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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보스톤 목사와 회개 교리(서 창원역)

토마스 보스톤

by 김경호 진실 2011. 9. 29.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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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보스톤 목사와 회개 교리(서 창원역)

이끄는 말

필자의 첫 강의는 16세기의 일로서 종교 개혁자들의 설교를 살펴보았었다. 두 번째 강의는 17세기로 옮겨가서 위대한 스코틀랜드 언약도요 신학자인 사무엘 루터포드 목사를 다루었다. 오늘 세 번째 강의는 18세기로 건너가 토마스 보스톤 목사를 다루려고 한다.
토마스 보스톤(1676-1732)은 복음을 설교하는 일에 큰 열정을 가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목사였다. 그는 스코틀랜드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 교회 두 곳을 섬겼다. 하나는 심프림에 있는 교회요 또 다른 하나는 에트릭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여러 권의 책도 저술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인간의 4중 상태’ 라는 책이다. 이 책은 가장 잘 팔리는 책이 되었고 일반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신학 책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도 이 책은 출판되고 있다.

우리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보스톤 목사의 생애와 사역 및 저술들에 대한 측면이 많이 있지만 오늘은 그의 회개 교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필자가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은 개혁주의 신학 입장을 지닌 복음의 설교자로서 우리는 회개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회개를 이해하는 바른 길은 복음을 어떻게 설교할 것인지를 결정지어 준다. 보스톤 목사 시대에도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구원의 조건으로서 회개를 말하고 가르치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 문제에 관하여 보스톤 목사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우리들의 사고와 설교를 위하여 배우는 교훈이 무엇인지도 보려고 한다.

우리는 먼저 그 주제에 관하여 보스톤 목사가 쓴 글을 살펴보자. 그리고 그가 휘말리게 된 중대한 신학적 논쟁을 살펴보려고 한다. 회개문제가 그 논쟁의 주요안건이었다.

1. 잡다한 질문들(Miscellaneous Questions)

회개 교리에 대한 보스톤의 첫 번째 저술들은 ‘잡다한 질문들’ 시리즈로 발간한 것들이었다. 특히 이 시리즈의 처음 세개가 그것들이었다. 이것은 보스톤이 원래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저술하였다. 그리고 은혜의 교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었다. 보슨톤이 그의 자서전에서 이 출판 계획에 대한 내력에 대하여 사택에 소책자 묶음이 도착하는 사건을 언급하는 가운데서 이야기한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루터, 베자, 잔키우스등에 의한 질문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은 우리가 나중에 논의하게 될 에드워드 피셔가 쓴 <현대신학의 정수> 에 첨가된 것이었다. 피셔의 책은 1703년과 1704년에 더 첨가된 작은 서재를 보스톤 목사에게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1702년에 이 책자의 소포가 처음으로 도착했을 때 그에게는 책이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손에 책이 쥐어지면 순식간에 다 읽곤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잡다한 질문들’이라는 시리즈에 루터나 베자등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이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강좌(First Discourse)

보스톤 자신이 답한 첫 질문은 ‘성도들의 죄가 회개하지 않았을 동안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할 책임이 있는가 없는가’ 였다. 이 담화에서 그는 특별히 ‘죄’ 라는 용어와 죄의식 및 죄의 형벌에 대한 용어를 정의하였다. 그가 정의한 죄란 이것이다: ‘죄란 상대적인 용어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율법과의 연관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죄책감은 ‘in actu primo’를 취하는 것이다. 즉, ‘죄의 본능적인 결점, 죄인이 어느 상태에 있든지 그 안에서 자신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죄책감은 ‘In actu secundo’ 인데 이것은 ‘사면이 따르든지 아니든지 율법에 정한 형벌을 당하는 실제적인 책임을 말한다’.

보스톤 목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 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 둘의 차이는 죄인에게 내리는 사형선고와 실제 형집행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엄청난 차이이다’ 보스톤 목사는 실제적인 유죄와 실제로 형벌을 가하는 것 사이의 구분을 말하고 있다. 즉 실제로는 형 집행이 결코 단행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회심치 않은 택함받은 자는 율법의 정죄 선언에 놓여있는 자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형벌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아비가 자녀를 징계하는 것을 포함한 ‘일반적인 형벌’과 ‘엄격한 형벌’ 즉, 아버지의 사랑이 섞여있지 않은 법적인 형벌 사이에는 또 다른 차이가 있다. 보스톤 목사는 말한다:

‘형벌의 목적과 관련하여 볼 때 형벌은 교정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징벌하는 것을 목적한다. 첫째는 가해자의 교정을 위하여 벌을 내리는 것이며, 두 번째는 가해자의 교정하고는 상관이 없이 율법의 공정성을 만족시키는 것을 위하여 집행하는 목적인 것이다...’

보스톤 목사는 신자에게 있어서 두 가지 유형의 죄가 있다고 결론지었다. 하나는 믿음이나 회개라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죄로부터 회복되거나 해결 받는 것이 아닌 가운데 성도들에게 잠시동안 남아 있는 죄들이다. 또 하나는 취급받은 죄 즉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사함을 받은 죄들이 있다. 보스톤은 사무엘하 12장에 나단 선지자의 예방을 받은 사건을 전후로 한 다윗을 실례로 들어 그 두 종류의 죄를 설명하였다.

용어를 정의한 후 보스톤은 세가지 주장을 펼쳤다. 우리가 앞에서 보스톤이 사용한 용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드린바와 같이 각각의 주장에 있어서 첫 문장은 그 논지의 특성을 들어내기에 충분한 것이다.

주장 1. 회개하였든지 아니하였든지 신자들의 죄는 원칙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불일치되기에 본능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을 받을 죄인 것이다.

주장 2. 회개치 않았을 동안의 신자들의 죄는 하나님 아버지의 일시적인 사랑의 채찍을 받게 하는 것이다.

주장 3. 심지어 회개치 않았을 동안에도 신자들의 죄는 영원한 형벌을 받는, 즉 징벌적인 공의 집행 또는 실제로 영원한 진노에 머물게 하는 형벌을 받게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보스톤은 신자들은 회개하든지 회개하지 않았든지 자신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와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비록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존재일지라도). 단지 잘못된 것을 바르게 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의 채찍과 같은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징계가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정당화하고 확증하기 위하여 보스톤은 7가지 논지를 펼친다.

첫째 논지는 시편 89:30-33을 주해하는 것에 나타나 있다. 즉 하나님은 불순종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벌하시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들이 버림을 받게 될 가능성이 제기되지 않았다. 실로 언약은 재차 확정 된 것이다.

둘째 논지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있는 여러 본문을 주해하며서 제기한 것이다. 만일 회개하지 않은 죄가 신자를 영원한 형벌을 받는 존재로 떨어뜨린다면 그것은 율법에 근거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신자가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 이래 행위의 언약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의 언약하에 있는데 신자가 정죄 받을 근거가 없지 아니한가?

셋째 논지는 신자는 정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요한복음과 로마서에 많이 있다.

넷째 논지는 다시 법적인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의 죄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였다면 만약 신자가 영원한 형벌로 고통을 겪는 것이 가능한가? 하나님께서 성도를 빚을 갚아야할 채무자로 여기심이 가능한가?

다섯째 논지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의의 주입으로 인하여 완전히 의로운 자라는 것이다. 완전히 의롭다함을 입는 것은 율법의 요구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자의 자아는 율법에 의하여 정죄될 수 없는 것이다.

여섯째 논지는 성경은 모든 죄는 다 회개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자가 죽기 전에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하여 일일이 회개할 기회조차도 갖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는 실제적인 경우가 있다. 보스톤 목사는 반박하기를 그러한 신자가 정죄를 받는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분명히 난센스라는 것이다.

일곱째 논지는 칭의는 순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칭의는 물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구원문제도 물릴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칭의의 속성에 대한 논의가 더 확대되어 나타난다.

보스톤은 논지의 본질에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채 네 가지 문제를 진술하고 답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말로 결론 짖고 있다:
‘죄는 진노와 형벌을 받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제거되었다. 죄는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정죄될 수는 없다. 만일 그리스도의 피가 당신의 영혼 속에 흐르고 있다면 정죄에 빠질 수렁은 닫혀있는 것이다’(if the channel of Christ's blood runs through thy soul, thou has shut the gulf as to condemnation).

이 강좌에서 회개에 관한 가르침은 대부분이 부정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진 것이다. 즉 회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아닌 용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스톤이 그의 반대자들에게 반박한 것 중 하나에서 논쟁한 것같이 성경에서 매번 범하는 죄를 위하여 회개를 표현하라는 것보다도 회개하는 습관과 실천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좌는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에게 신학자인 보스톤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일곱 번째 논지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 및 그리스도의 성품과 사역에 근거한 자기 입장을 진술하고 있는 점을 주목하기를 바란다.

두 번째 강좌(Second Discourse)

잡다한 질문들 속에 있는 두 번째 강좌는 과거와 현재 및 미래에 지은 모든 죄가 다 함께 즉시 사함을 받게 되는가 아닌가? 이다. 이 논제는 회개론보다는 보다 더 폭넓은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보스톤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 질문은 앞의 질문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이미 말씀드린 것은 이 질문에 대답할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하도록 기여하는 것이다’. 첫 강좌와 더불어 충분하게 다루었기에 이 질문에 관하여 많이 이야기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보스톤은 모든 죄가 즉시 용서받게 된다고 믿었다. 회심한 이후에 범한 죄와 의롭다함을 입은 후에 범한 죄는 죄 사함을 보장하는 회개를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를 회개해야만 하지만 우리의 구원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세 번째 강좌(Third Discourse)

세 번째 강좌의 주제는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회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였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비추어 볼 때 이 강좌는 1702년에 쓰여진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서 매로 논쟁 전에 이미 보스톤의 입장이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보스톤은 유다에게서 보여진 것처럼 ‘법적인 회개’ 즉 ‘하나님의 진노를 인식하여 생기는 회개’와 ‘복음적 회개’(Gospel repentance or evangelical repentance),즉 구원을 받게 하는 은혜 및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은총을 구분하고 있다.

이것 역시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칼빈은 어떤 사람이 율법의 회개와 복음의 회개를 구분하여 사용한 것을 인용하였다. 이 부분에 있어서 칼빈은 ‘법적인 참회’(legal penance)와 ‘복음적인 참회’(evavngelical penance)를 구분하여 사용한 부써의 입장을 따른 것이다. 이 개념은 스코트랜드에서도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스코틀랜드에서 처음으로 언약 신학을 가르친 롤록(Rollock) 박사가 비록 동일한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개념을 말한적이 있다. 아주 조심스럽게 학문적인 입장에서 그리고 특별히 회개에 해당하는 헬라어와 관련하여 롤록박사는 그러한 개념을 말한 것이다. 회개의 첫 부분은 슬퍼하는 것이다. 두가지 종류의 슬픔이 있다. 하나는 ‘죄에 수반되는 형벌 때문에 생기는 슬픔이다. 솔직히 말하건대 이것은 하나님께 돌아서는 이 거룩한 변화의 일부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슬퍼하는 일 자체는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을 롤록박사는 ‘법적 슬픔’(legal sorrow)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따라 복음에 의하여 감동받은 슬픔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의 일부분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롤록 박사이후 18세기초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대부분의 개혁주의 학자들은 회개를 말할 때 이러한 구분을 사용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구분을 명백히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음적인 은총’으로서의 회개를 말하고 있다. 1845년 후반기에 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집을 쓴 쇼(Shaw) 목사는 이 문구는 신앙고백서에서 ‘법적인 회개’로부터 참된 회개의 위치를 구분하기 위하여 사용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비록 ‘법적인 회개’가 가룟 유다와 같이 진짜 회개가 아닌 경우에 사용된 것일지라도 이것은 잠시 후에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회개는 구원을 위한 필요한 선행조건이라고 가르친 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구분을 한 보스톤 목사는 회개의 필요성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설교에서 일반적으로 함께 병행되어 나타나는 회개와 믿음은 실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 둘을 구분해야만 할지라도 분리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어떤 것이 먼저 이루어지는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시간상의 차이보다는 특성의 순서적인 구분일 뿐이다...’

아주 중요한 한 문장에서 보스톤 목사는 매로 논쟁에서 위기에 몰리게 된 핵심적인 사항에 근접한 것을 보여준다.
“루터포드와 더불어 나는 영원한 진노에 대한 우리의 책임문제와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공의의 질서에 따라 죄에 대한 모든 형벌과 관련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속박과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요 방편임을 주장한다. 하나의 수단으로서의 믿음의 길을 말하는 것은 더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이론인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은혜의 언약의 조건성과 칭의에 있어서 믿음의 도구성에 관하여 논쟁을 벌이는 일은 중지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것은 우리에게 둘째 언약의 참된 속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회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보스톤은 구원을 얻게 하는 믿음의 첫 번째 효과는 신자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것임을 말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만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믿음의 즉각적인 효과라면 회개는 믿음 전에 있어야 하든지 아니면 죄 사함을 받은 후에 와야만 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는 것이므로’(히 11:6) 성립될 수 없다. 주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요 15:5) 라고 하셨다...이제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될 때까지는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엡 3:17).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믿음 앞에 올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죄 사함 받은 후에 오는 것이다”.

보스톤은 참 회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흐른다는 것을 주목함으로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고로 나는 반증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회개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죄 사함의 열매이다. 그러나 우리의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부터 기인한다. 그러므로 순서상 이것은 믿음 뒤에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회개는 죄 사함을 수반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지지하고 있다: 회개는 ‘성결케 하는 은혜’이며 사함보다 선행될 수밖에 없는 성결케 하는 은혜는 칭의와 성화의 상대적인 위치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자신의 요지를 강조하기 위하여 보스톤은 반박자들을 공격한다. 그는 회개가 죄 사함보다 우선된다고 믿은 쏘씨니우스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구원의 조건으로써 회개의 필요성을 본 언약신학자들은 동일한 함정에 빠진 자들임을 분명히 지적하였다. 보스톤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1. 죄 사함의 조건으로 회개를 말하는 것은 ‘자연 종교’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은 어떤 무엇을 함으로써-이 경우엔 회개를 말함-구원을 얻어야만 한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주는 것이다. 그러한 주장은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2. 회개를 죄 사함의 조건으로 보는 것은 은혜의 언약을 바꾸는 것이요 심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실로 보스톤은 더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그는 은혜의 언약을 가짜 행위의 언약(bastard covenant of works)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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