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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우스의 예정론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최동규목사(대구)

by 김경호 진실 2011. 7. 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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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미니우스의 예정론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최동규 목사(대구 성서계명교회, http://www.kmcmi.org)

1. 서론

오늘날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에 대한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는 많이 들을 수 있다. 복음이 심리학과 마케이팅과 엔터테인먼트에 물들어 있는 현상을 지적해준 책자들이 한국교회에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잘못된 현상들을 낳은 사상적 토대에 대해서는 간단히 ‘알미니안’이라고 지적하기만 할뿐 그 사상의 위험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까지 나아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미 만연되어 있는 현상들에 대해서만 비판하고 그친다면 새로운 현상들에 대한 비판력까지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존의 잘못된 현상들이 수정 보완하여 새로운 현상으로 제시될 때 다시 휩쓸리기가 쉬우며 같은 뿌리에서 나온 어떤 현상은 비판하면서 다른 현상은 수용하는 모순을 범하기도 쉽다.

윌리엄 커닝함(William Cunningham, 1805-1861)은 ‘예정’이라는 주제에 있어서 개혁파 내의 모든 분파는 사실상 “칼빈주의자와 반(反)-칼빈주의자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데, “칼빈주의자도 알미니우스주의자도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어서 중간노선을 취할 수 없음을 강력하게 논증했다. 어느 한쪽이 참이라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거부되어야 한다는 배타적 사상인 셈인데, 역사를 보면 예정이라는 주제에 관한 무지와 혼란은 언제나 알미니우스주의의 확산에 도움을 주었다. 이는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에 대한 현대 교회의 방치와 무관심이 개혁신앙에 치명적인 위험 요소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에 필자는 알미니안 사상의 원조가 된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그의 예정론에 담긴 반 성경적 오류들을 인식론, 구원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신론과 관련해서 탐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반성경적 오류들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장과 어떻게 관련되는 지를 간략하게 언급하며 결론을 맺고자 한다. 이 작업이 우시 시대 한국 교회에 만연한 알미니우스 사상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경계하도록 돕기를 기대한다.

2. 알미니우스의 예정론

알미니우스는 신론을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로 삼았는데, 그 중에서도 예정론에 대한 그의 새로운 해석이 중심이었다. 그는 목회 중에도 예정론에 관한 서신을 레이든 대학의 유니우스와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윌리엄 퍼킨스와도 교환했다. 알미니우스의 예정에 대한 관심은 개혁신학의 예정 교리가 윤리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며, 그러한 예정론은 인간을 로봇이나 꼭두각시로 만든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정에 대한 자신의 새로운 견해들을 ?유감 선언?(A Declaration of the Sentiments)에서 네 개의 항목으로 정리했다.

?유감 선언?에서 그는 예정이 “종교에 있어서 첫 번째로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항목”, “기독교 그리고 구원과 그것의 확신의 기초”, “복음 그 자체”라고 했고, 자신이 새롭게 제시한 예정에 대한 설명은 “구원을 위해서 믿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설명”들이며 너무나 명백하게 성경적이어서 종교회의를 열어 조사하거나 결정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기독교 교사들에게 가르쳐져야만 한다고 했다. 또한 기독교의 참된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며, 하나님의 은혜를 영예롭게 하며, 그리스도를 구속 절차의 중심이 되게 하며, 교회의 목회를 위태롭게 하지 않고, 성실한 그리스도인의 습관을 무의미하지 않게 한다고도 했다. 알미니우스가 자신 있게 정리하여 제시한 예정론은 다음과 같다:

1. 죄인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첫 번째 절대적인 작정은, 그분 자신의 죽음으로써 죄를 파괴하고 그분의 순종하심으로써 잃어버렸던 구원을 획득하며 그분 자신의 공로로써 그것을 전달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 구속자, 구원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 임명하시기 위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2. 하나님의 정밀하고도 절대적인 두 번째 작정은, 회개하고 믿는 자들을 호의로 받아들이시기 위하여, 그리고 그분의 목적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끝까지 인내하는 그러한 회개하는 자들과 믿는 자들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반면에 모든 회개치 않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을 죄 가운데와 진노 하에 버려두시고 그들을 그리스도로부터 외인들로 저주하시기 위하여 작정하신 것이다.

3. 세 번째 신적 작정은 하나님께서 충분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서 회개와 믿음을 위해 필수적인 수단들을 시행하시기로; 그리고 그러한 시행은 (1) 신적 지혜를 따라서 - 이것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그분의 자비와 그분의 엄격하심 둘 모두에 적합하게 되는지 아신다. 그리고 (2) 신적 공의에 따라서 제정하시기로 작정되었다. - 이것으로써 하나님은 그분의 지혜가 정하는 무엇이든지 채택하시며, 또 그것을 실행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4. 네 번째 작정은 이것들에 뒤따르는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저주하시기로 작정하셨다. 이 작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분은 앞서 묘사했던 회심과 믿음을 위해 적합하고 적절한 그러한 수단들을 시행을 따라서 그분의 선행하는 은혜를 통해서 믿고 그분의 후속하는 은혜를 통해서 인내하게 될 개별적 존재들을 영원 전부터 예지로써 아셨다. 그리고 이 예지로써 그분은 믿지 않고 인내하지 못할 자들을 똑같이 아셨다.

알미니우스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작정하셨다. 다음으로 회개하는 신자들을 구원하시고 회개치 않는 불신자들을 저주하시기로 작정하셨다. 그 다음에는 회개하고 순종하게 하는 그 “믿음을 낳기 위한 수단들”을 풍성하게 제공하기로 작정하셨다. 이 모든 작정의 결과로써 비로소 개별적 존재에 대한 구원과 저주가 작정되긴 했지만 전지하신 하나님의 ‘예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알미니우스는 개혁신학의 예정론과 자신의 예정론을 분명하게 구별했다. 1-3항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작정’을 말해오다가 유독 개별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을 결정하는 선택과 유기의 작정만큼은 예지에 기반을 둔 ‘조건적 작정’이라는 입장을 취한 것이 특이하다.

예지가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조건이라면 구원의 과정에서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요인은 인간의 믿는 행위, 곧 복음의 초청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달려있게 된다. 그런데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그들 자신의 공로들을 따라서나 공로들 때문이 아니라, 오직 은혜만을 통해서 되도록 이 수단들을 결정하신다”고도 말했었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이 ‘인간의 반응에 달렸다’는 주장과 ‘오직 은혜만을 통해서’라는 주장은 얼핏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동일하게 강조하는 개혁신학의 내용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펠라기우스가 ‘은혜’의 개념을 어거스틴의 의미와 다르게 사용한 것처럼, 알미니우스가 ‘오직 은혜’의 개념을 개혁파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했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알미니우스는 네 번째 항목에서 인간이 선행적 은혜(preventing grace)를 통해 믿음을 가지며 후속적 은혜(subsequent grace)를 통해 인내한다고 설명했다. 이 설명은 그의 죄론과 자유의지론을 알면 보다 분명하게 이해된다. 알미니우스는 아담의 범죄가 인간의 원의와 성결을 위축시키긴 했지만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타락한 후에도 남아있다고 설명했다. 즉, 그가 말하는 ‘오직 은혜’란 중생 전의 모든 인간에게 ‘회개와 믿음의 선택을 할 수 있을 정도만큼’의 자유의지를 회복시켜 주신 혹은 남겨두신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를 말한다. 구원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이 선행적 은혜를 기반으로 삼아 ‘믿는 행위’를 지속해야만 한다.

예지에 기초한 예정을 말한 후에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예지를 행사하시지는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맡겨 두신다고 설명했다. 그 이유는 “만일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예지에 꼭 얽매어서 진행된다면 그것은 칼빈주의의 예정의 교리를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예지와 예정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지에 근거한 예정이란 교묘한 말장난에 불과함이 드러나는데,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알고 계실 뿐이고 인간의 자유의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면 예정이란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닝함은 “개인들의 신앙과 순종에 대한 예지 혹은 예견만을 근거 또는 기초로 둔 신의 뜻이나 목적은, 당연히, 그들에 관한 목적이나 신의 뜻이 전적으로 결핍되었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고 지적하면서, “특정한 사람들의 믿음, 거룩함, 인내에 대한 예지 위에 기초된 선택은 전혀 선택이 아니다”라고 했다. 알미니우스가 ‘예지 예정’의 개념을 도입한 것은 새로운 예정을 주장하기 위함이라기보다 개혁신학에서 말하는 예정은 없다고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알미니우스를 충실히 따르는 신학도 예정 교리를 부각시키지 않는다. 비록 알미니우스가 ‘예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예정이 있음을 믿었다는 주장은 그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다.

3. 알미니우스 예정론의 오류

알미니우스가 제시한 새로운 예정 개념과 이에 대한 자신의 설명들은 많은 문제점들을 내포하고 있다. 이 문제점들은 알미니우스를 따르는 알미니안주의의 문제점과도 연속성이 있다.

3.1 인식론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는 죄의 창시자가 아니시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존하기 위해 예정을 집요하게 부정했다. 그의 동기가 나쁘지는 않았지만 개혁신학의 예정론을 결정론(determinism) 혹은 숙명론(fatalism)으로 오해한 인식론적 오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쇠얀 키에르케고어(Søren Kierkegaard, 1813-1855)는 기독교인의 진리에 대한 인식론적 입장을 설명하면서 “모든 기독교는 [신ㆍ인의] 역설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받아들이든지 거부하든지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성도의 인식은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분께서 역사 가운데 실존하셨다는 성경의 증거’를 토대로 하고 있다. 초합리적인 이 역설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성도는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식적 기반을 가졌다.

개혁신학은 이 역설적 진리에 기초해서 구원이 100% 하나님의 주권인 동시에 100% 인간의 책임이라는 성경의 증거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반면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의지 99.9%와 인간의 의지 0.01%’가 협력한 결과로 구원이 획득된다고 주장한 셈이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큰 무게를 두고 있지만 그의 예정론은 본질적으로 성경이 증언하는 역설적 진리를 거부하는 자연인의 인식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예정론 개념의 진짜 문제는 … 예정론을 결정론과 동의어로 만들고 있다는 데 있다”는 판단은 정확하다. 예정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예정을 결정론이나 숙명론으로 인식하는 오류에서 출발한다.

알미니우스는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무익해지고, 신자들의 회개와 믿음과 성결한 생활을 위한 열정들이 무용해진다고 염려했다. 하지만 구원의 선택이 인간의 결정에 달렸다고 생각할 때 방종과 태만에 빠질 가능성이 더 많으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나 목회와 선교를 무익하게 만든다. 크리스토퍼 네스(Christopher Ness, 1621-1705)는 적절한 반론을 제시했다:

그들은 “나는 내가 원할 때에 회개할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저속하게 살고 있지만, 언제든지 내가 원하는 때에 나는 선택될 수 있을 것인데, 왜냐하면 나의 임종 때조차도 회개할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서, 내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는 말로 사람들을 가르친다. 이것이 사람들로 의무에 태만하게 만드는 교리다!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에 회개나 믿음이 필요 없으며 태만하게 살아도 된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예정론을 결정론이나 숙명론으로 인식한 결과물이다. 아직 복음을 대적하며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택하신 성도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그 택하신 성도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견인하실 것이라는 믿음이 굳건하다면, 죄인들에 대한 소망을 꺼버리지 않으므로 오히려 선교의 열망은 식지 않을 것이다.

알미니안 역시 칼빈의 예정론을 숙명론으로 인식한다. 그들은 예정론이 인간을 자만하게 만든다고 비판하면서 선민이라는 자만심에 빠졌던 유대인들을 예로 들었다. 하지만 혈통을 ‘선택의 조건’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생각은 오히려 알미니안적이었다. 구원이 무조건적 선택으로 말미암았음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구원의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고 자신의 공로와 영광으로 돌리게 되므로 자만에 빠지게 된다. 또 알미니안은 개혁신학이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기라도 한 것처럼 비판하지만 개혁신학은 언제나 결정론과 운명론을 반대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동시에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말해왔다. 도르트 신경 역시 하나님의 주권과 함께 인간의 책임을 동시에 강조했다.

코넬리우스 반 틸(Cornelius Van Til, 1895-1987)은 알미니안주의의 오류의 배후에는 “인간의 의식이 파생적 출발점이라고 여기기보다는 궁극적인 것으로 여기고서 출발하는 오류가 있는 것”이라고 잘 분석했다. 알미니우스와 알미니안의 개혁주의 예정론에 대한 비판은 성경이 증언하는 역설의 진리를 인식의 기반으로 삼지 않고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의 합리적 인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3.2 인간론

인간에 대한 알미니우스의 오류는 첫째로, 전적으로 타락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존재, 즉 성경이 “허물과 죄로 죽었다”(엡 2:1)고 선언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의학적으로 죽었다고 판정할 수 있는 상태에서 잠깐 정신을 차리고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그는 인간이 회개하고 믿을지를 결정할 마지막 힘은 남아 있는 존재라 여긴다. 물론 알미니우스는 인간이 죄로 죽었음을 분명히 말한 후에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에 의해 다시 회복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복된 그 존재가 중생치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결론은 동일하다. 그는 은혜를 두 가지 종류로 나눈 후에, 죄로 죽었던 모든 존재가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에 의해서 중생 이전에 이미 어느 정도 일차적으로 회복되고, 후속적 은혜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회복된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으며 모든 사람이 자유의지로 신앙을 받아들인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두 번째 오류는, 그의 주장을 따르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강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구원을 시작하는 것은 인간인데, 그가 믿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혜가 비로소 작용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최종 결정하는 것 역시 인간인데,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수용하거나 항거하는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작용을 못한다. 물론 알미니우스는 죄의 상태에서 “참된 선을 향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상처 입고, 망가지고, 허약해지고, 구부러지고, 약해졌을 뿐만 아니라, 감금되고, 파괴되고, 상실되었다”는 점을 시인했다. 하지만 은혜에 의해서 보조를 받고 자극을 받으면 자유의지는 쓸모 있고 힘을 가지게 되어서, “그것은 언제나 주어진 은혜를 거부할 자유의지의 힘 안에 놓여 있다”고 했음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 오류는 세미 펠라기안의 오류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원죄와 타락의 심각성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그는 원죄조차 부정하고 있는 펠라기안과 분명한 단절성이 있다. 하지만 원죄가 아담의 자범죄에 대한 처벌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원죄로 인해 처벌 받지 않으며 자범죄만 용서 받으면 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개혁신학과의 단절성도 있다. 알미니우스는 “아담의 부패성은 그의 후손들에게 전가되지만, 죄책(guilt)은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그의 죄론의 핵심이다.” 결국 알미니우스의 인간론은 세미 펠라기안의 아버지 존 카시안(John Cassian, ca. 360-435)의 견해와 맥락을 같이한다. 헨리 채드윅(Henry Chadwick)은 카시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는 사람에게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에 동의했다. 인간의 마음은 부싯돌과 같아서 하나님이 치셔야 불꽃이 튄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꽃이 튀는 최초의 반응이 일어날 때 은혜를 부어주신다. 의지를 처음으로 하나님께 향해 돌아서게 하는 힘이 은혜의 선물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돌아서는 일은 자연적 의지와 하나님의 도우심이 협력하여 이루어진다. 카시아누스는 은혜가 거역할 수도 없고 상실할 수도 없는 힘이라는 생각을 철저히 배격했다.

잔존한 자유의지의 강도와 관련해서는 알미니우스와 카시안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알미니우스는 어쨌든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음을 시인한 반면에, 카시안은 단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한 측면과 은혜를 거절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는 차이점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선행적 은혜를 주장하는 알미니안은 구원에 있어서 신의 독력설(monergism)보다는 세미 펠라기안의 신ㆍ인협력설에 가깝다.

알미니우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성령의 은사들의 주입(infusion)이며, 새롭게 된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조력(assistance)”이므로,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과 더불어 사단과 싸울 수 있는 충분한 힘을 소유한다.” 하지만 성경(빌 2:13)은 하나님께서 믿으려는 ‘소원’과 함께 ‘믿는 행위’까지도 적극적으로 주관하신다고 말한다. 믿으려는 소원과 믿는 행위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은혜를 ‘주입’으로 여기며 ‘공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알미니우스의 견해는 세미 펠라기안의 견해를 수용한 로마 가톨릭의 칭의 교리와 같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본질적인 교리들을 제정했던 트렌트 종교회의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교리는 칭의론이었다. 회의는 ‘칭의’를 ‘성화’와 구분하지 않았다. ‘전가된’(imputed)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법정적인 의미’가 있다는 개혁신학의 설명과는 달리, 회의는 칭의란 ‘주입된’(infused) 하나님의 선행적 은혜가 인간의 의지와 협력하여 ‘실재적으로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칼빈은 그러한 설명들이 “어떤 면에서 펠라기우스보다 좀 더 조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의 오류는 … 중생의 은혜와 아담에게 주어졌던 최초의 은혜 사이에 구별이 없도록 만든다는 데 놓여있다”고 비판했다. 이 비판은 알미니우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3.3 구원론

구원론과 관련된 첫 번째 오류는, ‘믿음이 선택의 원인’이라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선택이 믿음의 원인’이라고 증언하는 성경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 1:4-5) 선택하셨는데, 알미니우스는 ‘거룩하고 흠 없을 것이기 때문에’ 선택하신 것처럼 주장한 셈이다. 그의 주장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은 하나님의 선택을 분명하게 언급한 로마서 9장 11-13절의 증거와도 상반된다. 이렇게 주장함으로써 알미니우스는 구원의 주체를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 바꾸어 놓았다. 구원을 결정하는 최종 열쇠가 인간의 손에 있다면, 상황에 따라 쉽게 요동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구원도 불안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오류는, 구원의 견고함을 믿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를 값싸게 만들어버렸다는 점이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반응에 따라 예정하신 내용을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예정에 관련된 퍼킨스의 논문을 검토하면서도 알미니우스는 “중생한 사람들도 때로는 성령의 은혜를 상실한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했다. 알란 셀(Alan P. F. Sell)은 알미니우스가 생을 마감하기까지 성도의 견인 문제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주장했지만, 참 성도가 마지막에 변절할 수 있음을 그가 적극적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이유는 참 성도가 결코 변절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구원이 이토록 불확실하고 불안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구속하신 은혜는 너무나 초라한 은혜에 불과하게 된다.

세 번째 오류는 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없게 될 최악의 가능성을 인정한 셈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은혜를 거절하여 모두가 멸망당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몽땅 저주에 떨어질 위험조차 무릅쓰시면서 “자신이 아직 그 결과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않은 채 자유로운 피조물들의 반응에 따라서 그 결과가 나오도록 결정”하신다고 말하든지, 혹은 16세기 예수회 신학자인 루이스 드 몰리나(Luís De Molina, 1535-1600)처럼 하나님께서는 ‘중간지식’(middle knowledge, scientia media)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섭리를 하신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위험을 무릅쓰신다는 견해는 하나님의 전지성과 무오성과 전능성을 해친다. 중간지식설은, “행위자가 참으로 자유로운 한, 여러 가능한 상황들 아래서는 그 행위자가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지 진술하는 참된 가상적 요소는 없”다는 비판에서 잘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를 화해시키지 못하며 인간의 자유가 하나님의 전지성의 범위를 제한하게 된다.

네 번째 오류는 그의 보편 속죄론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구별 없이 은혜를 베푸신다면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경험되는 인생의 불공평성에 대해서 설명하기 어렵다. 인생에는 의인이 고난을 받고 죄인이 형통하는 등 하나님의 주권으로만 해결될 신비로운 측면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온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없어야 한다. 커닝함은 알미니우스의 무제한적 속죄 개념은 많은 알미니안들을 자극했는데,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 행하신 것에 대한 아무런 지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역시 구원 받을 수 있고 구원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연과 섭리의 사역들만으로 구원의 길을 선포하는 방법을 고안하게 했고, 또한 일부 알미니안들로는 천국과 지옥 외에 영원한 중간 상태에 대한 개념을 품는 경향을 가지게 했다고 설명함으로써, 성경의 계시를 벗어날 때 그 후대는 얼마다 더 크게 성경을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통찰력을 제공했다.

그리스도의 속죄에 관련해서는 5가지의 가능성만 존재한다: ①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들에 대한 속죄, ② 모든 사람들의 어떤 죄들에 대한 속죄, ③ 어떤 사람들의 어떤 죄들에 대한 속죄, ④ 어떤 사람들의 모든 죄들에 대한 속죄, ⑤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를 위해서도 속죄하지 않았다는 견해. 다섯 번째 견해는 자유주의나 이교나 펠라기안주의의 입장이며, 두 번째와 세 번째 견해가 실질적으로 알미니안주의의 입장에 속한다. 첫 번째 견해를 알미니안의 입장이라고 가정한다면, 왜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지는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한데, 알미니안 입장에서는 회개하지 않고 불신하였기 때문이라 설명하겠으나, 그러한 설명은 회개하지 않는 죄와 불신하는 죄는 속죄되지 않은 것을 전제하므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한다. 알미니안의 입장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대안으로 남아 있는 것이 네 번째 입장인데, 이것은 성경적인 입장이며 도르트 회의가 채택한 입장이다.

다섯 번째 오류는 인간의 공로를 주장한 점이다. 알미니우스는 은혜가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본 펠라기우스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나는 그[타락한 인간]가 죄에서 구원되었기 때문에 선한 것을 생각하고 원하고 행할 수 있지만, 아직 신성한 은혜의 계속적인 도움들이 없이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만큼은 알미니우스도 개혁신학의 입장에 서있다. 하지만 그가 인정했던 필수적인 은혜란 하나님께서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에게 주신 선행적 은혜 그리고 인간과 협력하는 후속적 은혜다. 따라서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의 행위 또한 필수적이라고 말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에게 믿음은 “인간의 필수적인 의무로써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획득을 위해 그분 자신과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성을 결정해 두셨다”고 주장했다.

알미니우스는 믿음을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방편으로 보기보다는 그 자체를 의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가 인간의 믿음 그 자체를 ‘구원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독자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여긴다는 점에서도 믿음을 하나의 공로로 여기는 로마 가톨릭과 같은 입장에 서 있다. 따라서 인간이 믿음이라는 행위를 시행한다는 조건 속에서만 구원이 획득된다는 알미니우스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신율법주의’(neonomianism)에 해당한다. 구원과 관련해서 ‘오직 그리스도’ 때문에 ‘오직 믿음’을 통해서 ‘오직 은혜’로 받은 칭의 교리는 교회의 존립을 좌지우지하는 절대적인 진리이다. 알미니우스는 인간의 공로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존립 자체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3.4 기독론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정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그의 구원론의 중심은 그리스도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구원론에서의 그의 오류는 즉각적으로 기독론의 오류를 초래했다. 첫째로, 그의 예정론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의 가치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 가능성만 열어놓으셨을 뿐이고, 열린 그 문으로 걸어 들어감으로써 그 ‘가능성’을 ‘유효성’으로 바꾸는 것은 인간의 몫으로 남겨지기 때문이다. 알미니안이 주장하는 본질도 이와 같다:

그들[알미니안]이 이 점에 대하여 가르치는 본질은 이것이다 - 즉,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고난 받으신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 어떤 죄인도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었다는 것; 그분께서 위하여 죽으셨던 모든 이가 영원히 멸망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분께서 그분의 피를 쏟아서 얻게 된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속과 영원한 행복을 그분께서 찾아 구원하신 사람들 중에서 한 명도 결코 즐기지 못했을 수 있다는 것.

알미니안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만 열어놓으신 것이지, ‘실제로’ 그들을 구원하거나 그들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인간으로 하여금 회개하거나 믿음을 가지게 하는 실제적인 힘을 제공하지 못한다. 제공된 구원의 가능성을 유효한 실제성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힘은 이미 개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셈이다. 결국 구원의 가능성을 실제성으로 바꾸는 인간의 결정적인 공로에 비해 필수적이기는 하나 결정적이지 못한 그리스도의 공로는 상당히 퇴색된다.

둘째로,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실패라고 말하는 셈이 된다.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넉넉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의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지는 못하신 꼴이 된다. 그분의 보혈이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효과가 없는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화해를 화해될 가능성으로, 용서를 용서 받을 가능성으로, 구원을 구원 받을 가능성으로 축소시켰다. 단지 ‘가능성’을 획득한 것에 불과하다면 대속이라는 개념 자체는 폐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대속은 그 본질 자체에 있어 그 할 일을 대리자에 의해 대행 받은 사람에게 실제적으로 책임 면제를 보장하는 사실상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속죄를 무제한적인 것으로 만드는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은 제한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주장을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목적하신 바를 온전히 성취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니시게 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자를 모두 구원할 수 없는 신, 원하기는 하되 원하는 바를 모두 성취할 수 없는 신이라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다.

3.5 성령론

알미니우스는 인간 본성의 부패성을 심각하게 인정하면서 구원을 위해서는 성령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바르게 말했으나, 이 은총은 선택된 특정한 사람들만이 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제시되는 은혜라고 주장했다. 또한 속죄는 보편적으로 제공되지만 구원은 제한적이어서 ‘회개하고 믿는’ 반응을 보인 사람만이 구원을 획득한다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모든 자들을 위해 죽으심)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모든 자들이 구원받지는 못한 것)을 구분한다는 점에서 알미니안은 알미니우스를 그대로 수용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유효하게 적용시키지 않으시는 분으로 만든다는 데 있다.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으나, 성령께서는 그 유익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키지도 않으시고 전달하지도 않으신다. 따라서 이 주장은 그리스도와 성령을 갈등관계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삼위의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시다는 것이 정통 기독교의 고백이다. 하지만 알미니우스는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의 삼위의 동등성을 무너뜨리며,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분으로 만든다. 이는 하나님의 의지의 통일성 또한 무너뜨리는 행위다.

3.6 신론

알미니우스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다. 개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불가항력적인 반면에, 알미니우스에게는 인간의 의지가 불가항력적이며 인간의 자유의지는 하나님의 절대의지를 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의 예지 예정은 하나님의 의지를 인간에게 의존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전능성을 손상시킨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참되고 유일하신 구원의 조성자시라는 진리를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한 알란 셀의 지적은 매우 적절했다. 안토니 후크마 역시 “이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은 주권적이 아니시며 따라서 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진리를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

알미니우스는 예정에 대한 개혁파의 견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모독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켰다고 비판했다. 반면 자신의 새로운 견해는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윤리적 공정성을 변호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으로 여겼다. 그의 문제는 새로운 예정론을 제시한 동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성경의 계시에 의존하여 논의하기 보다는 ‘윤리성’과 ‘합리적 이해’라는 이성적 토대 위에서 예정 문제에 접근했다는 데 있다.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으로 내놓은 해법이 ‘조건적 선택’이었다.

조건적 선택이라면 알미니우스의 신은 자유롭게 주권적으로 작정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신앙 상태에 의존해서 작정하시는 분이다.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즉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엡 1:4-5)하셨다는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또한 알미니우스의 신은 먼저 인간이 하나님을 선택할 것을 예지하신 후에 그를 선택한다. 이 주장 역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셨음을 밝히는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a)라는 성경의 증언과는 반대 된다. “어거스틴과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을 택한다는 것이 궁극적인 진리인 반면에, 알미니우스에게서는 그 역이 진리이다.”

성경의 계시를 철저하게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알미니우스가 하나님께 돌리기 원했던 그 영광은 인간의 믿음이라는 행위 혹은 자유의지로써 그리스도를 선택한 인간의 공로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님의 윤리성과 영광을 보호하기 원했던 그의 동기에도 불구하고, 그의 새로운 예정론은 인간의 윤리 안에 갇혀 있는 신, 곧 성경이 증언하지 않는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4. 결론

필자는 본문에서 알미니안을 낳은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에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훼손하는 심각한 위험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윌리암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는 알미니우스를 따랐던 항론파 사상을 지지하는 대다수는 “엄격하게 말하면 이단이 아니고 이단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는 위험한 오류”라고 지적하면서 소수는 “펠라기안주의적 이단”이라고 했다. 위험성은 계속 가능성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환경이 되면 현실성이 된다. 하이데커가 말한 것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어서 그 잘못된 언어를 고집하고 있는 한, 그것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점은 늘 경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헤롤드 브라운(Harold Brown)은 “우리가 살고 있는 칼빈주의 즉 예정론자들의 교회에 속한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현대 프로테스탄트들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어거스틴주의자 보다는 더 펠라기우스주의자이고, 칼빈주의보다는 더 알미니안주의자라고 제의한다면 아마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고 지적했다. 그의 지적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적용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기복 신앙이 한국 교회 기독교인의 삶의 태도와 관련된 문제라면, 알미니우스 주의는 한국 교회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관련된 문제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반성경적 강조는 결국 성령론의 약화를 가져온다. 한국교회 목회 현장의 알미니안적 요소는 참으로 성령의 역사에 의존하기보다 여러 가지 인간이 고안해 낸 프로그램들을 의존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성장시키고자 하는 현상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인간이 고안해낸 적절한 프로그램에 의해 중생이 가능하거나 중생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큼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을 제한하는 것이며, 중생이 도덕적 설득에 의해 이루어지는 변화라고 주장했던 알미니안과 같은 입장에 있게 된다. 이러한 오류에 대한 반발로 비성경적이고 신비적인 성령 사역이 한국 교회에 함께 유행하고 있다.

오늘날 목회 현장의 경영기법, 상담 심리기법, 마케팅 전략, 전도 프로그램의 도입의 심각한 문제점은 그 ‘방식자체’가 비성경적이라는 측면과 함께 그런 방식을 수용하게 하는 ‘잠재된 생각’이 반성경적이라는 측면을 강하게 지적해야 한다. 그럴 때라야 잘못된 뿌리에서 생겨나는 또 다른 열매, 곧 참신한 새로운 방식들에 현혹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한 프로그램이 구원을 돕는다는 생각, 인간의 노력이 구원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제도의 통합으로 보다 좋은 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협력 운동들의 뿌리에는 공통된 사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조건’을 보시고 혹은 어떤 ‘조건’이 갖추어 질 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상이다. 비록 고의성은 없었을지라도 그 사상은 신ㆍ인협력설을 주장했던 세미 펠라기안이나 알미니우스의 사상과 같은 맥락에 있다.

왜 오늘날 한국 교회는 개혁자들이 철저히 반박했던 로마 가톨릭의 영성을 다시 추구하면서 연합을 시도하면서 로마 가톨릭화 되어 가는가? 개신교를 떠난 교인들은 왜 그렇게 쉽게 가톨릭 교회에 정착하는가? 왜 잘못된 교회들에 무수한 사람들이 몰려드는가? 왜 구원의 확신문제를 가지고 파고드는 이단의 세력이 날로 확장되는가? 이는 한국 교회가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개혁파 사상과 유사하지만 알미니우스의 구원관이 로마 가톨릭과 유사하므로 연합하거나 적응하기가 쉽고, 알미니우스의 인식론이 타락한 자연인의 합리적인 생각과 일치하며, 알미니우스의 사상을 따르면 구원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알미니우스는 개혁신학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얼핏 유사한 내용들이 많다. 예정론만 반대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미니우스의 예정론은 그의 신학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의 토대였다. 반 틸은 알미니안의 조직신학과 변증학은 출발부터가 개혁파의 조직신학이나 변증학과 다르며, 신정론 역시 다르다는 사실을 통찰력 있게 지적했다. 유사도가 뛰어난 모조품일수록 해악은 크지만 그만큼 분별하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시대에 참으로 필요한 것은 참신하고 새로운 프로그램들이 아니라 개혁파 선배들이 물려준 성경적 신앙 고백들과 교리들을 새롭게 회복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서 점점 교묘하게 위조되는 기독교 진리들에 대항하여 진리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는 냉철한 분별력을 갖출 수 있도록 무장하고, 자신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려는 열정을 가진 성도들로 성숙케 하는 일일 것이다(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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