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규 (2007.06.03) http://kmcmi.org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12)
아담의 범죄 이후 중생하지 않은 자연인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 2:1) 상태에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죽은 존재였습니다. 죽은 존재는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는 영적인 죽음 상태로 살아가다가 마침내는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여 다시 살리시고 어떤 사람들은 그냥 버려두기로 이미 창세전에 예정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혹은 그분을 불쾌하게 할 만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선택되고 유기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주권적인 뜻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선택되었고 그 결과 유기되는 사람도 생겼습니다.
구원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으로 되었기 때문에 오직 은혜입니다. 성도는 구원을 공짜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조금이라도 공로가 있어서 그 대가로 구원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공짜라고 해서 값싼 은혜는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원을 위해서 일생토록 매순간 전 존재로서 고난을 받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으시며 죽으신 그 대속의 죽음으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누구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시고, 누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을까요?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그리스도께서는 선택한 사람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편이 옳은 말일까요?
요한복음 6:39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를 다시 살리시려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5절에서는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하습니다. 요한복음 15:13-14절에서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가 주님의 친구인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사랑을 보이실 것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8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는 표현이 있고, 에베소서 5:25절에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1:21절에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증언합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지 않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서 예수님께 주신 자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게 주신 자들은 어떤 때는 양이라 불리고, 친구라 불리기도 하고, 교회나 자기 백성이라 칭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정한 범위의 사람들을 위해서 피 흘리시며 죄에서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를 제한적 속죄(Limited Atonement)라고 합니다.
그런데 속죄가 제한적이라는 말씀에 마음이 불편해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17세기의 아르미니안들입니다. 그들은 제한적 속죄가 하나님을 편애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다지 사랑이 풍성하지 않는 분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 무제한적 속죄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성경이 지옥과 영원한 형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택된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자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놓으셨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하나님을 도덕적이고 풍성한 사랑을 가지신 분으로 여기게 할 것 같았습니다. 그들의 동기 자체가 악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이성적 판단으로 말씀을 벗어난 주장을 하게 되었을 때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먼저, 예수님의 신성을 심각하게 모독하게 됩니다. 그들의 말은 주님께서 모든 자들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놓으셨지만 실제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한다고 말한 셈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죽음의 목적을 온전히 성취하지 못하셨으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쏟으셨는데 그 피의 일부가 아무런 효력 없이 버려진 꼴이 됩니다. 예수께서 실패하셨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분은 전능하시지는 않다고 말한 셈이지요. 예수님께서 전능하시지 않다면 온전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3-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장로였던 아리우스(Arius ca. 250-336)가 예수님을 온전한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했었습니다. 예수님은 최상의 피조물이어서 신적 존재로 칭송을 받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반인반신까지는 여기지 않았더라도 온전한 하나님은 못되는 팔푼이 혹은 칠푼이 하나님쯤 된다고 여긴 셈입니다. 이 문제 때문에 사도행전의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 최초로 초교파적 종교회의가 325년 니케아(Nicea)에서 열렸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온전한 ‘동일본질’이라는 사실을 선언하고 신성을 모독한 아리우스는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리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와 451년 칼케돈 종교를 거쳐 니케아 신조를 최종적으로 확정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하나님 되심을 고의적으로 부인하고 그렇게 가르친다면 지금도 이단으로 정죄되어야 마땅합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볼 때 더 좋고,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에 더 좋아보여도 말씀을 떠났을 때 심각한 위험이 발생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해야 위로가 될 것 같지만,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는데도 지옥 가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이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는 사람도 없었어야 합니다. 이처럼 좋은 동기에서 시작하더라도 말씀을 떠날 때 오히려 심각한 문제만 일으키기 쉽습니다. 잠깐 지혜로운 것 같지만 결국은 어리석음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아무리 불편하더라도 나의 생각과 느낌을 앞세우지 않고 철저히 말씀에 의존해서 생각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속죄의 범위는 제한적이지만 선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는 속죄 능력에는 제한이 없음이 참 위로이며 감사할 일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과 성령님을 서로 갈등을 가진 관계로 만들게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놓으신 객관적인 구원 사역을 주관적으로 개인에게 적용시키는 사역을 하십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면 성령께서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복음을 듣지도 못한 채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성령님께서 전능하지 못하시기 때문이든지 아니면 예수님의 뜻이 못마땅해서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면서 대충 사역하셨다고 말하는 셈이 됩니다. 이 역시 신성 모독입니다. 왜냐하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은 그 존재에 있어서나 능력에 있어서나 영광에 있어서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언이며 성도의 고백입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는 서로 간에 전혀 갈등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참 성도라 할지라도 종합적인 사고력과 이해력이 부족해서 때로는 부지중에 아르미니안들처럼 잘못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 중에서 전혀 실수가 없는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비가 자식을 근실히 징계하듯이 징계하시겠지만 성도의 허물과 약점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또 우리의 허물과 약점으로 인해 결코 그분의 영광을 빼앗기는 일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부족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말 한마디라도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자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경건한 사람의 마음가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르미니안과 같은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씀을 읽을 때 문맥을 잘 살피고 성경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붙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후서 5:14절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앞 구절만 보면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뒤의 구절은 실제로 죽었다는 뜻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의미임을 알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죄에 대해 죽지 않고 오히려 죄 가운데 살고 있는 불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런 불신자들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결국 조금만 문맥만 살펴도 여기서의 ‘모든 사람’은 죄에 대해 죽은 모든 성도임을 알게 됩니다. 이런 해석은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에 의해서 분명하게 지지를 받습니다.
성경의 ‘모든’이라는 단어가 항상 세상사람 모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마 10:22)라는 말씀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세상사람 모두가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의미가 아님은 분명합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한 것이나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눅 2:1-2)라는 말씀 역시 세상사람 전부의 의미가 아닙니다. 문맥을 살피며 읽는 일이나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생각하는 일들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도 실수를 줄이기 위해 좋은 가르침과 좋은 참고자료에 도움 받으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하지만 디도서 2:14절은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을 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 일에 열심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구속하셨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적용한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런 일에 힘쓰는 것 역시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일부가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