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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의

김영재박사

by 김경호 진실 2015. 10. 15. 20:21

본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7)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며 거룩하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들의 삶을 지금까지 은혜와 사랑으로 지키시고 오늘 이 자리에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모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을 바라볼 때 이단과 사이비 사상이 득세하며, 심히 오염되고 부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앞에 심히도 크나큰 죄악을 범했음을 우리 스스로가 자인하며, 회개하오니 부디 한국교회의 죄악을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으로 긍휼히 여겨 주옵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연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게 하옵소서 우리는 심히도 연약하고 나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바람앞에 흔들리는 갈대와도 같은 자들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부디 불쌍히 여겨 주옵시고 우리로 하여금 한국교회의 소금과 빛과 밀알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한국교회에 득세하고 있는 이단 사이비 척결을 위해 미약한 우리들이 힘을 모으고자 하오니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어서 우리로 하여금 한국교회가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앞에 바로 서게 하옵소서,

이 시간 작고 보잘 것 없는 부족한 종이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하오니 부족한 종의 심령과 입술을 성령께서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 멘 -

 

 

지금 현시대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생명보다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삶을 성경 말씀속에 귀속시키지 않고 오히려 성경을 자신들의 삶속에 그럴듯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들 스스로가 활용한다기 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배워온 것입니다. 그러한 잘못된 신 복음주의적인 가르침이 교회내에 팽배해져 있고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이 아닌 교회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왜곡되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한국교회의 앞날이 불투명합니다. 말씀의 빛이 희미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정말로 그 어떤 끔찍한 일들이 발생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한국교회를 위해 사용하시고자 남겨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남겨진 자가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감히 바래봅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결과로 인해 교회 안에 온갖 비진리가 난무하고 온갖 인본주의와 기복주의와 신비주의와 다원주의와 합리주의와 이성주의 등이 판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책임감을 절실히 느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로마서 117절의 말씀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이 로마서 117절의 말씀은 마틴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눈을 뜨게 한 말씀입니다. 개혁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 루터, 칼빈, 낙스 등의 종교 개혁자들의 뒤를 지금도 여전히 이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뒤를 저와 여러분들이 이어가기를 감히 바래봅니다.

루터는 로마카톨릭에 몸담고 있는 동안에 이 로마서 117절의 말씀에 기록되어져 있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많은 묵상을 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는 영어로는 갓 라잇셔스니스(God’s righteousness)이고, 헬라어로는 디카이오쉬네 가르 데우입니다. 헬라어에는 주체 소유격과 객체 소유격이 있는데 이 두 가지의 해석 방법을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자유를 얻느냐? 속박을 당하느냐? 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로마카톨릭이 이 하나님의 의를 객체소유격으로 해석하는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는 주체 소유격으로 해석합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객체 소유격으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들에게 의를 요구하는 것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도무지 의를 행할 수 없는 죄인인 인간들에게 의를 행하라고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만한 의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객체소유격적인 가르침이 로마카톨릭에 팽배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성경을 율법주의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객체소유격적인 해석에 사로잡한 로마카톨릭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속박과 억압의 굴레를 씌우고 그 굴레에게 벗어나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지한 일입니까? 그 굴레를 하나님이 씌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굴레를 씌운 장본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로마카톨릭의 지극히 잘못된 성경 해석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이러한 엄청난 누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루터 또한 이러한 잘못된 로마 카톨릭의 성경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주체 소유격이 아닌 객체 소유격으로 보았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가면 갈수록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갈등과 번민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자신의 스승에게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나에게 화가 나신 것 같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은 루터에게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화가 나신 것이 아니라 네가 하나님께 화가 난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루터가 화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비록 하나님이 죄인인 자신에게 의를 요구한 것이 이유이긴 하지만 자신의 하나님의 요구를 수행하면 할수록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느낀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율법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지킬 수 없는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무력함을 스스로 자인하고 진정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루터가 비로소 이 하나님의 의를 객체 소유격이 아닌 주체 소유격으로 바라보게 되고 종교개혁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주체 소유격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이 죄인인 인간들에게 의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의를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선물은 진정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죄인인 인간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받기 위해 그 어떤 행위도 일체 해서는 안 되며,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없는 무용지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루터는 처음에 하나님의 의를 객체 소유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죄인들을 징벌하시는 의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의 의를 주체 소유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주어졌다고 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자신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의를 객체 소유격으로 보면 무서운 심판이 되는 것이고, 주체 소유격으로 보면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루터가 하나님의 의를 주체 소유격으로 깨달은 후에 타자의이신칭의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 문구 하나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객체 소유격으로 보면 심판을 피하기 위해 수도사적인 경건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러나 루터는 주체 소유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종교 개혁을 한 것입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자유성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은 율법주의이며, 하나님이 자유스럽게 인간에게 은혜를 주시기도 하시고 주시지 않으시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위에 따라서 은혜를 주시는 분이 결코 아니라 자신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주시는 것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그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개신교 신학을 십자가 신학으로 요약했고, 천주교 신학을 영광의 신학으로 요약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십자가 신학은 주체 소유격적인 관점이고, 영광의 신학은 객체 소유격적인 관점입니다.

십자가 신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만이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고, 영광의 신학이란 십자가 없이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로마의 교황은 이러한 루터의 외침을 막기 위해 공작을 펼쳤습니다. 그는 루터가 소속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루터로 하여금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도록 권면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수도회는 1518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자체적으로 토론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중세시대의 유명론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대주권으로 십자가의 구원과는 상관없이 죄인을 의롭다고 칭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에 반하여 십자가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죄인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아무런 공로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 구원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이신칭의인 것입니다. 이 이신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루터는 말씀의 신학을 추구하였는데 이 말씀의 신학이란 신앙은 설교를 통하여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 지금 현 시대의 한국교회는 루터가 주장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십자가의 신학에서 이미 멀어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제한 영광의 신학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 바로 찬양집회와 부흥회와 기도원등지입니다. 이러한 곳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배제하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의 영광만을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이 바로 증거되는 곳, 즉 십자가의 신학을 추구하는 곳에 임하는 것이지 말씀이 바로 증거되지 않는 곳에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임하겠습니까? 바로 악한 영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 당시의 표제를 다섯 가지로 살펴보면 첫째는, “Sola Gratia” 로써 오직 은혜이고, 둘째는, “Sola Fide” 로써 오직 믿음이고, 셋째는, “Sola Scripture” 로써 오직 성경이고, 넷째는, “Solus Christos” 로써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고, 다섯째는, “Soli Deo Gloria” 로써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이다. 여기에서 “Sola” 가 서두 마다 붙은 이유는 그 전 까지의 신학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즉 이성 위에다가 계시를 더한다는 신학을 염두해 두고 “Sola”(오직)를 붙인 것이다. 100%가 아닌 경우에는 이미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이 토마스 아퀴나스는 로마카톨릭의 대 신학자입니다. 이 다섯가지의 표제에서 세 번째에 속한 Sola Scripture” 즉 오직 성경을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Scriptura Scripturae Interpretes” 로써 이 말은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만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 철학, 사상 그 어떤 것으로도 결코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이며, 또한 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외에 다른 것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성령훼방죄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미 떠나버렸고 목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철학만이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할수 없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은혜를 가리켜 추가적으로 더해진 선물(donum Superadditum)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죄를 가리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추가적으로 더해 주신 선물인 은혜를 거두어 갔다는 결핍론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의 모양은 남아 있고, 형상은 거두어 가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결핍된 죄만 더해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결핍된 것이 아니라 타락한 것이다.

'죄를 지다' 의 표현보다는 '죄를 범한다' 의 표현이 올바른 표현입니다. '죄를 지다' 는 천주교의 표현이고, '죄를 범한다' 는 기독교의 표현입니다.

천주교에서 말하는 '죄를 지다' 라는 표현은 '짐을 지다' 라는 표현과 동일합니다.그러기에 "그 죄짐을 벗어버리면 된다" 라는 정의하에 자신이 범한 죄만큼의 짐을 지거나, 고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에게 찾아가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 를 통해서도 죄를 벗어버릴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근본적으로 천주교는 죄에 대한 정의를 타락과 부패로 말하지 않고,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결핍으로 보기때문에, 그 부족한 만큼을 자신의 고행이나 수행을 통해 채우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는 로마서 323절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죄를 결핍으로 보지 않고 타락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다'라고 정의하여 결핍으로 보는 천주교는 그 죄에 대한 해결 여부가 그 죄를 지은 자에게 있지만, '죄를 범하다' 라고 정의하여 타락과 부패로 보는 기독교는 그 죄에 대한 해결 여부가 죄를 지은 자에게 전혀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으며, 그 방법으로는 죄에 대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루터가 어떤 심장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단행했는가를 조금이나마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루터의 시대보다 지금의 시대가 더 암울함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이러한 시대속에 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각자의 마음속에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의를 객체소유격으로 해석하여 성도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기복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곧 성도들이 무엇을 해야만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 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런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이단들이 교회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인본주의가 만연한 감리교는 물론이고, 장로교 안에까지 객체 소유격적인 개념이 팽배해져 있습니다. 죄인된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관점으로 충성과 봉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부족한 종이 감히 단언하건대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기에 그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으며, 은혜조차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에서 은혜를 주시는 근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중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카톨릭에 속해 있었던 마틴 루터는 자신이 살려고 여러 가지 수행과 고해성사를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영혼은 더욱 더 피폐해져만 가고 무기력해져만 갔습니다. 그래서 늘 고민하던 중에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을 통해 자신이 사는 것이 객체소유격의 개념인 수행과 자신의 어떠한 공로가 결코 아닌 주체소유격의 개념인 하나님께로부터 믿음을 선물로 받는 것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의인을 살게 하는 이 믿음이 인간의 그 어떠한 수행과 행동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 믿음은 누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자에게만 성령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그 어떤 것도 결코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한 것입니다.

구원은 에베소서 28절 후반부에 기록된 말씀처럼 하나님의 선물이지 기념품이 아닙니다. 기념품은 구별함이 없이 그 행사에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주는 반면에 선물은 주기로 작정한 자에게만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된 인간들이 구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그저 늘 자신들이 죄인임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회개할 뿐입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태어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면서 가장 먼저 마태복음 32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선포하며 말했으며, 예수님께서도 가장 먼저 417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선포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도 로마 카톨릭의 교황 레오 10세가 베드로 성당의 공사비 때문에 면죄부를 팔게 되었고, 그 면죄부를 파는 일행이 비텐베르크에 왔을 때 로마 카톨릭의 잘못을 95개 조항으로 작성하여 151710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 벽에 붙였습니다. 그 중에 가장 먼저 마태복음 417절의 말씀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를 인용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해야 하는 삶이어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입니다.

주안에서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는 사역이 이러한 종교개혁과도 같은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단이 득세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선포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강단에서 바르게 선포되어야만 다시금 교회가 새롭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주안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한국교회를 이단에서 보호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세워나가는 데 일익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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