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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에 기초한 직업과 소명

직업관

by 김경호 진실 2010. 9. 23.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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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에 기초한 직업과 소명]

 

 

1. 노동과 직업, 그리고 소명의 의미

 

1) 성경에서는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특히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남자는 피땀 흘리는 노동을 해야만 되게 되었다. 따라서 쉽게 생각하면 노동은 하나님의 저주에 의한 것처럼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노동은 이러한 저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난 뒤에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그리고 그것을 다스리라“(창 1:28)는 말씀 속에서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기능이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의 일부였던 것이다. 다만 타락의 결과 노동이 애초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대로 순수한 즐거움이 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가난한 노동자를 착취하는 현상을 가져왔고(약 5:4), 노동이 우상(물질의 획득수단)으로 변하게 되었다.(전 2:4-11, 5:10)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저주의 상태에 있는 노동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속을 받음으로 축복이 되었다. 이는 예수님도 공생애 전에 목수일을 하였으며, 바울 사도도 천막 만드는 일을 하였다. 그러므로 노동은 그리스도께 대한 섬김의 하나로서 수행되어야 하며,(골 3:22-24) 신자로서 우리가 맡은 바 성스러운 청지기 직분의 일부이다. 따라서 노동이 하나님을 위해서 수행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유익이 되는 것이다.(살후 3:10-12)

 

2) 이러한 노동은 바로 직업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이므로, 이제 직업이란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로 하자. 통상 우리는 직업이라고 할 때에는 영어로 Vocation이라고 쓴다. 그런데 이 말은 라틴어의 vocatio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의미는 ”부르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직업을 소명이라는 말로서 Calling이라고 사용하기도 한다. 막스 베버도 이러한 의미에서 독일어 Beruf는 영어의 Calling과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부여받은 사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직업이라는 말이나 소명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해석되게 되는데, 우리는 가끔 오해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할 때에는 기독교적인 복음사역만에 한정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의미하는 ”부르심“은 성직자로서 복음사역을 위한 부르심도 있지만, 직업을 가지고 노동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점을 분명히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부르심에 대한 잘 못된 생각이 우리를 ”하나님의 지고한 부르심“(God's highest calling)과 ”저급한 부르심“으로 이원화시키는 우를 범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노동의 경시 풍조가 생기게 되고, 중세에는 ”성스러운 일“과 ”속된 일“이 완전히 대별되어 버리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이러한 오해는 성직은 성스러운 것인 반면에 세속에서 일하는 것은 속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각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2. 노동관의 변천사개관

 

1) 고대: 고대인들 중에는 노동을 찬양한 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Xenophon은 ”용감무쌍한 투사라도 씨를 뿌리고 땅을 경작하는 노동자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하였다. Aristoteles는 ”대중 가운데서 가장 나은 사람들이 농사짓는 사람들“이라고 했으며, Cicero도 ”농사보다 더 좋은 일이 없으며,…자유인에게 그보다 더 어울리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의 사고 속에서는 자유인의 노동을 의미하였지, 노예들의 노동을 결코 신성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또한 로마의 Seneca는 사람은 영혼과 육체라는 다른 두 개로 구성되었으며, 영혼이 높다는 전제에서, 육체는 중요한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한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노동의 의미에서는 정신적인 활동을 훨씬 고상하게 여겼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 시대의 바울 사도는 우리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육체가 영혼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성령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육(flesh)과 영(spirit)의 싸움은 결코 신체(몸)와 영혼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순종의 욕구와 불순종의 욕구 사이의 전쟁이었다.(고전 6:15,19-20; 12:27; 15:44,50; 롬 6:13; 빌 3:21) 따라서 세네카와는 달리 바울 사도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모든 형태의 노동을 주님에 대한 봉사로서 보았다.

 

2) 중세: Augustinus는 ”행동적인 삶“(vita activa)과 ”관조적인 삶“(vita contemplativa)으로 대별하고, 전자는 공부, 설교, 가르치는 일 등을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노동을 의미하는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과 그의 진리에 관한 성찰과 명상을 의미하였다. 이 두 가지의 삶은 모두 귀하지만, 관조적인 삶이 더 높은 질서에 속한다고 보았다. 또한 Thomas Aquinas도 위와 같이 대별하면서, 관조적인 삶은 ”영원한 것을 향한 것“이었지만, 행동적인 삶은 ”현세의 삶의 필요들“ 때문에 존재한다고 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보다도 더욱 관조적인 삶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 유일한 소명 또는 적어도 최고의 소명은 ‘사제의 소명’ 내지는 ‘수도사의 소명’이라는 도식으로 확립되었다. 따라서 부르심(calling)이나 소명(vocation)이라는 말은 성직으로 통하게 되고, 다른 직업에서는 ”부르심“이라는 의미가 사용될 수 없었다.

 

3) 종교개혁시대: 그러나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사람에 관계없이 한 신분이다“는 생각이 팽배하였으며, 이러한 점에서 종교개혁은 곧 ”만인사제주의“로 표현하기도 한다. 특히 Calvin은 그의 달란트 비유의 주석에서 ”달란트“를 영적인 은사와 은혜로 이해했던 종전의 견해를 깨뜨리고, 매일의 노동과 소명(직업)에 연결시켰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고린도전서 제7장 20절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 즉 성경에서는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말씀하는데, 초기의 개혁자들은 이 말씀이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천직으로 알고 그대로 봉사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부르심(소명)은 사회 내에서의 특별한 자리, 특수한 직분에 있게 됨으로써 요구되는 활동들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적 소명이 담고 있는 새로운 의미들은 사회 질서 앞에서 수동적․묵종적으로 사그러들고 말았다. 또한 소명은 직업의 한 유형으로 되었으며, 나아가 소명을 직업으로 봄으로써 개인주의적이며 세속화된 시대의 일반적인 공리로 변질되게 되었다.

 

4) 계몽주의와 현대: 계몽주의로 들어서면서 위와 같은 사조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자연법칙의 탐구와 私益의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자가 Adam Smith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각 사람이 그의 마땅한 몫을 얻도록 감독하며 시장의 법칙은 어떻게 사익의 경쟁을 유발하며 다시 경쟁이 사회가 지불할 수 있는 적정가격들로, 사회가 원하고 있는 상품들을 마련하게 하는가를 보여준다고 강조하였다. 이는 수요와 공급의 힘이 시장을 자기규율의 메카니즘으로 만든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원리는 노동을 상품화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게 하였고, 모든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그 노동의 가치에 있다는 원리로 대변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노동은 생산성으로, 상품의 가치로 직결되면서, 인간은 노동을 하는 기계로, 나아가 산업을 움직이는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노동을 이제 신격화하게 되고, 급기야는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공산주의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노동은 더 많은 부의 획득, 욕망의 충족을 위한 수단이 되었다. 이는 결국 노동이, 더 나아가 직업이 욕망이나 부의 우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5) 종합적 검토: 성경적 의미의 노동 내지 직업은 계몽주의적 노동관등과 차이가 있다. 즉, 그것은 진정한 ”부르심“인 것이며,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따라서 위의 고린도전서 7장 20절의 말씀은 자신들을 항상 그리스도의 종으로 인식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어떤 소명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통해서 주님을 섬길 것을 요구하는 말씀이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소명이 수동적이고 묵종적이기보다는 그리스도를 위한 능동적인 활동이 전제되어야 하고, 나아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부르심에 그대로 거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3. 참된 부르심의 사역자

 

우리는 위에서 직업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여기서 확인한 바는 직업이란 바로 부르심이며, 이는 곧 소명이라 했다. 따라서 우리가 가진 직업은 단순히 생활의 방편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임을 확인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부르심의 사역자가 되기 위해서 그 직업결정과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그리고 야피(Yuppie)직업철학이 아니라 창조적인 직업이 되려면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1) 부르심의 의미와 직업결정과정

 

가) 부르심의 종류: 부르심에는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기독교적 사역(삶)에로의 부르심이 있다. 성경도 우리에게 구원에로의 부르심과 거룩한 삶에로의 부르심을 제시하고 있다.

 

a) 어둠에서 그의 빛으로 부르심을 받았고(벧전 2:9), 회개에로 부름 받았다(행 2:38-39). 또한 그의 나라 안으로 부르심을 받았고(살전 2:12),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딤전 6:12; 히9:15). 이러한 부르심은 구원에로의 부르심이며, 또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전제도 찾을 수 있다.

 

b) 그런데 성경은 사도와 목사, 그리고 교사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표현은 있지만, 그 외 다른 직업에의 부르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이 없다. 이러다 보니 마치 부르심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직으로 부르심만을 의미하는 것처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오늘날의 직무들을 과거의 사도직이나 선지자직과 동일시하는 경우(예를 들어, 선교사=사도, 목사=선지자), ‘소명’의 의미도 매우 좁은 개념으로 축소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나 선지자직은 오직 교회의 유아단계에서만 교회를 섬기도록 하는 직분이다(엡 2:20). 따라서 우리는 부르심이라고 할 때에, 좁은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되며,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하여 우리를 비춰 주시는 하나님의 인격적 지도”라고 정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러한 정의에 의한다면, 모든 기독교인은 지금 그 자리가 바로 부르심을 받은 자리이며, 또한 봉사와 사역을 위하여 불러 세우신 자들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나) 정당한 부르심을 알 수 있는 근거에 대한 판단방법: 우리는 어떠한 봉사직분에 부르심을 받은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실상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이지만, 우리 인간의 경험에 의한다면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보통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으로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원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그 표시다. 로이드 죤스(Lloyd Jones)목사는 “일반적으로 소명은 사람의 정신 속에서 의식의 형태로, 정신의 영역에서의 어떤 동요의 형태로 시작하여 여러분의 마음이 그리로 향하게 됩니다.…여러분을 다루고 계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여러분께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자각하게 되는 그 무엇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죤스목사의 말은,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는 하고 싶은 어떤 욕구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느낌을 낳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바울사도도 복음을 전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는 확신(고전 9:16)을 가졌음에서도 볼 수 있다.

 

둘째, 경건한 사람들의 통찰과 증거를 통하여 기독교 봉사직에로 이끄심에 대한 표시를 확인할 수 있다. 즉 개인적인 의식에 전제해서 파악할 것이 아니라, 경건자의 검증에 의하여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부르심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다) 정당한 부르심에 대한 검증: 이상의 제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역의 직분으로 지시하는 듯하다면, 다시 내적이며 주관적인 인도와 외적이며 객관적인 인도를 검사해 보아야 한다.

 

a) 주관적 기준: 나는 내가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이 사역을 열망하는가? 나는 이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고 느끼는가?

 

b) 객관적 기준: 나는 이일에 적절한 자격이 구비되어 있는가? 나는 다른 신자로부터 확인을 얻었는가? 나는 이 일에 필수적으로 영적 은사가 있는가? 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있는가?

 

라) 직업결정의 유의사항: 그런데 부르심에 따른 직업의 결정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즉 우리가 기대해야 할 것은, 1) 은혜를 주사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자격요건들을 하나님께서 구비시켜 주시기를 기대해야 하며, 2) 성령께서 그 부르심을 완수할 수 있는 은사들을 주시기를 기대해야 하며, 3) 하나님께서 사역에 대한 희구심을 심어 주시기를 기대해야 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소명은 급작스런 기이한 사건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깊어지는 확신의 과정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점차적으로 명료하게 되는 과정이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2) 저급한 부르심과 지고한 부르심의 구별(?)

 

우리는 앞에서 기독교 봉사직으로의 부르심에 대하여 직업결정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성경에는 다른 직분(업)에로의 부르심에 대해서는 상세한 언급이 없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는 농사를 짓거나 사업에로 사람을 부르시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실수가 있다: 1) 기독교 봉사직에 대한 부르심을 신비화하여 그 부르심을 경외심으로 포장해 버리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검증과정을 제외시키는 병폐, 2) 여타의 모든 직종을 무소명적, 비영적인 직분으로 치부하는 병폐.

 

그러나 흔히 말하면 성직만이 부르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직분에의 부르심도 또한 같은 의미임을 알아야 한다. 즉 이미 앞에서 ‘직업’이라는 개념은 ‘부르심’에서 온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와 같이, 부르심은 ‘다른 직분’에도 같은 의미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과 신실하게 동행하여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직업(부르심)이 자신에게서나, 세상에서나, 맹목적인 운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부르심에는 지고한 부르심과 저급한 부르심으로 나누어서는 안된다.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중세는 지고한 부르심 내지는 영적인 일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일반직업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오히려 저급한 부르심으로 여기면서 이 경우는 ‘부르심’이라는 말마저도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견해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 이러한 태도는 교회 내에서도 직분이 계급 내지는 서열을 나타내는 일이 되어 버렸고, 지고한 부르심에 대한 지나친 호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관계없이 감수성이 예민한 신자들을 기독교봉사직(성직)에 밀어 넣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부르심에는 지고한 부르심도, 저급한 부르심도 없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의 부르심은 “고귀한 부르심”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부르심의 결정적인 요소는 그 부르심의 내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르심을 있게 하신 자와 부르심을 받은 자의 충성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원하신 하나님, 하늘과 땅의 주재자께서 우리의 직업선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그 사실 때문에 직업과 직종 그 자체에 상관없이 인도함 받은 직업, 부름 받은 직업은 고귀한 소명인 것이다.

 

3) 야피(Yuppie) 직업철학과 창조적 직업선택

 

영어에 “야피”(Yuppie)라는 말이 있다. 이는 전후 40말부터 50년대 초에 일어난 젊은 엘리트층을 두고 부르는 말이다. 이는 오늘날에도 상층부로의 계층이동을 목표로 하는 현상을 가져오고 있다. 그래서 Washington Post지에서는 다음과 같은 우스꽝스러운 시가 실린적이 있다: “나 이제 잠자리에 누워서 나의 고급요리를 늘 먹을 수 있고 내 주식이 올라가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세상을 판단하는 내 판단이 현명하고 내가 마시는 포도주는 백포도주이기를 기도한다.…내가 다니는 헬스클럽이 문을 닫지 않으며 나의 금융시장이 성장하기를 기도한다. 내가 잠이 깨기 전에 파산하더라도 그들이 내 승용차만은 가져가지 않기를 기도한다.” 이러한 익살스러운 기도는 그리스도인들도 직업을 자기성취와 부의 획득, 신분상승의 매개체로 보려는 경향에 크게 물들어 있음을 경종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야피직업철학을 넘어서 기독교의 창조적인 직업관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가) 창조적 직업관은 직업선교에 힘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의 직업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교를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노동을 통한 임금은 이웃을 도울 수 잇는 훌륭한 재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직업선교는 때로는 단기간의 해외 프로젝트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해외에 새로운 기술을 제공해 주는 등 직업을 통해서 선교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나) 소외된 사람을 위한 사역도 여기에 속한다. 변호사와 의사, 중개업, 회계사 등이 어려운 자들, 소외된 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면서 선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 검소한 생활양식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검소’라는 말이 어쩜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들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누가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도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요구하셨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은 잉여재산의 축적에 강력하게 반대하셨다(눅 12:15-21; 22-34). 절제된 생활양식을 택하라는 권고가 기독교 교훈의 영구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노동에 대한 기독교적인 관점은, 1) 직업에 따른 봉급의 결정은 직업평가에 있다기보다는 필요에 근거하여 지급되어야 하며, 2) 지출은 매우 억제되어야 한다. 즉 사치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3) 개인적 소비와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일을 위한 헌금 사이의 균형은 후자를 우선으로 하고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5. 직업에 대한 새로운 비젼

 

1) 믿음을 따라 사는 생활

 

믿음에 따라 사는 생활이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철저하게 사는 생활을 의미하며, 이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적이며 건설적인 인격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은 존재들이며, 그 부르심의 한 측면이 바로 우리의 직업․직종의 선택이라는 것을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르심에 합당하려고 한다면, 우리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ⅰ) 직업을 추구하는데 우리는 어떠한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

ⅱ) 우리는 지금 노동의 문제에 대하여 의를 추구하는가?

ⅲ) 우리는 여러 가지의 일을 실질적인 사회적 영향력이나 문화적 가치를 고려해서 평가하는가?

ⅳ) 우리는 우리의 노동 현실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를 추구하는가?

우리는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생생한 노동의 현장에서 실제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믿음을 살아 내도록 성경의 안내를 받아야 할 것이다.

 

2) 노동과 시장, 무엇이 잘 못되었는가?

 

통상적으로 우리들은, 노동의 일반적인 개념은 천부적으로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도록 되어 있는 자율적인 개인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회사는 규모와 이윤을 최고의 목표로 하는 법인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일차적인 임무는 조합원을 위해 최대의 혜택을 얻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이와 같이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전부인가? 성경은 우리들에게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형상대로 피조된 인간은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서로서로 섬기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잘못된 관념을 가지므로 해서 이기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기심은 파괴적이기 때문에 결단코 만족할 만한 사회의 기반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기주의에서 생기는 위와 같은 현상은 바로 우리 시대의 우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주의가 만들어 놓은 불의한 행위를 정당화시키기까지 하는 것이다. 심지어 크리스천까지도....

 

3) 마르크스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에 대한 비판

 

마르크스는 역사를 부르죠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대립과 갈등으로 보았지만,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경직되고 급기야는 중앙집권적인 정치권력을 창출하였다. 또한 자유적 시장경제 질서를 지향하는 서구사회도 자유를 방종시함으로써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은 이 두 사상 체계의 오류를 드러내고 있다. 집단주의 사회를 지향하는 국가를 숭상하거나, 서구 사회에서처럼 개인을 숭상하거나, 결국은 양자 모두 우상숭배이며 불의로 나아가게 된다. 계급에 있어서든 개인에 있어서든, 그 기준은 자기이익이 아니라 정의다. 성경에 따르면 정의는 하나님 자신의 성품이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회 속에서 정의롭게 살라고 교훈하셨다. 이는 곧 우리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관계이며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갖는 바른 관계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서로서로 바른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가?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에 나오는 ‘의’라는 단어와 ‘공의’라는 단어를 서로 바꿔 가면서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가를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섬김으로써, 또 공공의 선에 기여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부름 받았다.

 

만약 복음적인 크리스천들이 이 세대의 우상을 바로 깨 닳고 그들의 정체를 들어낸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 과연 새로운 비전은 어떠한 모습일까?

 

4) 직업(일)과 새로운 비젼

 

노사관계를 적대관계로 생각하는 대신에 조화와 협동이 필요한 관계로 보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캐나다의 기독교인 노동협회에서는 헌장을 제정한적이 있는데, 이 헌장에는 “노사관계는 책임과 권위와 관련해서는 구별이 필요하지만, 협동관계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의 화해시키는 역사(Work)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대하여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교회와 가정 안에서만 아니라 시장에서도 화목시키는 자가 되라는 부르심이다.

 

또한 노동과 노동자의 가치에 대한 우리 시대의 견해에 도전해야 할 것이다. 즉 노동은 단지 어떤 물품의 생산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땅의 청지기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서 행하는 문화적 활동인 것이다. 또한 노동자도 다양한 결정단계와 생산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고무적이 창조의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용자와 노동자는 상호 과업과 상호 책임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위상이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 솔직해 진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무신론자들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께서 우리의 일(직업)과 시장의 주님이시라고 믿고 행하는가?” 우리의 직업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한 어떤 종류의 행동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가족이나 교회 생활의 영역에 제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리고 또한 서로 다른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분리된 세계, 분리된 영역에서 편리하게 살아가기 쉽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불식시키지 않는다면 복음주의적 노동관은 형성될 수 없을 것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고 있다면 우리가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라는 부름을 받았으며, 나머지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하나님께서는 만약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 15:5). 우리는 열매의 개수를 세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신실한 삶을 살아가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의 초점은 신실함에 있다. 결국 마지막 날에 가서는 아무런 변명의 여지가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너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 곧 신을 벗어라.” “너를 그 곳에 불러 세웠나니, 나의 부름에 합당하게 반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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