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노동관
조주석
노동(일)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한마디씩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생계를 영위하기 위해서, 사회봉사를 하기 위해서, 자기실현을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 사회의 경체체제에 따라 다르게 대답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이란 대부분 임금노동이나,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노동이란 사회적 의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대답들은 그것이 잘 정리됐든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어떤 관점을 각각 반영하지 않고서 노동을 정의하거나 논의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우리의 관점을 믿음과 행함의 준칙으로 삼는 성경의 관점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경제체제는 노동을 노동=임금이라는 상관관계로 이해하는 자본주의 체제여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자본주의 관점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점에 의거한 노동관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이런 체제 아래에서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두 가지 측면ㅡ가장 기초적인 측면ㅡ에서 살피고자 한다. 즉 ‘노동은 누가 제정한 것인가?’와 ‘노동은 어떤 목적을 위해 쓰여야 하는가?’라는 이 두 물음에 집중해 제한된 지면을 통해 논의하려고 한다.
노동은 누가 제정했는가?
그리스도인은 노동을 누가 제정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자연발생적인가, 아니면 천적 기원을 갖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인간이 만든 질서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질서인가? 확언컨대, ‘노동은, 하나님께서 창조 질서 내에 인간이 복종해야 할 3 가지 규례ㅡ안식, 결혼, 노동ㅡ를 제정하시면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
이와 같은 하나님의 명령을 통해서 볼 때, 일이란 인간의 의무ㅡ정복하라. 다스리라.ㅡ요, 하나님의 축복ㅡ복을 주시며ㅡ이었다. 그런데 타락 이후 일은 인간에게 고생을 야기했다.[창3:17] 그러나 타락 이후에도 노동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인류 역사에 변함없이 존속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시내산 언약에서도 나타난다.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제칠일에는 쉴지니”[출 34:21]
여기에서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라는 말씀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명령적인 말씀이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모두 엿새 동안 일하고서 제칠일에는 안식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새 언약 하에서, 곧 신약 시대에서 바울은 일에 대한 선택적인 언급ㅡ일하기 싫어하거든ㅡ을 하고 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이 언급은 병자, 노약자, 무능력자 같은, 선택의 능력이 없는 자들을 향해 말하는 언급이 아니다. 일할 능력이 있음에도 잘못된 인식 때문에 일하지 않는 자를 향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노동을 하지 않고는 인간다워질 수 없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노동은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정하신 창조 규례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아무도 이 규례에 거역하지 않고 순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게으름이란 하나님의 창조 규례를 거역하는 죄가 된다. 그래서 잠언은 여러 곳에서 게으름을 책망하며 교훈을 주고 있다. 존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은 분명히 게으른 자가 빵을 먹는 것을 저주하신다.”
노동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하는가?
그리스도인이 하는 노동의 주요 동기, 또는 목적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생계를 영위하기 위해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 노후대책을 위해서, 경제적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서인가? 어쩐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그 목적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그 주요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노동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데에 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 10:31]
노동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있어야 한다. 이런 목적은 노동을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는 원리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주요 목적을 자아실현 내지 이웃봉사라는 데 국한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자아실현이라 함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자아를 완성하거나 성숙으로 나간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 육체가 단련되기도 하고 기술을 익히기도 하고, 일이 예술적 경지에까지 승화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자신의 지위가 세워지고 향상돼 출세, 승진이란 결과를 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동물의 활동을 노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이런 자아실현이란 원래의 창조 목적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으로 작용해, 인간 세계에 많은 불의를 가져왔다. 자아실현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로 작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한 상태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한 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만을 구가할 때는 노동의 그 주요 목적을 반영할 수가 없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다분히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아실현이 다른 사람들과 관련돼 나타날 때, 노동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인해 부패된 자들이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인 휴머니즘에 근거해 이웃봉사만을 외칠 때는 이 일 역시 근본적으로 자신을 기쁘게 하는 데로 향하고 만다. 다분히 자신을 과시하거나 뽐내거나 하는 데로 나아가고야 만다.
물론 그렇지 않고, 숨어서 봉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지라도 그의 내면 깊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주요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 자신만이 생의 주인이 됨으로 그 자신을 그 스스로에게 과시하는 결과를 산출하고야 만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노동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있다.’는 원리를 가지고 노동에 임해야만 한다. 그때 자아실현과 이웃봉사라는 결과도 정당하게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은혜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바른 관계가 설정된 때라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인생의 목적을 노동을 통해 바로 수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목적 아래서, 그런 자각 아래서 자아실현이나 이웃봉사에 대한 책임감이 일어나게 된다. 에베소서의 교훈을 들어보자.
“눈가림으로 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해 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6,7]
이상의 내용을 결론짓자면, ‘노동이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아실현과 이웃에 대한 봉사를 정당하게 가져오게 한다.’는 것이다.
[출처] 조주석 <성경적 노동관> (SDG 개혁신앙연구회) |작성자 사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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