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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조나단 에드워드)

조나단 에드워즈

by 김경호 진실 2011. 9. 6. 09:09

본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조나단 에드워드)

(롬 4:5)“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고 알아야 하는 분량의 성경적 칭의 체계는 어쩌면 매우 단순하여 가장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칭의와 관련하여 그 이상으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칭의 교리는 인간의 타고난 이성을 빛을 초월하는 순전한 계시이며 또한 칭의교리야말로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가장 분명하게 입증되는 곳임을 모두 인정합니다.

또 우리는 천사들도 사람들도 도무지 생각해 낼 수 없었던 놀라운 화해의 방법을 하나님께서 친히 생각해 내셨음을 모두 인정합니다.

1. 로마서 4장 5절의 본문관찰과 교리도출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 구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요점들을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관찰1. 칭의는 사람을 ‘경건치 아니한 자’로 간주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말씀은 곧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는 행위에서 하나님께서는 의롭다함을 얻게 될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가령 그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이나 작은 선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의롭다 칭하시기 전에는 단순히 그 사람을 경건하지 않은 피조물로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사람 안에 있는 경건함은 칭의의 근거가 되어 그 사람의 칭의에 선행(先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성경의 기록을 보면서, 시력의 회복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긍휼의 행위보다 먼저 있었고 또 그것이 긍휼을 받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듯이 말입니다.
또는 어떤 부자가 관대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부유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을 보면서, 가난한 그 사람에게 그와같은 관대함이 베풀어진 이유와 가난한 그 사람이 그와같은 관대함을 얻게 된 자격은 그 사람의 재산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매하듯 말입니다.

관찰2. 이 구절에서 ‘일을 아니할지라도’라는 표현은 의식법(儀式法)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만 가리키는 것이 분명 아닙니다.
‘일을 아니한 자’와 ‘경건치 않은 자’는 분명 동의어 표현임이 명확합니다.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그 어떤 경건함도 일절 고려하지 않으신다는 사실! 바로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서 ‘경건치 아니한 자’라는 표현을 ‘일을 아니할지라도’라는 표현 바로 다음에 덧붙여 쓴 것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4절 말씀,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라는 말씀에 드러난 요점은 무엇입니까? 경건치 않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바로 복음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관찰3. 본문에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는 수단으로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믿음이 일련의 순종이나 의로움 같은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믿음을 해석하되, 율법에 대한 일련의 순종을 이행하는 것, 율법을 범하는 일을 피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믿음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과연 성경의 가장 명확한 의미를 살려 충실하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되 의롭다 하시는 이로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율법 수여자로서의 하나님 앞에 복종하는 것은 분명하게 다릅니다.

관찰4. “그것을 의로 여기시나니”라는 본문의 표현을 볼 때 명백히 드러나 있는 요점은, 칭의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그 안에 의로움이 전무(全無)한 사람으로 고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의로 여기신다”라는 표현이 명백하게 시사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원대로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전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다루심에 있어서 아무런 의도 없는 그 사람을, 결과적으로는 마치 그 사람이 실제로 의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고려하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실제로 의를 가지고 있는 어떤 것과 죄인이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앞서 나오는 “의로 여기신다”라는 표현의 취지입니다.
그러므로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이라는 표현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일을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다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의미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리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교리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결코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미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2. 이신칭의(以信稱義-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교리의 의미

질문 1.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질문 2.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습니다. 결코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미덕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질문 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답변 1.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실 때, 즉 그 사람이 죄로 인해 응당받아야 할 형벌과 죄책으로부터 벗어났으며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급을 얻을 수 있는 자격인 의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때,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단어를 이런 의미로 해석하는 것, 또 판사가 어떤 사람을 소극적인 의의 소유자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의의 소유자로도 인정하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형벌 받을 이유가 전무한 사람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의로우므로 오히려 적극적인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처럼 ‘의롭다함을 얻다’는 단어 역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같은 방식으로 인정받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그 단어의 어원과 본래 의미를 생각할 때 가장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을 의롭다 판단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롭다함을 얻다’라는 단어가 성경에 사용된 취지를 보아도, 이 단어를 그와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것이 분명히 옳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이 ‘칭의’라고 할 때 이 단어가 의도하는 뜻은 오직 죄사함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런 것입니까? 칭의의 본질을 숙고할 때 우리는 그와 같은 생각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규례나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하여 어그러짐 없이 올바르게 행하고 있다는 판단을 받으려면, 죄책(罪責)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이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 보증인이었던 아담은 사람으로서 존재하게 된 첫 순간부터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성취하기도 전에 또는 율법이 요구하는 순종을 성취하고 싶어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검증하는 시험을 여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치르기도 전에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적극적으로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는 일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의롭다함을 얻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은 것만으로, 율법에 따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나 율법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아담이 온전한 순종을 성취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의롭다함을 얻었을 것이고 틀림없이 그의 칭의는 단순히 소극적인 내용보다 더 많은 내용을 포함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으로서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율법의 의를 이룬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보증으로 삼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칭의 안에서 실질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우리의 두 번째 보증인이 되시는 그리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임하신 직무를 완수하시고 모든 시련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모두 준수하시기까지는 의롭다함을 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일을 이루신 이후에 부활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는데(벧전 3:18),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던 그 분은 바로 그 때 영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셨습니다(딤전 3:16).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면서 그리스도를 의롭다하실 때, 그리스도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굴욕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풀어 주시고 죄로 인한 더 이상의 수난이나 비하로부터 그리스도를 방면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하고 불멸하는 생명으로 그리스도를 인도해 들이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에 대한 상급인 승귀(乘歸)의 시작으로 그리스도를 이끌어 들이셨습니다.
참으로 신자의 칭의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신자들의 머리요 보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칭의와 교제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 것, 바로 이것이 신자의 칭의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죄의 형벌을 받으시되 개인의 자격으로 형벌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보증인으로서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형벌을 다 감당하신 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고, 바로 그 때 그 부활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 역시 개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을 모든 사람들의 보증인과 대리인의 자격으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위한 부활이 아니라 우리의 칭의를 위한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4장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그러므로 사도가 로마서 8:34에서 말하는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러나 이런 사실을 좀 더 직접적으로 교훈해 주는 성경구절은 따로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의 칭의가 단순히 죄사함이나 죄에 합당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의에 대한 상급인 내세의 영광도 얻게 되는 자격을 부여한다는 사실은 로마서 5:1-2과 요 5:24에 좀더 직접적으로 교훈되고 있습니다.
(롬 5:1-2)“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요 5: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답변 2. 두 번째 질문은 칭의가 결코 우리 자신의 어떤 미덕이나 선함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두가지 질문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질문 2-1.어떤 이유로 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습니까?
질문 2-2.어떤 이유로 칭의는 우리들의 선함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까?

답변 2-1 어떤 측면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칭의와 구원의 조건을 성취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볼 때는 믿음도 칭의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구원의 조건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의미로 이해할 때, 믿음은 구원과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것들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도 칭의가 가능하냐 불가능하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수많은 구절을 보면, 칭의와 구원에 관한 여러 가지 조건 명제 안에 그것들(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 파생되는 것들)이 다양하게 조건의 자리에 들어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바 믿음에 수반하고 믿음으로부터 파생되는 다른 것들이란, 하나님께 대한 사랑, 형제들에 대한 사랑,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선한 자격들과 행위들입니다.
또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음 이외에도 우리가 추구하고 이행해야 할 것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직접 제시하는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을 이행하거나 성취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지만, 반대로 우리가 그것들을 이행하지 못하거나 성취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멸망하고 말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믿음이 칭의의 유일한 조건이라면, “믿음은 칭의의 조건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라는 성경 구절의 의미를 과연 제대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분명히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그래서 칭의를 살 수 있는 값을 치르지 못하셨다면, 우리에게 그 어떤 자격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적당하고 합당한 일이 결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된 법을 따라 신자를 의롭다하시는 이유는 틀림없이, 신자가 의롭다함 얻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 주는 무엇인가를 이 믿음이라는 자격 안에서 보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이 자격 안에 신자가 의롭다함을 얻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기 때문에 신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리와 함께 죄사함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하는 표현을 보게 될 때, ‘믿음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에 대해서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사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요, 현재 다루고 있는 칭의 문제와 관련시켜 말하자면 우리를 칭의 은혜의 적법한 수혜자로 만드는 것이로구나!”라고 해석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여러 가지 것들도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는 것들 중에서 우리로 하여금 칭의 은혜를 얻기에 합당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오직 믿음 뿐입니다.

답변 2-2.어떤 이유로 칭의는 우리들의 선함을 모두 배제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말미암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의롭다하시는 은혜를 얻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도록 만들어 준다면, 그래서 우리가 그 은혜를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적당하거나 합당한 것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거룩이나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믿음 못지 않게 탁월하고 믿음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 있으며 믿음못지 않게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다른 부분들은 왜 우리에게 그만한 자격을 주지 못하고, 왜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인가?"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나 선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합당하다는 하나님의 판단이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자격이나 그 어떤 행동의 탁월함이나 선함을 고려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결코 믿음 안에 있는 그 어떤 탁월함이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이 은혜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얻는데, 믿음은 바로 그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관계나 연합은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권리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의 연합을 다음과 같은 연합에 비유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다. 몸의 지체들이 머리에 연합되어 있는 것. 몸의 지체들은 머리에 연합되어 있음으로써 머리에 있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나무 가지가 나무에 연합되어 있는 것. 나뭇가지가 나무의 수액과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나무에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연합되어 있는 것. 아내가 남편과 모든 소유를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남편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
율법에 보면 남편과 아내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 몸으로 간주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참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법적인 연합이 존재합니다. 그 결과 온 우주의 최고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둘을 하나로 여기십니다.
믿음은 그 사람 편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위에서 말한 연합을 이루게 만드는 바, 그 사람에게 있는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값주고 획득하신 모든 은혜를 누릴 권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성경의 표현대로라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모든 은혜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리스도 자신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소유했거나 우리가 그리스도께 연합한 결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측면에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있는 어떤 자격을 보시고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은혜에 대한 소유권을 그 사람에게 주시는 것과, 그 자격의 가치와 사랑스러움을 보시고 또는 그 자격의 탁월함에 대한 일종의 상급으로서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은혜에 대한 소유권을 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크게 다릅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참된 제자들은 특별한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그 관계로 인하여 성경은 그들을 일컬어 어떤 의미에서 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그리스도와 이런 관계나 연합을 맺기위해서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는 일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 쪽에서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려고 행하는 어떤 행동 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를 성사시키기 위하여 행하는 어떤 행동. 저는 믿음이 이런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감히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을 정의하거나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지를 단정지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정도로만 확실하게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곧 이전에는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분리되어 있던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될 수 있는 것, 또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된 이전 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앞서 언급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관계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어서 말하자면,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고 그를 영접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믿음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전에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즉 그리스도의 백성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하는 그리스도와 관계나 그리스도의 연합과 무관하게 살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그리스도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고 친밀함을 형성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소유권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와 연합하고자 하는 영혼의 적극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또는 믿음 자체가 믿는 사람들 쪽에서는 연합의 실제 행동이기 때문에,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소유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지적이고 활동적인 두 개의 존재나 인격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로 그들이 하나로 간주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쌍방이 자기 자신을 상대방에게 연합시키고자 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서로를 받아들이는 상호행동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을 서로 연합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에게 실제로 있고 그들 사이에 실제로 있어야만,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여기시는 일이 비로소 적법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주는 성질의 어떤 행위나 자격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바로 그것 때문에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하나로 간주하시고 인정하시는 일이 합법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로 그 행동이나 자격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를 믿는 사람들의 것으로 인정해 주시는 일 역시, 곧 마치 그리스도의 속죄와 공로가 믿는 사람들 자신의ㅣ 속죄와 공로인 것처럼 인정해 주시는 일 역시 지대한 타당성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는 말이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속죄와 모든 공로를 소유하게 하며 그리스도께서 그처럼 값주고 사신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게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신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람을 구주와 연합된 사람으로 인정하고, 또한 그 결과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합당하다고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이유는 바로 도덕적 적합성 때문이 아닌 특성적 적합성(그 사람이 구비하고 있는 자격들이 도덕적으로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이 구비하고 있는 자격들의 특성과 그 지위의 특성이 서로 일치하고 조화되고 동일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결단코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를 우리의 것으로 인정하시지도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의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리스도에게 적극적으로 연합하는 일이 없으면 결단코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은 행위언약에 의해서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게 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지도 않습니다. 행위 언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행위를 기뻐하시거나 그 사람의 순종에 내재되어 있는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증거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구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모든 행동을 그 안에 포함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는 영혼의 적극적인 모든 행동, 또는 소위 그리스도께로 나아감과 그리스도를 영접함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행동은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아무리 다른 것들이 믿음만큼 탁월하다 하더라도, 중보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오직 믿음 만이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이외의 다른 그 어떤 은혜나 그 어떤 미덕도 그 일만큼은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justifying faith)의 구성 요소에 들어가고 그 믿음의 특성에 속하는 것 뿐입니다.

논증 1. 그 사람을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방법을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구주의 모든 은혜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는 것을 합당한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이유 1. 죄인이 실제로 의롭다함을 얻기 전까지 짊어지고 있어야 하는 무한한 죄책(罪責), 곧 죄의 무한한 사악함이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생기는 무한한 죄책을 생각할 때, 그런 일은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죄의 무한한 사악함을 부인하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가 무한한 존재를 대상으로 범해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무한한 사악함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의 사악함과 가증스러움은 그 대상이 되는 존재안에서 그것 때문에 일어나는 손실에 비례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죄는 그 대상이 되는 존재가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상실하느냐에 비례하여 사악하고 가증스럽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무한히 존엄하신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순종하는 일이 필요했는데, 이와같은 일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까닭은 상대적으로 무한한 우리의 비천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불순종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불순종은 한없이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이 이룬 순종의 가치로서 우리가 행한 불순종의 비열함을 말끔이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가치한 것만큼 위대하고 가치있는 분이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아직 못한 죄인의 인격을 어느 정도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의롭다함을 아직 얻지 못한 죄인을 어느 정도 사랑스러운 대상으로, 불쾌함과 진노를 덜 불러 일으키는 대상으로 용납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이런 일이 하나님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직까지 그리스도를 실제로 소유하지 못하고 의롭다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죄책을 가진 존재로 남아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또 무한한 죄책은 죄사함을 받지 않는한 결단코 제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 안에 선한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무한한 죄책이나 무한한 비열함에 비할 때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선함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무한한 죄책에서 유한한 선함을 빼서 남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람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따라 그 사람을 보시고 그 사람에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칭의 이전에도 영적으로 선한 것이 사람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의롭다함을 얻은 후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경건함이나 탁월함으로써 인정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칭의에 있어서 사람(자연인)은 전적으로 가증스러운 존재로 고려됩니다.

이유 2. 구주를 통해서 어떤 사람을 의롭다하시는 일보다 먼저 앞서는 하나님의 법이 그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속하게 되는데, 모든 사람은 율법을 위반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 또는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정죄로부터 죄인을 자윸케 하시는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정죄된 상태 가운데 계속 갇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율법의 공의로움으로 어떤 사람을 정죄하신 후에 아직 그 정죄가 제거되지 않았는데도 그 죄인에게 있는 어떤 것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은 하늘과 땅의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에 걸맞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인류가 맨 처음부터 속해 있던 옛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하나님은 인류를 긍휼히 여기사 엄격하고 호된 옛 율법을 폐지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법 아래 두셨다. 좀 더 관대한 법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율법 자체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가 지금도 남아 있어서 우리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할 필요도 전혀없는 것이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율법을 만족시키고 성취하신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이 구주를 실제로 소유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의 미덕이 하나님 앞에서 조금이라도 인정받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만큼 매우 효과적으로 그 사람을 대적하는 힘을 계속 발휘합니다. 율법이나 하나님의 법 자체가 폐지되지 않는 한, 율법의 정죄는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이전이든지 아니면 그 사람이 구주를 소유하기 위한 사전단계이든지 그 사람을 효과적으로 대적하는 세력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논증 2. 어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즉 사람이 최종적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함으로써만 가능하고,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것은 지속적인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주장은 사람이 처음 복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에는 조건적으로만 의롭다함을 얻고 조건적으로만 죄사함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죄가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이나 죄에 당연히 따라야 하는 영원한 비참함에서 죄인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처음 영접하는 순간에 죄사함을 얻고 그와같은 비참함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아직 최종적인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고 오히려 앞으로도 남아있는 몇몇 조건들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는 것에 실질적인 자유가 유보되어 있다면, 그것은 조건적으로만 죄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이런 경우는 철저하게 그리고 실제적으로 죄사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죄의 형벌로부터 면제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만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현재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가 지속적으로 순종한다면 결국 죄사함을 받을 것이고 지옥으로부터도 실제로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을 따름입니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사도 바울의 위대한 교리를 휴지조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조건부 죄사함은 결코 죄사함이나 칭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든지 안 받아들이든지 모든 인류에게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복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도 진실하게 순종하기만 하면 최종적인 칭의를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모든 인류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미덕이나 순종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생각은 중보자의 영광을 훼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만 속하는 것을 사람의 미덕으로 가로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자리에 사람을 대신 올려놓고, 사람을 자기 자신의 구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답변 3.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란 넓은 의미로 쓰일 경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을 위해 행하시고 고난받으신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죄책에서 놓임받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순종을 모두 우리의 것으로 넘겨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으로 하나님 앞에 열납되고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만 하는 완전한 내적 의로움으로 대신 인정받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순종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고, 그 결과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완전한 순종을 이행한 것처럼 그에 따르는 혜택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에 대한 권리가 이렇게 전가된 의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전가하다’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어떤 사람에게 속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이 빌레몬서 18절에서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형벌로부터 건짐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시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시는 일이 똑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이 두가지 일이 꼭같이 필요합니다. 율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순종하시는 일이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시는 일과 똑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틀림없는 사실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셔야만 했던 까닭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의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우리 대신 완전한 순종을 이루어야 할 필요가 똑같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형벌을 감당하신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해 속죄를 하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책을 제거할 뿐이고, 그럼으로써 처음 창조된 처음 순간에 아담이 처해 있던 상태로 우리를 되돌려 놓는 것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형벌을 감당하셨다는 사실 만으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이 타당성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마치 아담이 아무런 순종을 하지 못한 상태인데도 사람으로 존재하자마자 영원한 생명과 확고부동하게 행복한 상태를 그에게 상급으로 주는 것이 타당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아담은 한 번도 죄를 범하지 않은 순진 무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 상급을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적극적으로 순종을 해야만 상급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이 있어야만 상급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우리의 죄책이 제거되었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적극적으로 순종하시고 선한 일을 행하신 것도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상급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형벌을 감당하는 것 외에도 무엇인가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적극적인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곧바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보다는 먼저 검증해 보시는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지와 행동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전적으로 복종하고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여 먼저 하나님의 권위를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속죄로 죄인의 죄가 속해졌을지라도 적극적인 의로움이 죄인에게 없는 상황에서, 영원한 생명을 죄인에게 하사해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영광은 결코 충분하게 옹호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받드시 있어야 하는 순종의 조건을 채우지도 않은 상황에서 죄인이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율법을 철회하셔야만 할 것이고, 약속된 상을 주셔야만 할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율법에 존경과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율법에 굴복시키시고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율법과 율법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크게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진실한 순종만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죄인을 의롭다 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재판장 앞에서 불완전한 의는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규범을 충족시키는 것 대신에 규범에 미달하는 것을 용납하는 것은 공정한 행위나 재판관다운 행위가 아닙니다.

재판관에게는 오직 법에 일치하는 것만이 의입니다. 법은 재판관의 규범입니다. 만일 재판관이 죄로 성립하는 것을 은폐하고 용서해 준다면, 그럼으로써 사실상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 재판관은 역할을 하고 있지 않거나 잘못 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가 없는 사람을 결코 의롭다 하실 수 없습니다!
칭의의 선언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칭의 선언에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완전히 의로운 사람으로 공포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은 의롭다함을 얻은 다음에도 또 다른 칭의를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그 사람의 죄가 제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는 그 사람의 칭의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의롭다고 칭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죄가 없고 결백하다고 선언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법과 관련하여 올바른 상태에 있고 생명을 상으로 얻기에 합당할 만큼 완전히 의롭다고도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우리의 보증인이셨기 때문에 사람의 죄책을 짊어지신 후에 고난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사면될 수 없으셨고 순종을 하시기 전까지는 상을 받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사면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 자격으로 사면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사면 안에서 사면됩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개인의 자격으로 순종에 대한 상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 자격으로 상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서 상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의롭다함을 얻으신 것은 두가지 모두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 대신 짊어지셨던 죄책으로부터 놓임받으셨다는 것과, 우리 대신 순종하신 일에 대한 상으로 승귀(乘歸)와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 모두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신자들만이 믿는 즉시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이런 의롭다하심에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예수는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등하셨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의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을 대신하는 자리에 서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고, 사람의 법 아래 굴복해야 할 어떤 의무도 없었으며, 어떤 상태로든 하나님께 복종해야 할 그 어떤 의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 언약이 먼저 체결되었고, 그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이 되셨고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 언약에 따라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율법 아래 처하기로 책임을 맡으셨고, 순종하고 고난받으시기로 책임을 맡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기로 책임 맡은 모든 일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실제로 행해진 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언약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행동하신 것을 보면 이 점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들이 실행되기 한참 전에도 그 모든 일들이 이미 실행된 것처럼 행동하시며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더불어 언약을 체결하신 이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순종해야 하고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두가지 책임을 모두 짊어지게 되셨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이 체결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보증인 또는 대표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순종의 행위는 목숨을 내어놓으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시는 일은 그리스도의 순종가운데 중심적인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없이 큰 어려움을 수반하는 명령에 대한 순종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순종을 시험하는 가장 중대한 시금석인 명령에 대한 순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종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입증하신 하나님께 대한 자기의 경외심과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경외는 그 순종에 수반하는 어려움만큼이나 위대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영광스러운 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까닭은 주로 이런 순종의 행위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우리의 구원을 획득한 유일한 순종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 생애를 통해서 한 순간도 빠짐없이 우리 구원의 공로가 되는 순종 행위를 이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일은 화목을 이루는 유일한 고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에 걸쳐 한 순간도 빠짐없이 당하신 모든 고난이 화목을 이루는 고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한한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그렇게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인격이 무한히 존귀하기 때문이요, 동시에 그런 순종을 이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무한한 대가를 자원하여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3. 복음적 순종과 칭의의 관계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나 복음적 순종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의 경우 선행이라는 자격으로나 그 안에 있는 도덕적 선함 때문으로는 칭의와 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런 행위들은 율법의 행위라는 자격으로나 도덕적 탁월함이라는 자격으로나 그것의 일부분이라는 자격으로도 칭의와 그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다운 삶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믿음을 겉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는 이유와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행위들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이유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이유로든 칭의와 관련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질문. 그리스도인다운 순종에 속하는 여러 가지 행위들은 이런 점에서 칭의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습니까?

답변. 이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믿음의 맨 처음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는지, 또 믿음 안에서의 견인(堅忍)이나 믿음의 지속적이며 갱신된 행위들도 칭의와 관련하여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 칭의는 특별한 방식으로 믿음의 첫 행위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믿음의 행위를 하는 그 즉시 실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음은 그 첫 행위에서 견인에 관하여 비록 연약하지만 진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다른 여러 가지 혜택들 중에서 견인에 관한 권리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칭의 사건에서 믿음의 견인이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믿음의 견인은 칭의와 확실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근거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반드시 포함되어야만 합니다.
저는 앞에서 칭의가 어떤 방식으로 믿음에 의지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자격이기 때문에, 또는 그 안에 적합성을 소유하고 있는 자격이기 때문에, 칭의는 믿음에 의지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견인에 대하여 숙고하는 일은 이와같은 적합성과 별도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견인과 이와같은 적합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그의 의를 주고 사신 영원한 은혜들을 소유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현재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만 이런 일이 적합합니까?
먼저 영혼은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거나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은혜들을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유하는 것은 그 안에 특성적 적합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적합성은 영혼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되 지속적으로 연합해야 효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은 이유 때문에 현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를 소유하기에 적합한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뿌리로부터 여러 가지 혜택을 계속해서 얻으려면 포도나무에 지속적으로 붙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하시는 은혜와 은총 등 여러 가지 혜택을 계속해서 얻으려면 그리스도 안에 지속적으로 거해야 합니다.
(요 15:6-7)“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9-10)“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맨 처음에 필요했던 그 이유와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적으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한번이라도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와 동일합니다. 영혼이 지금 현재 의롭다함을 얻은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이전에 한 번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으로는 안됩니다.
단순히 과거 한 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지금 현재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28에서 사도 요한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이 내세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단순히 과거 한 때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경력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맨 처음 이루어지기 위해서 믿음이 꼭 필요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지속되기 위해서도 그 연합을 가능케 해주는 자격인 믿음이 변치않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죄인은 믿음의 행위를 맨 처음 실행하자마자 실제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얻지만, 바로 그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영원한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의 적합성을 결정하는 한 요소로서 믿음의 견인을 고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처음 믿는 순간에 이루어지는 칭의의 행위에서 믿음의 견인을 믿음의 첫 행위에 사실상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고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에 의하면 참된 믿음은 반드시 견인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의롭다 하실 때에 믿음의 견인을 고려하시되 마치 믿음의 견인이 이미 다 완성된 것처럼 고려하십니다. 그리고 믿는 신자는 그것에 의해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의 견인은 믿음의 첫 행위에 들어있는 한가지 속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첫 믿음과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처음 믿을 때에 믿음의 견인을 그 믿음의 속성으로 생각해 주십니다. 그래서 칭의는 믿음의 견인이 완성되는 때까지 보류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믿음의 견인을 이와같이 생각해 주지 않으신다면, 칭의는 죄인이 실제적으로 믿음 안에서 견인하기 전까지 유보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실, 곧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칭의 행위에서 하나님께서는 믿음 안에서의 견인과 믿음의 장래 행위들을 믿음의 첫 행위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신다는 것은 다음의 사실을 통해서 더 명확해집니다.
즉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칭의 안에는 죄인이 영원토록 받아 마땅한 형벌과 관련하여 죄사함이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데, 죄인이 회심할 때 이루어지는 첫 칭의는 결정적이고 완전한 칭의이기 때문에, 이 죄사함은 과거의 모든 죄에 대한 용서뿐만 아니라 장차 범하게 될 모든 죄와 허물에 대한 용서까지도 포괄하시는 죄사함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 칭의 행위 안에서 믿음의 견인을 믿음의 첫 행위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순리대로 보자면 ‘죄사함’이라는 것은 ‘범죄’가 성립한 이후에 그리고 용서받아야 하는 죄와 관련된 회개와 믿음의 행위 이후에 오는 것이 맞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도 그렇고 성경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가령 시편 32편을 보십시오. 시편 32편 첫부분에서 다윗은 죄사함에 관해서 말합니다. 이 때 다윗은 자신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오던 차에 범했던 죄에 대해서 말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튼 다윗은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죄를 범한 다음에, 그리고 그 죄와 관련하여 자신이 회개하고 믿은 다음에 죄사함이 베풀어졌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에서 사도 바울은 다윗이 말한 이런 죄사함을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실례로 사용합니다.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언급한 죄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한 죄일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시편에서 언급한 죄사함은 선지자 나단이 사무엘하 12장 13절에서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라고 말했던 것을 볼 때, 죽음 곧 영원한 형벌로부터의 사면일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포만 시간 순서 상으로 다윗의 범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죄가 용서된 일자체도 순리대로 그 죄와 관련된 다윗의 회개와 믿음이 있은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무엇을 보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시편 32편에 회개와 믿음이 있어야만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은 맨 처음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에 영원히 의롭다함을 얻고 죄의 영원한 형벌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는 맨 처음 믿음과 회개 속에 사실상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회심이후에 범하는 죄들에 대한 회개와 그런 죄들과 관련하여 구속주를 믿는 믿음, 또는 그와같이 실제적인 회개와 믿음을 본성과 기질로 소유하고 있는 마음 안에 그런 습성과 원리가 지속되는 것까지도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확실히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는 맨 처음 믿음과 회개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회심 이후에 범해진 죄에 대한 용서 자체는 그 죄들이 범해진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 행위 다음에 순리를 따라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곧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과 회개가 맨 처음 칭의에서 고려되는 것과 똑같이 회심이후에 범하게 되는 죄들도 맨 처음 칭의에서 고려된다는 것입니다.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회개와 믿음도 의롭다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맨 처음 회개와 믿음 안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마치 회심이후에 범하게 되는 죄로부터 신자들을 의롭게 하시는 일이 맨 처음 칭의에 사실상 내포되어 있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하여 믿음의 첫 행위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 입증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만일 믿음의 첫 행위만 칭의와 관련되어 있고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칭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면, 어떤 문제들이 파생되겠습니까?
당연히 믿음의 첫 행위가 아닌 다른 행위로는 절대 칭의를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일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로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면, 그런 믿음의 행위들을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은 칭의의 일부분인데, 앞에 전제한 것에 의하면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를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회심한 사람들이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옳지 않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말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어떤 복을 얻고자 하나님께 바치는 기도는 그 복과 관련하여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믿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는 다른 것이 아니라 믿음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그런 복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인데, 앞에 전제한 것에 의하면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라고 했으므로, 결국 그런 복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옳지 않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기도 제목으로 사용하기에 또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에서 기도 제목으로 사용하기에 부적절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결국, 그런 기도 제목을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께서 잘못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가룟 유다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이미 회심한 사람들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도 제목을 사용하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기도 제목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실 때 염두에 두고 계셨던 ‘죄’는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죄가 응당 받아야 하는 형벌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지고 있는 일만 달란트 빚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죄로 인해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형벌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죄로 인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면케 해주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에 지고 있는 빚을 모두 탕감해 주는 것은 칭의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전제한 것에 의하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심한 이후에 사람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거나 죄책으로부터의 구원과 죄사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은 결코 의무가 될 수 없다’고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칭의와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생각과 그렇기 때문에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을 통해서 칭의를 추구하는 옳지 못하다는 생각은 또다른 문제를 초래합니다. 이런 생각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믿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과 평안을 얻지 못하도록 그들을 영원히 단절시켜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의롭다함을 얻는 믿음의 본분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같은 신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게 되고 그것을 인식함으로써 신자들은 의롭다하는 믿음을 통해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로부터 그와 같은 기쁨과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에 관하여 확신이 없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처럼, 이런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정말로 믿음의 행위였는지도 확신치 못하고 있고, 따라서 그런 믿음의 행위를 통해서 실제로 기쁨과 평안을 얻었는지도 확신치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제일 좋은 해결책은 그와같은 축복을 얻기 위해 바로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렇게 해도 좋다는 정당한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해결책으로부터 단절되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쩌면 이 사람은 이미 회심을 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 사람이 이미 회심한 사람이라면, 이 사람은 그와 같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바로 지금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죄사함을 얻기 위한 합당한 방편이 아니라고 전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죄사함을 얻기 위한 합당한 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믿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을 결코 합당하게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참된 믿음의 행위라 할지라도 매우 연약한 믿음의 행위들이 있습니다. 또 회심 이후의 믿음의 행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믿음의 첫 행위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의 첫 행위는 자궁 안에 있는 태아의 최초 태동처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믿음의 첫 행위는 굉장히 연약한 행위일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그것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아무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참으로 믿음의 행위였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확정짓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과 많은 경험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행한 믿음의 첫 행위가 정말로 참된 믿음의 행위였는지를 확정짓지 못해 안절부절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상당한 정도로 만족했던 사람들까지도 크게 퇴보하고 타락할 경우 쉽게 영원한 형벌에 대한 큰 두려움에 빠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은 회개를 통하여 죄를 버리고 죄로 인하여 응당 받아야 할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 지금 그 자리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만일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는 것이 이런 방법으로 얻어질 수 없다면, 그 방법은 구원받을 수 있는 합당한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회심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행위도 우리의 칭의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차원에서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곧 회심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화평과 죄사함을 얻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어떤 문제들이 생기는 지를 말씀드림으로써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훨씬 더 분명하고 직접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위대한 약속과 관련하여 아브라함이 행사했던 믿음의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이 보인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장 6절 말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이 행사한 이 믿음의 행위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4장 전체와 갈라디아서 3장 전체에서 이신칭의에 관한 자신의 가르침을 확증하면서 정말 매우 강력하게 역설하는 중요한 실례요 증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 이 믿음의 행위가 아브라함이 행사한 믿음의 첫 행위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이 행위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본토와 친척을 떠난 지 오래 후에 행해진 것이었고(히 1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탁월한 친구로 인정을 받은 지 오랜 후에 행해진 것이었습니다.
제가 주장하고 있는 사실을 입증할 더 분명하고 직접적인 증거는 아브라함이 행사한 믿음의 행위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행사한 믿음의 행위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회심한 이후에 행한 모든 일에서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추구했는지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얻고자 했으며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의를 획득하고자 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빌 3:8-9)“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두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동일한 내용을 반복해서 말해줍니다. 곧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의 은혜에 참여하기 위하여 자신이 어떻게 수많은 고난을 통과하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게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빌 3:10-11)“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에서 ‘부활’은 사도 바울이 다른 곳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대로 특별히 칭의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칭의였습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던 그리스도께서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와같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고자 노력했으며, 그렇게 하여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신은 스스로를 이미 얻은 자로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계속해서 달려가야 할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해줍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믿음의 견인은 칭의의 적합성에 꼭 필요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죄인이 믿음의 첫 행위에서 의롭다함을 얻고 믿음의 견인이 약속된다고 해서 믿음의 견인이 칭의의 적합성에 덜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맨 처음 칭의에서 믿음의 과거 행위를 고려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미래 행위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약속과 아직까지는 자기 자신의 약속 안에서만 보여지는 자격의 적합함까지도 고려하십니다.

이처럼 믿음 안에서의 견인이 구원에 필요하다는 사실, 곧 단순히 구원의 전반적인 부수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근거를 제공해 주는 대상이 되기 때문으로도 구원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성경 구절을 살펴 볼 때 명백한 사실로 보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서너 개의 성경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히 3:6)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2)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결정적인 칭의의 적합성이 믿음의 첫 행위뿐만 아니라 믿음 안에서의 견인에도 달려있기 때문에 흔히 ‘양심 안에서의 칭의의 표명(表明)’은 믿음의 첫 행위보다는 그 이후에 있게 되는 믿음의 행위들로부터 훨씬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첫 행위가 칭의와 관련을 갖게 되는 독특한 차이점은 소위 부수적인 차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첫 행위를 조금이라도 특별하게 고려하시거나 믿음의 첫 행위가 우리 구원의 일에 있어서 특별한 성격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점이 아니라. 시간적인 상황 때문에 즉 시간상 믿음의 첫 행위가 다른 행위보다 먼저 오기 때문에 발생하는 차이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같이, 참으로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적이고 순수하며 믿음있는 순종은 우리의 칭의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며 성경도 때때로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의 순종에 관하여 그렇게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성경은 그리스도인다운 행실과 복음적인 순종을 일컬어 유일한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견인하는 믿음의 증거라고 종종 말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연합하고, 그 결과 칭의에 적합성을 부여합니다. 믿음은 그저 싸늘하게 식어 있는 원리로 마음속에 남아있음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존재하고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그렇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순종은, 그것이 참으로 복음적인 순종이며 마음 속에 보내심을 받은 아들의 영으로 이행되는 순종이라면,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순종은 그 영혼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모든 복음적 선행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이룬 선행입니다. 내면에서 우러나오고 영혼의 활동으로 일어나는 모든 복음적 순종의 행위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광의 구주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새롭고도 유력한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2:20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라고 가르칩니다(골 3:17).

한편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믿음의 첫 행위를 고려하실 뿐만 아니라 장차 견인하는 믿음의 다른 행위들까지도 함께 고려하신다는 사실은 로마서 1:17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히브리서 10장 38-39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순종은 오직 믿음의 증거라는 자격으로만 칭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자격으로는 순종은 절대 칭의와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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