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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학선생의 의미

김영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1. 11. 1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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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학선생의 의미 (갈 3:23-29)

 

본문이 기록되어 있는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에 세운 갈라디아 교회에 바울이 편지한 것입니다.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그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갈라디아 사람들은 세례를 받게 되었고, 성령의 역사하심도 경험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율법을 혼합하여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울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여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는데 당시에 안디옥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기 위해 금식하던 중에 성령께서 이방 선교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게 하시고 그들을 이방의 선교사로 파송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게 된 동기는 1차 전도 여행 때에 수리아 안디옥을 떠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구약의 율법을 배경으로 하여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구약성경을 토대로 하여 말씀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각 교회마다 증거한 복음이 신약성경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기록할 때 말한 모든 성경은 바로 구약 성경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안디옥 회당에서 복음을 증거한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의 방해로 말미암아 그곳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며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루스드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돌로 쳐 죽이려고 했고, 이에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역순으로 되돌아 가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순으로 돌아가면서 그곳에서 장로를 세우고 1차 전도여행을 마쳤는데 바로 이 때에 세워진 교회가 갈라디아 교회입니다.

이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에 어려운 핍박을 받으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며 세우신 곳이며. 자기 피를 값으로 주고 사신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도 고난과 핍박을 받으며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어려운 고난과 핍박으로 인해 세워진 교회이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교회이며, 생명보다 귀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라디아 교인들은 타 종교에서 개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신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율법관에 쉽게 넘어가 바울이 전한 복음에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전하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에 매도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된 바울은 애타는 심정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서신을 띄우며, 그들이 바른 복음의 신앙으로 돌아오기를 촉구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서는 이러한 심각성으로 인해 쓰여졌기 때문에 아주 강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1장 7절에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한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8절에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함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이 참된 구원으로 이르게 하는 참된 복음임을 말하고 있으며,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바울 자신 조차도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까지 말하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이 진리임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임을 강조하면서 10절에 자신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11절에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어서 12절에 이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진리임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이 갈라디아서의 주제는 이신득의로써 이 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갈라디아서가 천주교의 신부였던 루터로 하여금 진리의 눈을 뜨게 하였고, 종교개혁을 촉구하게 하였습니다.

당시에 루터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잘못된 교리를 간파하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가지고 개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는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기록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지푸라기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이유는 믿음오로 구원을 받는 것인데, 야고보서에서 믿음이 아닌 행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행함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는 것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 있는 믿음이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행함이 아니라 믿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시에 로마카톨릭의 부패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지만 몇 가지를 말한다면, 교황 무오설, 신부 화채설, 고해성사, 미사, 성모 마리아 숭배설입니다.

교황 무오설이란 성경 말씀은 오류가 있지만 교황의 말은 오류가 없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교황의 말을 순종하는 것이 구원 받는 길이다는 것입니다.

신부 화채설은 신부가 떡과 포도주를 양손에 잡고 기도하면 그것이 거룩하여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되므로, 그 신부의 기도로 인해 거룩하여진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다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란 죄를 범하면 그 모든 죄를 신부에게 다 고백하여 신부의 기도를 통해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사란 예배의 다른 표현으로서 제사라는 구약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비록 천주교에서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신성이 아닌 인성을 믿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는 예배를 드려서는 안됩니다. 인성이라는 것은 곧 피조물이기에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것들은 경배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경배받으실 분은 창조주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경배하는 이유는 그가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 천주교처럼 마리아의 아들이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마리아의 아들로서 예배하는 것은 사악한 죄입니다.

예수님을 경배하는 이유는 십자가에 피를 흘리셨기 때문도 있지만 그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람되심에 대해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되심에 의해서 경배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인성을 인정하지만 그 인성에 대해서는 예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일위이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일위란 삼위하나님 중에서 2위라는 의미이며, 이성이란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모 마리아 숭배설이란 성모 마리아가 원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모 마리아가 죄인들은 구원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성모 마리아 숭배설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말한다면 첫째는, 마리아 종신 처녀설입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 전에도 낳는 동안에도 낳은 후에도 동정녀, 즉 숫처녀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4세기에는 "평생 동정녀"라는 말이 마리아의 대중적인 명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은 후에도 4명의 아들과 2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첫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때에는 요셉과 상관 없이 낳았고, 그 이후에는 요셉과의 관계를 통해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것이고, 마리아는 처녀가 아닌 것입니다.

둘째는, 무염시태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무죄잉태라고도 합니다. 이 무염시태라는 말은 마리아의 동상을 떠 받치고 있는 돌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1854년에 마리아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한 은총에 의해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고 공표하였습니다.

셋째는, 몽소승천입니다. 이는 다른 말로 부활승천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마리아가 죽은 후 육체도 영혼과 더불어 승천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1950년 11월 1일에 교황 비오 12세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녀이셨던 하나님의 모친 마리아가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에 들어올림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된 신앙의 진리이다고 공표하였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죄가 온 세상을 부패하게 하였으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느 누구라도 죄의 영향을 입지 않은 사람이 결코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영원한 죽음의 고통을 지옥에서 받아야 합니다. 그 어떠한 노력과 공로로도 결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은 다 전적으로 부패하였기에 이 땅에서 난 자는 그 어느 누구도 죄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의 공로만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하늘에서 오셨기에 이 땅의 죄의 영향을 입지 않으신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외에 그 어느 누구가 십자가에 몇 만번 달려 죽은들 그의 죽음은 구원의 효력을 절대로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만이 받는 것인데,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을 가미시켜 복음외에 율법을 행하도록 하고 율법의 표증인 할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개종자들로 구성된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굳게 믿지 못하고 유대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16절에 아주 칼날같고 절묘한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21절에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다고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하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애타는 마음으로 책망하며 권면합니다. 그리고 2절로 3절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물으면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로 육체로 마친다고 하며, 그들의 어리석고도 무모함을 한탄합니다. 그리고 8절에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얻게 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15절로 17절에서 말하기를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 아무나 더하거나 폐하지 못한다고 하며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먼저 주신 구원의 약속은 바로 아브라함이 받았던 믿음으로의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30년후에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이 아닌 믿음을 먼저 주시고, 430년이 지난 후에 율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곧 율법이 먼저가 아니라 복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음을 요구하고, 율법은 행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미 믿음으로 구원을 주셨기 때문에 430년 후에 주어진 율법은 구원으로서 더 이상 효력을 미칠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령 율법으로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먼저 주어진 믿음이 우선이며, 효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믿음으로 구원을 약속하시고, 430년 후에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을 구원을 받기 위해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지키라는 규율과 법도로 주신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써만이 구원 받는 것은 변할 수 없는 분명한 진리인데, 그런다고 해서 율법폐기론자들처럼 아예 율법을 무시하고 지키지 않으면 결코 안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엄연히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법이기에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 가정에 호주가 세운 가훈도 중요한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율법은 존중히 여기며, 따라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430년이라는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이며, 족장들이 언약을 받을 때부터 시내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을때까지의 기간을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됨을 말씀하시고,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제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율법의 필요성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 자신이 율법을 통해 죄인임을 깨닫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구원임을 알고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복음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필요성입니다. 율법은 죄만 가중시킬 뿐 더 이상 구원으로서의 효력을 발생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위대한 책이 있다면 천로역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존 번연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투옥되어 꿈을 꾸는 중에 천국의 여정을 보게 되어 그것을 책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크리스챤이라는 사람이 복음을 듣고 자신이 사는 마을을 떠나 천국으로 가는 도중에 해석자라는 사람을 만나 여러 가지의 장면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장면 중에서 어느 방안에 탁자가 놓여있고, 그 탁자 위에는 수북히 먼지가 쌓여져 있습니다. 그리고 빗자루를 든 사람이 방안에 들어가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자 그 먼지가 방안에 가득히 퍼져 숨을 쉴 수가 없게 됩니다. 그 다음에 물조리개를 가진 사람이 방안에 들어가 물을 뿌리자 방안에 가득히 퍼진 먼지를 물이 흡수하게 되고 먼지가 제거됩니다. 여기에서 먼지는 죄를 의미하고, 빗자루는 율법을 의미하며, 물조리개는 복음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죄를 제거할려고는 하지만 그럴수록 죄를 더 증가시키며, 율법이 증가시킨 죄를 복음이 제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것도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3절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정결함을 받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율법아래 우리가 갇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4절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몽학선생으로서 설명하고 있는데 몽학선생이란 어린아이를 보호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몽학선생은 주인의 아이를 돌보는 노예로서 6세부터 16세의 아이를 돌보는 자입니다. 그는 아이가 학교에 오고 갈 때에 길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자이며, 아이가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 다니며 그의 행동을 주시합니다. 몽학선생은 비록 선생이지만 가르치는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몽학선생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이다고고스' 인데, 이는 가르치는 일을 하지 않는 자이며,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는 '디다스칼로스'입니다.

이 몽학선생은 주인과 약속한 기한이 지나게 되거나, 주인이 아들에게 재산권을 상속하게 되면 몽학선생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되며, 다시 노예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율법도 우리를 견책하고 우리의 행동여부를 간섭하는 것인데, 그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까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므로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우리의 죄를 간섭할 수가 결코 없는 것이며,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율법에 결코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참 자유가 있기 때문이며,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오듯이, 고난을 당한 자가 진정으로 감사하듯이, 율법에 얽매여 자신이 어쩔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진정한 믿음으로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기능 중에 가장 우선적인 것은 바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깨달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도 때로는 우리를 매몰 찬 폭퐁 가운데로 떠 밀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둣 인생은 고난과 역경과 환난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몽학선생이 기한이 지나면 더 이상 주인의 아들의 행동여부를 주장할 수가 없으며, 만약에 주장하게 되면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율법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더 이상 우리를 주장하거나 정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러한 율법의 효력이 무산되며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율법은 24절의 말씀처럼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5절의 말씀처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곧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된 것이지 율법으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28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합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만이 죄인된 인생들에게 참된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줄 수가 있는 것이며, 이 믿음의 법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떠한 법보다도 우선이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누구도 결코 구원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복음과 율법의 관계성 중에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결단코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며, 복음에 율법이 조금이라도 포함되어서는 결코 안된다는 것입니다. 복음과 율법은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지만 근본적으로 그 역할과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 서로 병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또한 율법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 8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2장 37절로 40절에 말씀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고 합니다. 비록 이 말씀은 두가지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랑하라는 한가지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 라는 구절이 서로 같은 의미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십계명 아래에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율법의 진정한 뜻이 사랑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에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다 행한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율법을 행함에 있어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하였기에 서로를 정죄하고 비판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이 없는 율법을 행함은 남의 마음에 비수를 꼿으며, 상처를 줄 수 밖에 없으며, 자신 밖에 모르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에 빠지기 쉽상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혹시 우리의 믿음에 율법이 포함되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 것을 감사하는 일 보다 율법을 행하고 지키기에만 급급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율법에 얽매여 우리 자신의 영리를 위해 예배를 드리며 기도를 드리며 찬송을 드리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렇듯 율법은 무슨 댓가를 바라는 것이며, 그 댓가가 주어지지 아니하면 금방 실망과 좌절할 수 밖에 없으며,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복음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아무런 댓가를 바라지 않는 것이기에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에 진정한 기쁨과 감사가 없다면 우리가 아직도 몽학선생인 율법에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얽매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이 율법에 사로잡혀 얽매일 필요가 전혀 없으며 설령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거나 조급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인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율법을 다 지키시고 이루셨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 공로를 힘입어 율법을 다 지킨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1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법도 결코 효력을 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었을 때에는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안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이신득의, 즉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같은 주제로 기록된 말씀입니다. 로마서는 부드럽고 체계적이며, 깊이 있게 기록한 반면에 갈라디아서는 강한 어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서신을 받는 지역의 특색에 맞춰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봉사, 교회에 대한 아낌없는 수고, 이 모든 행함은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거할 때 진정한 자유와 기쁨을 누릴수가 있는 것입니다. - 아멘-

출처 : CORAM DEO
글쓴이 : YOUNG-JAE KI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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