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기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위선자들(조나단 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

by 김경호 진실 2011. 9. 20. 09:22

본문

 

기도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위선자들(조나단 에드워즈)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욥기 27:10)

이 말씀에 관하여 나는 관찰한다.

1. 여기서 말하는 그는 위선자인즉, 만일 당신이 본문 구절에 앞서는 두 구절을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위선자가 이익을 얻었으나 하나님이 그 영혼을 취하실 때에는 무슨 소망이 있으랴 환난이 그에게 임할 때 하나님이 어찌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랴 그가 어찌 전능자를 기뻐하겠느냐 항상 하나님께 불러 아뢰겠느냐.” 욥의 세 친구들은 시종 욥을 위선자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본 장에서 욥은 그의 신실함과 완전함을 주장하며 그 자신의 행동이 위선자가 취하는 행동과 얼마나 다른지를 제시한다. 특히 그는 끝까지 경건과 의의 길을 보전하며 지켜 온 그의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결의를 선언한다. 당신은 이 사실을 욥기 27장의 처음 여섯 절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그는 이 견고함과 인내심이 경건을 지지하지 않는 위선자의 성격과 어떻게 상반되는지를 보여 준다. 2. 우리는 본문에서 위선자에 대한 해독(解讀)과 관련하여 경건의 의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기도의 의무 혹은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것임을 관찰할 수 있다.
3. 이 의무와 관련된 위선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있다. 그는 잠시 동안 기도를 계속할 수 있고 필요한 때에 하나님을 불러 아뢸 수 있다.
4. 주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항상 의무를 계속하려는 위선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가 항상 하나님을 불러 아뢰겠느냐?” 그것은 질문 형식이다. 그러나 말씀은 강한 부정의 힘을 갖고 있든지 주장의 힘을 갖고 있다. 필요한 때에 위선자가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 아뢰어도 그 기도를 항상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교리 : 위선자가 필요할 때에 기도의 의무를 아무리 계속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들이 하는 방식일 뿐, 잠시 후면 대부분 그 기도에서 떠나 버린다. 이 교리를 말함에 있어서 내가 제시할 것이 있다.
1. 위선자들은 필요할 때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가.
2. 잠시 기도한 후 대부분 이 의무에서 떠나는 그들의 태도는 어떠한가.
3. 왜 이것이 위선자들이 취하는 방식인지에 대한 몇 가지 이유들.

1. 나는 위선자들이 필요한 때 기도의 의무를 얼마나 빈번히 계속하는지를 보여 주려 한다.

(1) 그들은 보편적인 조명과 감동을 받고 난 후 잠깐 동안 기도한다. 각성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하나님을 불려 아뢸 수 있고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매우 일관되게 할 수 있다. 그 후에 그들은 어떤 녹아드는 감정들,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한 마음의 감동, 혹은 어떤 애절한 격려, 그리고 거짓 기쁨과 위로를 가질 수 있다. 이런 인상들이 지속되는 동안 그들은 은밀한 의무를 감당하며 하나님을 불러 아뢸 수 있다.

(2) 희망과 그들이 지닌 좋은 자산에 대한 고백을 한 후에, 그들은 종종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잠시 동안만 계속한다. 잠시 동안 그들은 그들이 가진 희망에 영향을 받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자연적인 조건에서 구원해 내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을 주셨고, 그럼으로써 이후에 두려워하게 될 영원한 불행에서 안전한 상태로 이끄셨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친절로 그들은 많은 감동을 받고, 잠깐 동안 자신들 내부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는 자기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고무된다. 이제 하나님을 향한 이 감정이 지속되는 동안, 그들에게 경건의 의무들은 즐거워 보인다. 그들이 다락방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은 어떤 기쁨이기도 하다. 그리고 현재로서는 살아 있는 한,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일을 지속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이전에 가졌던 의도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부분적으로 그들은 생생한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계속할지 모른다. 그들은 항상 하나님을 추구하는 일을 계속하고자 시도했다. 그리고 지금은 느닷없이 그만두게 된 것이 그들 자신의 마음에 큰 충격으로 남는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들 자신이 예상한 관념의 힘을 통해서 오며, 항상 믿어 왔던 것, 즉 경건한 사람들은 경건 생활을 계속하고 그들이 행하는 선은 아침 구름과 같지 않다는 관념의 힘에서 온다. 그러므로 기도의 의무에 사랑이 없어지고 기도의 힘이 점점 사라지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들의 희망을 사랑하고 있는데, 그 희망은 그들이 뒷걸음질하는 과정에 거짓 희망으로 드러나며 결국은 그 뒷걸음질이 그들의 희망을 빼앗아 버린다.

그들이 항상 가르침을 받는 일이지만, 만일 뒷걸음질이 거짓 희망의 표지라는 사실을 보는 자리로 나아간다면 그들은 두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들의 희망은 그들에게 사랑스러운 것이며, 그 희망이 참된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분명한 증거를 보는 일은 그들을 두렵게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받는 조명과 감동의 힘이 끝난 이후 상당한 시간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기도의 의무를 미워한 이후, 기도했다는 기쁨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만일 위선자임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어떤 형태로든 감당한다. 이는 잠시 동안 외식적인 경건을 유지하는 것이 될 수 있고, 때로는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 하는 자리로 천천히 진행하는 경우가 된다. 그들은 기도 의무의 자리를 갑자기 떠나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가진 거짓 평화에 큰 충격을 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양심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기까지, 그 문제를 덮어 버릴 수 있는 꾀와 구실을 발견하기까지, 그리고 그들 자신이 보기에 그들이 가진 희망의 진실이 잘 유지되기까지 점진적으로 게을리 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2. 그러나 결국은 잠시 후 대부분 이 의무의 실천을 두고 떠나는 것이 위선자들이 태도이다.
위선자들이 갖고 있는 밖으로 나타나 보이는 선과 경건은 계속 지속되는 성격이 아님을 우리는 종종 배워 왔다. 그것은 특히 그들이 하는 기도 의무의 실행과 관련된 것이며 특별히 은밀한 기도와 관련된 것이다. 그들은 이 의무를 누락할 수 있고, 그 누락은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고백을 누가 알아차리겠는가? 그러므로 그들 자신의 명성은 그들로 하여금 기도 실행을 잠잠케 하지 못한다. 만일 어떻게 게을리 하는지를 누구라도 알아차린다면, 그것은 그 알아차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갖는 자비에 엄청난 충격을 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주시하는 사람들의 관찰 아래 추락하지 않는다. 적어도 많은 사람들의 관찰 아래서도 추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의무를 누락할 수 있고 회개한 사람들의 신용을 여전히 확보할 수 있다.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평화에 많은 충격을 주지 않고 점차 은밀한 기도 없이 살아가려 해도 사람들은 매우 광범위하게 그가 참된 회개자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그들의 인식을 바꾸려는 수단을 찾고, 그들이 가진 원리들을 가져와 그들의 성향에 부응시키려 한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일들에 대해 가진 인식에서, 사람은 회심자가 될 수 있으나 이 의무를 매우 게을리 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때가 되면 그들은 모든 것을 잘 짜 맞추며, 하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육신적인 기호(嗜好)를 탐닉하며 극대화하면서 게으름에 더욱 빠지고, 이제는 대부분 기도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들은 실로 갑자기 그런 삶에 빠지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의 사역이 되어야 하며, 시간은 그런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들은 점차 막강한 원수들이, 그리고 조용하고 안정된 양심이 마침내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내용이 본 교리가 주장하는 것인 반면, 그것은 위선자가 취하는 방식인데, 그는 얼마 있지 않아 엄청날 정도로 이 의무에서 떠나 버린다. 나는 당신에게 제안하고자 한다.

(1) 의도된 바는 아니지만, 개방적인 기도(open prayer, 나 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기도)에 대한 외면적인 관심은 삶의 막바지까지 보편적으로 지속된다. 그들은 회중 가운데서 공공 기도의 자리나 가족 기도회의 자리에 있을지 모른다. 그와 같은 밝은 장소에서 이 사람은 보편적으로 충분히 각성되기 이전에 기도한다. 신중한 종교에 대해 그 어떤 핑계도 하지 않는 수많은 사악한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육신적인 계획이 방해하지 않거나 젊음의 기쁨이나 유희가 방해하지 않으며 그들의 사귀는 헛된 동료가 부르지 않는 한 회중긍이 하는 공공 기도에 참여한다. 또한 개인 기도와 그들이 살고 있는 가족 기도회에 참여한다. 그러고 난 다음, 그들은 가족 기도회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살아 있는 동안 기도하는 일을 계속하지만, 진실로 하나님을 불러 아뢰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하는 그와 같은 기도는 그들 자신이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로지 자기들의 신용을 위해서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하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기도회에 참여하고 있을지 몰라도, 여전히 그들 자신의 올바른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욥기 15장 4절에서처럼 말씀과 관련된 사람들인데, 그들은 아직도 종종 가족 기도회나 공공 기도회에 참석하고 있다.

(2) 그러나 그들은 상당히 은밀한 기도의 실천에서 떠나 있다. 그들은 점차 기도에서 떠난다. 그들은 처음에 몇 가지 특별한 시험을 당할 때 기도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젊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세속적인 사업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한때 기도를 빼먹었다. 그 이후 그들은 또다시 기도를 빼먹었다. 그러므로 이제 기도를 빼먹은 것은 일상사처럼 되어 버렸고, 얼마 지나서는 거의 기도하지 않게 된다. 아마도 주일날 교회에 가서나 하며, 때로는 다른 날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사에서 물러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그리고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 은밀한 곳에서 매일 꾸준하게 해야 할 기도를 중단했다. 그들은 간혹 양심을 편하게 하기 위해 조금 기도하며, 그들이 가진 낡은 희망을 되살리기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충격이 될 것이기 때문이며, 결국은 자신들을 회심자로 부르기 위해 양심을 교묘히 다루어 전혀 기도 없이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밀한 기도의 실천은 사라지고 없다.

3. 이제 왜 이런 방식이 위선자의 태도인지 그 이유를 다룰 차례이다.

(1) 위선자들은 기도의 영(the spirit of prayer)을 결코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이 의무를 이행하는 데 외부에서 자극을 받을지 모르며, 매우 성실하고 감정적이지만 항상 진정한 기도의 영이 없다. 기도의 영은 거룩한 영이며 은혜의 영이다. 스가랴 12장 10절은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라고 말씀한다. 진실한 간구의 영이 있는 곳은 어디나 은혜의 영이 있다. 진실된 기도의 영은 성도들의 마음에 내주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이 영이 임할 때, 그 영은 자연적으로 거룩한 호흡과 열망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다. 그 영은 자연히 하나님께 이끌리어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대화한다. 그러므로 그 영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신다(롬 8:26). 하나님의 영이 성도를 위해 중보하시는 바, 어떤 면에서 그 영은 성도들의 기도를 기록하시며, 그들을 하나님 앞에 이끌어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영을 쏟아 붓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영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빌립보서 3장 3절은 말씀하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리고 요한복음 4장 23절은 말씀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진실되고 경건한 자들은 양자의 영, 자녀의 영을 가진 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 양자의 영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자녀의 영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영은 은혜로우시고 거룩하신 영이기 때문이며, 오로지 참된 거듭남의 사역에만 허락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것은 경간한 자의 구별된 특징으로 일컬어진다. 시편 145편 18-19절은 말씀한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요엘 2장 32절은 말씀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진실로 위로부터 난 자는 의당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한 탄원을 하며 그의 영혼을 쏟아 붓는다. 이것은 마치 호흡이 육체의 본성과 생명에 수반된 자연적인 현상이듯이 새로운 본성과 생명에 뒤따르는 자연적 현상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 새로운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이 갖고 있던 그런 조명과 감동은 달아나 버리고 본성은 변화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다. 그러므로 기도는 자연히 그들 안에서 질식되어 죽었고, 그들의 영혼의 본성 안에는 기도를 계속한 근거가 없어져 버렸다. 기도는 오로지 그들의 본성에 미치는 어떤 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다가 인간의 본성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하면 쇠하여져 버린다.
참된 회심자의 영은 참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이며, 자연적으로 그 영은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의무로 이끌려 가며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그 일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위선자는 그와 같은 영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거스르는 적개심의 힘 아래 놓여 있으면, 자연히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일을 회피하는 경향을 갖는다.
참된 회심자의 영은 믿음의 영이며 하나님의 힘과 지혜와 자비를 의지하는 영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영은 자연히 기도에서 나타난다. 참된 기도는 표현된 믿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야고보서 5장 15절에서 믿음의 기도에 관한 말씀을 읽는다. 참된 크리스천의 기도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자 호흡처럼 말씀 안으로 이끌려 가는 영혼의 의지이다. 그러나 위선자는 믿음의 영이 없다. 그는 하나님을 참으로 의지하지 않고 실로 자기 의존적이다.

위선자들이 가진 보편적인 확신과 감정에 관하여,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잠깐 동안 기도의 의무를 유지하게 하는 보편적인 확신과 감정에 관하여 말하면-그것들은 마음의 밑바닥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 어떤 본성의 변화도 동반하지 않는다-매우 조그만 일도 쉽게 그것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세상 염려는 보편적으로 위선자들을 억눌러 질식시키며, 젊음의 쾌락과 허무가 종종 그들에게 밀어닥친다. 그리고 그것들은 기도 의무의 끊임없는 실천을 끝내게 한다.

(2) 위선자가 거짓 회심을 가졌을 때, 그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의 필요는 이미 충족되었고 그가 가진 욕구는 이미 응답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은혜의 보좌에서 더 이상 할 일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는 결코 그 어떤 다른 욕구에 대한 감각이 없고 지옥으로부터 안전하기만을 원할 뿐이다. 그리고 필요가 충족되었는데(그가 생각하는 바와 같이) 어떻게 그의 욕구가 회심되겠는가! 성실한 요구를 가지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이유가 어디 있는가? 그는 위험에서 벗어났다. 그가 두려워하던 모든 것이 제거되었다. 그는 이제 충분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무얼 더 원하란 말인가?

각성하고 있었을 때, 그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로 마음이 뒤끓었다. 그는 시종 지옥에 대해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그 이후, 회심했다는 생각으로 말미암아 그는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그의 희망이 손상 받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겉으로 보기에 잠시 동안 기도의 의무를 하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기도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는 그는 기도를 계속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점차 그는 기도하는 일을 완전히 놓쳐 버린다. 위선자가 하는 사역은 그가 회심할 때 끝났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리게 서지 않는다.
그러나 참된 회심자는 이와 상반된다. 그가 하는 사역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충족되어야 할 큰 일과 필요를 갖고 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가난한 자로, 진 자로, 힘없는 피조물로 보며 하나님의 크고 계속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로 간주한다. 그는 하나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거짓 회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자족한 자로 보게 만든다. 그는 자기를 부유하며, 선을 많이 쌓았고, 아무것도 필요치 않은 자로 말한다.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지, 얼마나 가난하고 눈이 멀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발가벗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참된 회심 이후, 그 영혼은 자신의 중요성과 허무함을 있는 그 자체대로 알며, 그 앎은 감소되기보다는 증대된다. 그 영혼은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에 대한 보편적인 의존을 여전히 의식한다. 참된 회심자는 자기가 지니고 있는 은혜가 완전치 못함을 지각하며, 그가 바라는 모든 것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져 있다는 것을 지각한다. 그러나 그 대신, 회심에 의해 그의 내부에는 그가 이전에 전혀 갖지 못했던 새로운 욕구가 잉태된다. 그는 이제 자기 안에 거룩한 기호(嗜好), 의에 대한 거룩한 배고픔과 갈증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며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와 친교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간다. 그렇다. 회심 이후 그가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는 기도는 계속 증가한다.

(3) 위선자가 자신의 자산에 대해 갖는 희망은 하나님의 명령이 이전에 그의 양심 위에 끼친 힘을 제거한다. 그래서 그는 이제 기도하는 거룩한 의무를 과감하게 무시한다. 기도의 의무를 요구하는 명령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하다. 마태복음 26장 41절은 말씀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에베소서 6장 18절은 말씀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마태복음 6장 6절은 말씀한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 자신은 생각하기를, 위선자가 지옥에 들어갈 계속적인 위험에 처해 있었던 한, 그는 이 명령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기를 지옥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한 이후, 그는 용감해졌고 성경에서 명령하는 가장 분명한 명령을 무시하면서 살기 시작했다.

(4) 잠시 후, 기도를 하지 않는 죄스러운 행위로 되돌아가는 것이 위선자의 방식이다. 그들은 확신 아래 있던 동안 그들의 삶을 갱신하고 올바른 길을 걸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회심 이후 이 개혁은 잠시 동안 지속되며 희망과 거짓 위로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점차 사라지면, 그들의 옛 육정은 점차 되살아나 개가 토한 데 돌아가듯 옛 삶으로 되돌아가며, 잘 씻긴 돼지가 진창 구덩이로 되돌아가듯 한다. 그들은 육신적인 일로, 세속적인 행위로, 이전에 가졌던 자만심과 자기주장의 행위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의심할 나위 없이 이런 것들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기도 골방을 뒤흔들게 한다. 죄를 짓는 일과 기도하는 일은 양립할 수 없다. 만일 한 사람이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계속 이행하고 있다면, 그 기도는 그로 하여금 의지적인 죄를 짓지 못하도록 한다. 다른 한편, 만일 그가 죄를 짓는 행위 가운데 있다면 그 일은 그로 말미암아 기도하지 못하게 한다. 그 일은 그의 마음에 다른 생각을 불어넣어 기도 의무를 이행할 의향을 갖지 못한다. 그 일은 그를 역행한다. 하나님을 거슬러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매일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갈 뜻을 품지 못하며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도망치려 할 뿐이다. 아담이 금지된 실과를 먹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도망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자신의 육욕에 통치권을 넘긴 이후에 기도의 의무를 견지하려는 것은 양심을 크게 동요시킨다. 그 일은 그를 대항하여 그의 양심에 자유를 부여할 것이다. 만일 그가 그의 연약함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즉시 아뢰려고 한다면, 그의 양심은, 말하자면 그의 얼굴에서 날아다닐 것이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은 그들의 사악한 행위들을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기도를 차단한다.

(5) 위선자들은 하나님을 찾는 일에 있어서 인내의 대가와 인생의 종착역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가치를 결코 계산하지 않는다. 인생의 종착역까지 인내를 갖고 기도를 계속하는 것은 많은 주의와 근신과 수고를 요구한다. 육과 세상과 마귀는 기도하는 일을 한없이 방해하며 크리스천들은 기도를 방해하는 수많은 유혹에 직면한다. 이 의무를 이행하는 데 인내하려는 그는 일반적으로 경건 생활에 많은 수고를 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경건의 의무들에 바치고자 하는 생각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잠깐 기도하는 것 같다가 이내 지쳐 버리고, 감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기도하는 일을 진저리나고 싫증나는 일로 아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6) 위선자들은 그들의 의무를 끝까지 감당하는 길에서 그들을 붙들어 주기 위해 필요한 영적 은사들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약속에 관심이 없다. 하나님은 참된 성도들에게 그들을 버리시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레미야 32장 40절은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의무를 이행하는 길에 있는 그들을 지키실 것을 약속하셨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4절은 말씀한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라 또한 이루시리라.” 그러나 위선자들은 이 말씀들에 대해 관심이 없고 마찬가지로 약속에도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연약하여 언제든지 떨어져 나갈 수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굳게 의존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이 영이 떠나가시면, 그들은 이내 부주의하게 되고 세속화되며, 겉으로 보이는 헌신과 경건을 끝장나고 말 것이다.

적 용

사용 1. 나는 참된 회심자가 되는 희망을 품었으나 자신들이 생각하는 회심이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방치해 두었고, 일상 기도의 의무를 빠뜨리므로 말미암아 희망을 내던져 버린 자들을 권면하고자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일에서 떠났다면, 지금은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상상으로 당신 자신에게 아첨하던 일과 거짓 희망을 떠날 때이다. 아마도 당신이 그렇게 하기란 무척 힘들 것이다. 인간이 하늘의 희망을 흘려보내는 것, 한때 의지했고 상당한 기간 붙들렸던 희망을 흘려보내는 일은 참으로 힘들다. 참된 회심은 드문 일이지만, 한때 거기에 정착하고 붙들었던 회심의 거짓 희망에서 떠나는 일은 더더욱 드문 일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자신들이 위선자인 것을 다른 사람들이 확신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그런 것들은 정작 자신들을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것들과 자신들이 지닌 자비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추방시키도록 작용하는 그런 것들은 정작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자신들을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보다 자신들을 위해서는 더 큰 관용(allowances)을 베풀 수 있다.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 그들의 이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때 그들 자신의 희망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해결할 길은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경우가 교리에서 말하는 그런 경우라면, 당신은 당신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더 나은 희망과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다른 역사, 곧 더 완전하고 효과적인 것을 찾을 때이다. 당신의 마음속에 뿌려진 씨앗이(처음에는 싹이 나서 무성하게 자라는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태양의 열기로 시들어 가거나 가시로 기운이 막히는 것을 경험적으로 보고 알 때, 그 씨앗이 어떤 종류의 땅에 뿌려졌는지를 보여 준다. 또한 돌짝밭인지 가시밭인지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속에 인내로 열매를 생산할 좋은 땅이 될 수 있는 어떤 다른 변화를 겪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받아서 그 비판을 바꾸는 일에 당신이 주체가 되는 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당신이 가진 희망을 내던져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당신이 인정을 받든 저주를 받든, 목회자에 의한 것이든 사람들에 의해 받는 것이든, 지혜로운 자들에 의한 것이든 지혜롭지 못한 자들에 의한 것이든, 사람에 의해 판단을 받는 것은 아주 작은 일이다. 고린도전서 4장 3절은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고 말씀한다. 민일 당신의 선함이 아침 구름과 일찍 맺힌 이슬방울 같은 것으로 증명되었다면, 만일 당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이름을 불러 아뢰는 일에서 멀리 떠났다면, 성경은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을 선고한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에서 당신에게 우호적인 모든 지혜롭고 경건한 사람들과 목회자들의 판단을 받는 것보다 수천 배가 된다.

당신이 사물을 평가하는 관점에서 보아,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관하여 자비를 베풀 의무가 있고, 당신이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일들을 잘못 제시하거나 그릇된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진실로 회심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들어갈 영원한 상태에 대한 희망을 세울 터전은 얼마나 불행한 터전인가!

여기서 나는 당신의 희망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꼭 당부해야 할 몇 가지 특별한 것에 당신이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첫째, 왜 당신은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해롭게 하는 그 희망을 붙들 것인가? 거룩한 희망, 하늘로부터 내려온 희망이 그와 같은 영향을 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일인가? 아니다. 확실히 그와 같은 해로운 영향은 순결과 영광의 세계에서 오지 않는다. 그 어떤 독도 하나님의 정원에서 자라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죄로 이끄는 희망은 이후에 그들을 지옥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사악한 삶을 살도록 힘을 주며 당신 자신의 경험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이 좋지 못한 그와 같은 희망을 왜 붙들 것인가? 확실히 그런 삶은 은밀한 기도와 같은 거룩한 의무를 태만히 하며, 그 의무를 즐길 수 있는 하나님의 확고한 명령에 불순종하는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길은 지옥행의 길이 아닌가?

만일 당신이 지닌 희망의 성격과 경향에 대하여 당신이 경험하는 바가 당신에게 그 경험의 오류를 확신시켜 주지 않을 것 같으면 무엇이 그 일을 감당하겠는가? 당신은 당신의 희망을 견지할 결정을 내리므로 그 희망이 불건전하고 해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는가? 당신은 지옥에 갈 때까지 그 희망을 굳게 붙들 셈인가?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희망에 매달리고 그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어서 지옥의 불꽃이 그들의 팔을 풀어헤쳐 그 팔이 붙들고 있는 것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 한다. 심판 날 그 희망에 안주하고 있었던 당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하나님께서 책임을 물으실 때 과연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생각하라. 고작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그들이 당신의 회심이 참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충분한 답변이 될 것인가?

확실히 사람들이 하나님은 더 많은 지혜를 갖고 계시지 않는다고 상상하거나, 위로와 영생의 희망을 내려 주시는 그 어떤 방법도 고안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그분을 버릴 수 밖에 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치명적인 어리석음이다.

둘째, 당신은 무엇보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과 일치하도록 하겠는가? 만일 당신이 가장 절친한 세상 친구와 당신이 즐기는 세상의 즐거움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을 갖고 있지 않다면, 성경은 당신이 참된 크리스천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진정으로 그와 같은 영을 갖고 있다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기도의 실천에 성장이 뒤따르지 않겠으며, 하나님의 자녀의 생활인 그와 같은 분명한 의무를 습관적으로 싫어하겠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리에 없는 것을 싫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주 찾아가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거워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그로부터는 점차 멀어지고 소원해져 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리고 처음의 친밀함을 계속 하자고 졸라대더라도, 이는 분명히 그를 향한 그의 마음(사랑 받는 사람)이 냉담해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기도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은 다른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고한 사랑과 불일치하는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사랑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리려고 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이행하는 삶이다.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억제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도 모순된다. 그것은 욥기 15장 4절에서 선포된 바와 같이 당신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저버리는 주장이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 그러므로 당신이 하나님의 분명한 명령을 거역하는 동안, 당신은 분명히 당신의 눈앞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고 있다. 시편 36편 1절은 말씀한다.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

넷째, 그와 같은 나태한 삶은 거룩한 삶과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생각해 보라. 우리는 성경에서 참된 크리스천은 거룩한 삶을 영위하며 거룩함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히 12:14), 그분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리스도와 같이 자기를 깨끗이 한다는 가르침을 받는다(요일3:3). 잠언 16장 17절에서 “정직한 자의 대로(大路)는 악을 떠나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바꾸어 말하면, 악을 떠나는 것은 모든 경건한 자들이 걷는 보편적인 탄탄대로이다. 같은 목적이 이사야 35장 8절에 나타나 있다.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로마서 8장 1절은 모든 신자의 특성을 말씀하는데, 그들은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한다. 그러나 기도 없는 삶이 어떻게 거룩한 삶과 일치하겠는가? 거룩한 삶은 하나님께 헌신된 삶이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데 구별된 삶이다. 그러나 기도 의무를 견지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그와 같은 삶을 살겠는가? 어떻게 그와 같은 사람이 성령을 따라 행하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이라 불릴 수 있는가?

거룩한 삶은 믿음의 삶이다. 세상 안에서 참된 크리스천이 사는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러나 기도 없이 믿음으로 사노라 하면 누가 믿을 수 있겠으며 기도 없는 삶이 믿음의 표현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목숨을 위해 호흡이 필요하듯이 기도는 자연스런 믿음의 표현이다. 그리고 사람이 믿음의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 그러나 기도 없는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숨을 쉬지 않고 산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기도 없는 삶을 거룩한 삶과 동떨어진 세속적인 삶이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교도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다. 기도 없는 삶을 사는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다.

다섯째, 만일 당신이 은밀한 기도를 태만히 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무시하려는 당신의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기도할 때만 기도하는 그는 전혀 기도하는 자가 아니며 다른 사람들의 눈치만 살피는 자이다. 하나님만 보시는 곳에서 기도하지 않고 사람들이 모는 곳에서만 기도하는 자는 분명코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자이므로 그는 기도를 내팽개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기도를 내팽개치는 자는 하나님 예배를 내팽개치는 자이며 하나님 예배에 중요한 기도를 내팽개치는 자이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불행한 성도여! 하나님 예배를 내팽개치는 자는 하나님을 내팽개치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을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자이거나 그분을 그의 하나님으로 친교하기를 거부하는 자이다.

여섯째, 만일 당신이 여기서 하나님을 무시하고 영원히 저버린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당신의 기쁨을 하나님께 두지 않으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지도 않는 것을 보여 준다. 친구 집을 찾아 방문하여 대화하기를 거부하며 풍성한 초대를 받을 때 초대한 그 친구를 버리는 그는 분명히 그의 행복을 그 친구의 동료애와 대화에 두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제 만일 이와 같은 것이 하나님과 관련하여 당신이 드러내는 경우라면, 어떻게 당신은 당신의 행복을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에 두며 또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즐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회심하기를 바라나 은밀한 기도의 의무에서 떠나 있으며 삶의 방식이 보편적으로 기도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해 이런 일들을 신중히 생각하도록 하라. 살아 있는 동안 결국은 자신을 패배시키고 두렵고도 놀라운 실망에 몰아넣을 것들을 즐기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될 것인가?

당신 자신의 처지에 대해 좋은 견해를 가지며 자신을 회심자로 간주하나 은밀한 기도의 의무에서 떠난 당신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추측컨대 이 설교에 감동받은 후 오늘 저녁의 은밀한 기도에 참여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당신의 목적은 당신이 가진 희망의 진실을 대적하는 어려움과 장애물들을 해결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래가지 않는다. 같은 성격을 가진 앞의 여러 경우들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지금 당신이 듣고 있는 것은 잠시 동안만 당신에게 그와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세상일과 염려들은 당신 머리를 가득 태울 것이며, 그런 후 당신을 젊은 친구들을 찾아감으로써 이 의루를 다시 태만히 여길 것이다. 당신은 은밀한 기도의 의무뿐만 아니라 가족 기도 또한 태만히 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얼마 수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과 절제하는 기도(restraining prayer)를 이전처럼 내팽개칠 것이다. 당신의 마음에 더 나은 원리를 얻게 되기까지 이 의무를 지속적으로 보전할 것 같지 않다. 당신의 마음을 축이는 샘에서 흐르는 물은 이내 고갈되어 버린다. 가뭄과 뜨거운 열기는 눈이 녹아 흘러 내리는 물을 증발시켜 버린다. 봄에는 풍부하게 흘러내리지만,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태양이 치솟으면 그 물은 이내 사라져 버린다. 돌짝밭에 뿌려진 씨앗은 당분간은 무성하게 보일지라도 태양이 그 열기를 뿜으며 치솟아 오르면 이내 말라 시들어 버린다. 좋은 땅이 된 마음을 가진 자들 외에는 인내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자신들 안에 하늘의 씨앗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여서, 마치 성도들처럼 말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자신의 신용을 위해 그들은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하겠지만 그들의 행위는 그것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그들은 내면의 경험에 대해 줄곧 말하겠지만 은밀한 기도의 의무와 다른 의무들을 태만히 하면서 살아간다.

사용 2. 나는 기도의 의무를 지속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권고하기 위해 이 교리로부터 사례를 들고자 한다. 이 권고는 하나님 말씀에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역대상 16장 11절은 말씀한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이사야 62장 6절은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숫군을 세우고 그들로 종일종야에 잠잠치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라고 말씀한다.

기도의 의무에서 인내는 신약성경에서도 한가지로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 18장 1절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은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라고 말씀한다. 누가복음 21장 36절은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누가복음 2장 36절에서 우리에게 모델이 되는 여선지자 안나를 만난다. 그녀는 100세 이상 살았지만 이 의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씀한다. 고넬료 역시 이 의무를 쉬지 않고 계속한 사람으로 천거되고 있다. 사도행전 10장 2절에 의하면 그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지속적인 기도를 힘써 강조한다. 로마서 12장 12절은 “기도를 꾸준히 하라”고 말씀하며, 에베소서 6장 18-19절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라고 말씀한다. 골로새서 4장 2절은 “기도를 항상 힘쓰고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며,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같은 목적을 갖고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로 권고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기도의 의무를 쉬지 않고 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가 해야 할 인내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만일 위선자의 태도가 이와 정반대라면, 이미 교리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우리는 확실히 이 누룩에 대해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의무를 인내로 지속하기 위한 동기(動機)로 특히 고려해야 할 다음 사항들이 있다.

1. 이 의무를 감당하는 도중에 하는 인내는 구원에 필요하며, 이 사실은 성경에 풍성하게 선포되어 있다. 이사야 64장 5절은 말씀한다.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히브리서 10장 38-39절은 말씀한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로마서 11장 22절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자신들이 회심했다고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사역이 완성되어 천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그 밖의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실상 거룩한 삶에서 인내는 의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특권을 얻는 것같이 구원에 필요치 않다.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의에 우리가 관심을 갖기 위해 실제적인 인내가 필요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믿자마자, 혹은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하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사들인 모든 약속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의무의 길에서 갖는 인내는 구원받은 자의 칭호(title to salvation)에 수반되는 수반물이자 증거이다. 비록 인내가 구원 얻는 의는 아닐지라도 그것 없는 구원받은 자의 칭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내가 참된 믿음에 필요한 결과인 것처럼 구원에 필요하다. 인내는 보편적으로 정직(uprightness)을 수반하는 증거이며, 인내가 부족한 것은 정직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시편 125편 4-5절에서 마음이 선하고 정직한 것은 마음이 굽고 치우친 것과 구별된다고 말씀한다. “여호와여 선인에게와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선을 행하소서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지는 자를 여호와께서 죄악을 짓는 자와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스라엘 자손이 거룩한 길로 행치 않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 정직하지 않은 증거로 언급되고 있다. 시편 78편 8절은 말씀한다.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와 같지 않게 하려 하심이로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제자가 갖는 구별되는 특성과 참되고 구원받는 믿음의 특성을 제시하시는데, 그 특성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속에 수반되는 인내다. 요한복음 8장 31절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라고 말씀한다. 이는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관심의 필요한 증거로 언급되고 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인내는 구원받은 자의 칭호에 필요한 부수물과 증거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실제로 소유하는 데 필수적인 필요조건이다. 영생은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자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필요한 거룩한 삶의 인내를 권고하신다. 요한계시록 3장 11절은 말씀한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사람이 의무의 길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렇게 행하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일이 필요하다. 누가복음 12장 43절은 말씀한다.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마태복음 10장 22절은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은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한다.

2. 의무의 길에서 행하는 당신 자신의 인내를 위하여, 당신 자신의 주의와 근신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참된 성도들이 인내할 것이라는 약속이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기 위한 그들의 주의가 약속된 것이기 때문에 주의와 인내가 필요치 않다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성도가 거룩한 삶의 인내에 주의하고 근신하며 부지런해야 하는 일에 실패한다면, 그 실패 자체는 거룩의 실패이다. 근신과 부지런함에 인내하지 못하는 자들은 거룩한 삶에 인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삶의 거룩은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기 위한 근신과 부지런함에 있기 때문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게 되는 것은 은혜의 계약 가운데 포함된 하나의 약속이다(겔11:19-20). 그러나 그들이 이 명령을 지키는 데 주의할 필요가 없다거나 그들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주의가 필요치 않다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거룩할 삶에 인내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타락하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경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부지런하고 주의하라는 권고의 말씀을 풍부하게 제공한다. 고린도전서 16장 13절은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서 3장 12-14절은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한다. 히브리서 4장 1절은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말씀하며, 베드로후서 3장 17절은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고 말씀한다. 요한2서 8절은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당신은 성경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성도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스스로 부지런히 깨어 있기 위해 근신할 것을 주장하는지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깨어 근신하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 뜻은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기도를 태만히 하는 데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언급된 곳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모든 기도에 깨어 있어 기도하며, 모든 인내로 깨어 있고, 쉬지 말고 기도할 것을 당부한다. 모든 인내로 깨어 계속 기도하기 위한 근신을 사도들이 그렇게도 주장하는 것에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유는, 이 의무를 태만하게 할 수많은 유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첫째, 시도를 계속하지 못하고 간혹 이 의루를 빠뜨리다가 결국은 그 의무를 대단히 게을리 한다. 사단은 깨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하며,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우리는 유혹하는 수많은 방해물과 일, 그리고 오락들로 둘러싸여 있다. 특히 우리는 이 기도의 의무를 태만히 하게 하는 큰 유혹들을 직면한다.

3. 이 기도의 의무를 보전하기 위해, 당신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자리에 항상 서 있음을 생각하라. 만일 이 의무를 이전에 감당하던 자들이 그 의무를 내팽개친다면, 그 말은 이제 그들이 실로 더 이상 우리의 존재의 근거가 되시는 하나님께 구하거나 탄원할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한 호흡도 할 수 없는 존재다. 당신은 당신이 필요로 하는 외면적인 부족의 충족을 위해 그분의 도움심이 필요하며, 특히 당신의 영혼의 계속적인 필요를 위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나님의 보호가 없으면 즉시 항상 우는 사자처럼 웅크리고 있는 마귀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인데, 일단 떨어지기만 하면 영혼을 집어삼킬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보전하시지 않고 당신을 떠나시면 당신의 불행은 최악이 될 것이다. 당신의 생명을 당신에게 저주가 될 것이다.

회심한 자들은(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셔야 한다면) 전적으로 은혜의 상태에서 떠나서 회심하기 이전보다 더욱 불행한 상태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강력한 원수들을 대적할 그들 자신의 힘이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셔야 한다면 죄와 사탄은 즉시 대홍수와 같이 밀려와서 휩쓸어 갈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매일 공급받아야 할 필요에 처해 있다. 하나님 없이 당신은 그 어떤 영적인 빛이나 위로를 얻을 수 없고, 그 어떤 은혜의 역사도 없고, 그 어떤 열매로 맺을 수 없다. 하나님 없이 당신의 영혼은 시들어 수척해지고 가장 비참한 상태로 전락할 것이다. 당신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교훈과 지시를 필요로 한다. 활량하고 광대무변한 광야에 있는 어린아이가 올바른 길을 지도하고 인도할 사람이 없다면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없이 당신은 곧장 덫과 함정과 수많은 치명적인 불행에 빠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도움의 지속적인 필요에 처해 있는 당신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것을 지속적으로 구하고 간구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당신의 의존을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당신의 필요를 펼쳐 놓고 기도로 당신의 간구를 올리는 일이 얼마나 이치에 부합하는가? 만일 우리가 기도를 버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일을 중단하시거나 더 이상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행하게 될지를 생각하라. 우리가 하는 계속적인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유익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일 기도를 버리면 하나님은 그 어떤 손상도 유지하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를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도우시는 일을 중단하신다면 우리는 즉시 몰락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나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4. 지속적이고 부지런하게 유지하는 데서 얻는 막대한 유익을 생각하라. 기도는 새로운 본성을 육성하는 크고도 뛰어난 수단 가운데 하나며, 영혼이 풍성케 되고 번영토록 하는 수단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을 유지하는 탁월한 수단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성장하는 길이다. 기도는 세상의 헛된 것들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탁월한 수단이며, 마음을 천국에 고정시키는 탁월한 수단이다. 기도는 죄와 마귀가 쳐 놓은 그물로부터 지키는 탁월한 보호막이며, 사단의 독에 대항하는 강력한 해독제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마음의 육정과 타락, 그리고 세상의 덫에 대항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이끌어온다.

기도는 근신적인 틀(wakeful frame)안에서 영혼을 지키는 위대한 성향을 갖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교리에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그와 같은 선한일의 열매를 맺게 하고, 우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우리가 행하는 선한 일을 보는 자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 그리고 만일 기도의 의무가 지속적으로 그리고 부지런히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즐거운 의무가 될 것이다. 침체되고 나태한 기도의 의무 이행과 꾸준하지 못한 기도 의무 이행은 어떤 사람들에게 기도의 의무 이행과 꾸준하지 못한 기도 의무 이행은 어떤 사람들에게 너무 무거운 짐이 된다. 그들의 나태는 자연히 그 의무를 싫어하고 언짢게 여기게 한다. 그러나 만일 지속적이고 부지런히 이행된다면, 기도는 크리스천을 호감을 주는 삶으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즐거운 삶으로,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달콤한 삶, 그분의 얼굴에서 비취는 풍성한 빛을 즐기는 가장 훌륭한 방법 가운데 하나다.

이 외에도 충분히 이행될 때,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써 기도가 갖는 엄청난 능력을 당신이 깨달아야 할 가치가 있다. 기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야곱과 같이 된다. 야곱은 왕자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능력을 갖고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을 이겼다. 야고보서 5장 16-18절에 제시된 기도의 능력을 보라. 이런 것들에 의해 만일 하나님을 불러 아뢰는 이 기도의 의무를 태만히 한다면 당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릴 것인가? 그리고 그와 같은 태만에 의해 당신 자신의 관심을 얼마나 형편없이 돌아볼 것인지에 대해 당신을 지각하게 될 것이다.

이 기도 의무의 지속성과 인내를 위해 나는 두 가지 지적으로 나의 강론을 끝맺고자 한다.

첫째, 이 의무에 대한 태만을 시초부터 경계하라. 이 의무를 당분간 이행하다가 나중에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보통 점진적으로 그것을 내팽개쳐 버린다. 확신과 종교적 감정을 지속적으로 갖는 동안, 그들은 기도 골방에 꾸준히 들어가고, 세속적인 일, 동료, 그리고 오락은 그들을 방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확신과 종교적 감정이 사라지기 시작할 때, 그들은 기도 의무를 태만히 할 구실들을 찾기 시작한다. 이제 그들은 매우 다급해진다. 이제는 돌아볼 일들이 산처럼 쌓였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를 빼먹을 수밖에 없다고 자신들을 설득하는 길에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이후 이런 일들이 빈번히 되풀이되어, 이제는 감출 수 있는 어떤 것이 발생한다. 얼마 후, 매우 작은 일까지도 처음 것보다 더 충분한 변명 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점차 기도를 태만히 하는 습관에 젖어 위축된 나머지 더더욱 기도의 의무를 싫어하게 된다. 그리고 기도할 때조차 그 기도는 빈약하고 우둔하며 마음이 없고 수단으로 하므로, 기도를 하지만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스스로에게 말하는 불행한 방법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자신의 둔감함과 꺼림을 기도 의무를 태만히 하는 변명으로 삼거나 최소한 태만히 하는 삶의 구실로 삼는다. 이런 방식 배후에서 사탄과 그 사람 자신의 부패가 그들을 꾀어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태만의 시초를 경계하라. 기도를 방해하는 유혹에 대항하여 깨어 있으라. 어떻게 변명을 시작하는지에 주의를 기울여라. 기도 의무의 최고 수준을 지키기 위해 깨어 있으라. 기도의 의무가 침체되지 않도록 하라. 왜냐하면 당신이 매우 작은 것일지언정 조금씩 양보하면, 그것은 전장에서 적군에게 길을 터 주는 것과 같다. 처음 시작하는 후퇴는 적에게 사기를 북돋아 주고 후퇴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약화 시킨다.

둘째, 당신 자신의 경험에 의해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싫어하는 태도를 버리도록 하라. 당신 자신이 허용하는 것들을 점검하고 그것들이 미칠 영향이 어떤지에 대해 조사하라.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과거의 행동을 조사할 수 있고, 의심할 바 없이 공정한 생각에 근거하여 당신이 자신을 허용한 행위와 과정들에 대해 판단할 수 있다.

특히 젊은이들은 친구를 사귀는 방식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들과 함께 갖는 오락의 범주를 잘 살피도록 하라. 나는 오로지 당신이 은밀한 기도의 의무를 실천하고 있는 일과 관련하여 이 일들이 미칠 영향이 무엇인지 단신 자신의 양심의 입으로 말하게 되기를 바란다. 오락과 같은 행위가 이 의무를 태만히 하게 한 사실을 당신은 알지 못하는가? 그와 같은 일을 한 연후에 기도의 의무를 더욱 싫어하게 되고 기도 의무에 대해 별 의식이 없고 주의하지 않게 된 것을 당신은 깨닫지 못했는가? 그렇다. 때때로 당신을 실제적으로 기도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당신 자신의 방식을 고수해 왔다.

만일 당신이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고, 만일 당신의 영혼의 선을 추구한다면, 이 모든 행위들을 과감하게 버리도록 하라. 그것들에 대해 무슨 변명을 하건-그런 행위들에는 해로운 것이 없다거나 만사에 때가 있다는 등-만일 당신이 그것들이 주는 결과에서 해를 발견한다면, 지금 당신은 그것들을 과감하게 버릴 때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사소한 세속적인 오락보다 천국에 가치를 부여한다면, 만일 당신이 춤이나 노래보다 영원한 영광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면 지금 버릴 때다.

만일 이것들이 당신 스스로 보기에 합법적이라면, 그래서 당신의 경험이 내가 지금까지 언급한 바와 같은 결과를 본다면 그로써 충분하다. 당신이 보기에 당신의 오른손과 오른쪽 눈을 즐기는 것은 그 자체가 합법적이다. 그러나 만일 경험상 그것들이 당신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는 사실을 당신이 발견하면, 당신이 그것들을 가지고 구더기도 타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는 고통의 장소에 들어가기보다는 그것들 없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한쪽 눈을 빼 버리고 한쪽 손을 자를 때다.

 

http://thevine21.hompee.com/

 

728x90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