 있을 때는 땅에 떨어진 밥을 주워 먹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왕자라는 사실을 깨닫고서도 그렇게 하기란 어렵습니다.
참 성도는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임도 아는 사람입니다. 썩는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인 줄도 아는 사람입니다(요 6:27). 하나님께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신 이유가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눅 1:74-75)하려는 것임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잠시 죄에 빠질지라도 그 마음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다시금 회개하고 맙니다. 썩는 양식 때문에 하나님 자녀로서의 품위를 잃었을 때는 애통해 합니다. 감사와 기쁨과 자원함으로 종신토록 주님을 섬기기 원하며, 그분 앞에서 성결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견인 교리가 방종에 빠뜨린다는 것은 순전히 오해입니다. 고린도전서 1:8절은 방종하기는커녕 오히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속에 이미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 마침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실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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