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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노부오목사님의 칼빈의 교회론을 읽고

교회론

by 김경호 진실 2011. 11. 28.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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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교회론>을 추천하며


와타나베 노부오 지음, 김산덕 옮김, 도서출판 깔뱅



우리에게는 생경한 한 일본 신학자이자 동경고백교회의 목회자의 글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저자는 1923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를 지나온 사람입니다. 저자 서문에 이에 대한 고백적인 글이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 그리스도교회’에서 태어난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회에 대한 이해나 자세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교회로부터의 가르침을 의심하고 전면 수정해야 할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그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일본의 교회입니다.


‘일본의 교회는 천황제 지배 아래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천황의 명령에 따라 타협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 잘못이 가장 현저한 모습

으로 나타난 것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국가권력의

악마적인 정책에 협력하여 국가의 악에 대해 저항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자신의

안전만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상황의 일본의 교회에 대해서도 비판하지만 그 칼날을 자기 자신에게 대해서도 결코 숨기지 않습니다.


‘당시 나는 자각적인 그리스도인이기를 원하고 있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도,

지성적인 면에서도 미성숙하여 자신의 신념이라고 하는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략--- 칼빈으로부터 배웠던 교회 이해를 견지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천황제 국가의 권력기구를 거의 전적으로 긍정하고 국가가 야기한 침략

전쟁의 허위를 간파하지 못한 채로, 국책에 동의할 수 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관하여 침묵하였던 것이다. --- 중략 --- 나는 전쟁

찬양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반전사상은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국민 전체가 고뇌하

면서 완수하려고 하는 이 전쟁 가운데서 나는 신앙인으로서 국민들과 함께 고난을

인내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따라서 전쟁과 전쟁에 참가하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는 패전과 함께 신앙의 회의를 품게 되었고 말씀 앞에서의 자기 검토의 길을 지나온 후에 목회자로서의 소명을 받게 됩니다. 이에 대해 저자는 ‘내 인생의 발본적인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이전의 자신과 같이 철저하지 못하고 타협적인 교인을 낳고 양육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론에 치심하게 되었습니다. 즉 “나는 교회를 믿사오며”라는 고백 위에 칼빈으로부터의 배움을 더욱 깊고 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칼빈 시대와 노부오 목사님이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시대적 정황의 차이와 그 이해하는 방식의 상이함이 비록 있을지 모르지만 그 궁극의 첨지는 같을 것입니다. 즉 그 목표방향은 일치하다라고 말합니다.


노부오 목사님이 역사적 자기반성 위에 교회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듯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 역시 교회가 중요함을 뼈저리게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체요, 삶의 근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에 따르는 경건함도, 범죄한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과 악한 세대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통찰력과 식견도 모두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제공되는 법입니다. 다른 방도는 도무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책으로부터 가장 중요하고도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역자 서문에도 있지만 “교회 없이는 신학도 없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칼빈이 종교개혁 시대에 그 당대의 종교개혁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만의 독특하고 영향력 있는 교회론을 주창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시각을 흔들어 놓습니다.


칼빈의 사상은 시대의 암흑 속에서 한줄기 서광처럼 불현듯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대 교부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헤아려 거기로부터 전수받고 계승되어진 것임을 저자는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도교회와 초대교회와 그리고 고대교회로 이어지는 교회의 구속사적 흐름 속에서 칼빈에게도 이어진 교회적 이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칼빈을 통해 지금 여기에 면면히 이어지고 전승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노부오 목사님의 말씀처럼 오늘날 우리 시대의 몸짓과 말로 재해석되어지고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우리 또한 주님의 말씀과 교회의 참된 계승을 온전히 이어받고 다음 세대에 전수해 주는 일에 좀 더 간절하고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칼빈 자신의 교회에 대한 이해가 있고 칼빈이 이해한 교회의 어떠함이 오늘날 이렇게 표현되고 이해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는 노부오 목사님의 견해가 섞어져 있습니다.


책의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칼빈연구의 중층성

제1부/교회의 선택

제2부/교회의 결집

제3부/교회의 형성




<서론>에서는 칼빈의 교회론적 기초가 고대교회의 교회론을 회복하고 그것을 계승하려고 했음을 헬라어 신학계보와 라틴어 신학계보의 교부들의 신학과 그 문제점을 짚어 보며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제1부 교회의 선택>에서는 칼빈이 ‘택함을 기초로 하는 교회론’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은 개인적인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로의 부르심입니다.


나아가서 칼빈의 예정론 중심은 그리스도가 선택하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그리스도가 택함을 받는 것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택함을 받는다는 것에 중심점이 놓여진다고 노부오 목사님은 평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론은 그리스도론의 투영이며 교회론의 영역 속에 특히 성찬론에 그리스도론이 반영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고 합니다.


칼빈의 교회론을 생각할 때 염두에 둘 것은 ‘주의 백성’의 계승과 연속성입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언약의 일관성입니다.

츠빙글리는 언약의 출발을 ‘아담’에 두지만 칼빈은 ‘아브라함’에게서 그 실질적인 출발점을 삼았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언약신학이 교리체계의 일부분으로보다는 오히려 교회론의 근저로 자리잡고 있으며 언약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언약이 존재하며 그러므로 그 언약은 일관되며 ‘교회를 세우는 것’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에 속합니다. ‘공회를 믿사오며’라는 것은 이러한 것을 믿는다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섭리’에 대해서도 칼빈은 말하기를 섭리의 목적 중의 하나는 “특히 교회를 지배하기 위해 깨어계심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 “하나님의 개별적 섭리는 신자의 구원을 위해 파수하신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곧 교회의 증대와 진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단번에’ 죽으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선취된 장래의 소망 가운데 결단적 삶을 산다고 합니다.






<제2부 교회의 결집>에서는 교회의 결집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른 방도는 결코 없습니다.

말씀과 성례전은 단순한 표시, 즉 인식의 근거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로써 그리스도를 전달하는 것을 통하여 교회를 존립시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칼빈에게는 특히 무엇이 말씀을 선포하는 ‘그릇’인가의 문제 즉 ‘직분(미니스테리움)’문제가 중요했습니다. 통례적으로 목사, 신학교사, 장로, 집사의 네 직분이지만 더 나아가서 성도 모두에게도 ‘듣는 직분’이 있음을 칼빈은 분명히 했습니다. 즉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말 것이 아니라 ‘청취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직분으로의 부르심에는 내적인 사항 즉,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사의 수령과 외적인 사항 즉, 교회에 의한 선택(선거)과 부르심(초빙)의 결합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의 결합과 조화가 보이지 않을 경우 칼빈 자신은 그것이 나타날 때가지 인내하며 기다리는 본을 보였습니다.


루터의 객관주의적 교직론(설교만 강조)과 그 반대편의 츠빙글리의 견해와는 달리 칼빈은 양자 모두를 강조하였는데 말씀의 설교와 성령과의 결부로 성령이 같이 역사하심으로 미니스테리움이 열매 없이 허상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칼빈은 또한 설교자가 하나님의 대리, 하나님의 입, 그 설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빛내는 완전한 그릇이 되지 않으면 설교에 의한 교회 건설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위와 같이 설교자의 비인간화가 중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인간으로부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해두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한편, 설교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것이므로 설교자는 자기를 비인간화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간화여야만 합니다.


교회가 예배로 모일 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명목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지배를 말합니다. 예배는 말씀에 의한, 말씀을 향한 결집이며 그곳에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가지시고 감찰하시며 지배하십니다. 이런 점에서 예배는 결코 인간의 편리나 흥미나 감정의 만족을 위한 소집이 아닙니다. 보다 중요하고 근본적 의의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복종입니다.


칼빈은 예배에는 형식 또는 정해진 틀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최소한의 간략함을 기준으로 사도적 교회의 기본선을 복원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요건으로서 주님의 말씀의 설교, 공적기도, 성례전의 집행을 꼽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개혁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이 서로의 겉으로 드러나는 상이함 때문에 서로 배척하고 비난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칼빈의 글을 조금만 시간 내어 읽었어도 서로 데면데면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실례 중에 하나가 예배형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칼빈은 예배 시에 시편을 부르기를 종용했었는데 시편이 하나님 찬양에 가장 합당한 것이라는 것과 시편은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시라는 것과 시편이 구약이래로 하나님의 백성이 계승적으로 불러온 찬미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예배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예배가 예배로서 바르게 서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임재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임재는 종말이 이미 도래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종말론적임을 시사합니다.


예배의 종말성을 가늠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이고 이 그리스도의 현재성은 말씀 선포와 성례전을 통해서입니다. 특히 주님의 임재는 성찬을 통해서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래서 칼빈은 매주 성찬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성찬이 시행빈도 수에 대해서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칼빈이 지적한대로 설교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전달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죄인된 우리들에게 실재성의 유지가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죄인된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감정이나 기분 또는 의지에 의한 임재 확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정하신 것으로 말미암은 임재 확인이어야만 합니다. 자기 확증은 아무런 근거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례전에 참여함으로 얻는 유익은 우리가 말씀선포로부터 받아야 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체임을 명확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지배하심을 재확인하고 나아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계속 건설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칼빈은 세례에 대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과의 언약의 역사를 통해서 이해되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칼빈은 유아세례를 다룸으로써 세례 문제의 핵심을 논증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은총의 초월성과 객관성입니다. 유아세례를 실시하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기초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여 그 기초가 만들어지느냐 하는 문제인 것입니다.


칼빈은 츠빙글리의 성찬 이해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세례받는 자의 자기 주체성, 그의 결단적 측면을 중요시하고자 하는 주장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세례를 주신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고백자로서의 존재와 자세를 견지하게 하기 위함임을 주장했습니다.


세례의 집행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명확하게 교회적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례는 회중 앞에서 집행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것은 회중이 증인이 된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제3자가 아니라 세례의 의미가 회중들에 대해서도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세례식에 증인으로 참여 한다는 것은 세례의 의미(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단회성)를 재인식하고 자신이 받은바 세례를 재조명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는 교회 가운데서 일어나는 구원적 사건입니다.


이런 점에 비춰 볼 때 소위 죽음에 이른 미수세자에 대한 ‘긴급세례’라는 것은 없습니다. 즉교회 질서를 넘어서까지 세례를 집행해야 할 정도의 효력을 세례 그 자체가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례에 의해서 교회는 수세자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성별하는 것입니다. 세례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주의 몸된 교회에 접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언약의 복이 확대되고 연장됨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존재한다는 의의를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에 의해서 유아는 교회에 더하여집니다. 그것은 언약의 약속이 유효함을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찬에서는 제외됩니다. 왜냐하면 신앙고백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부모는 유아에게 교리교육 실시할 것을 교회 앞에 서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실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를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에게 순종해야 함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서약이며 이것으로써 삶의 자세가 제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신앙고백을 향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말씀사역자에 의해서만 집행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서 공적인 인간에게 성례전이 위탁된 것이며 직분자를 통해서 시행되는 의미가 있으며 말씀설교와의 일치 아래서 집행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칼빈은 교회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것은 교회질서(미니스테리움=직분)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이 이 땅에 전개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찬식의 수령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에게 천상의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달되어 그와 연합하는 것이며 그것은 교회에 대한 약속이 현실화됨을 의미한다고 칼빈은 지적합니다.

성찬에 있어서 우리는 칼빈의 성찬에 대한 이해가 루터나 츠빙글리의 중도적인 입장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노부오 목사님은 교부들의 성찬론사를 말씀하시면서 칼빈은 이러한 성찬론사의 연구 위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칼빈만의 독특한 신학적 발상의 전환으로써 칼빈적 그리스도론=그리스도의 엄밀성(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의 것이 되는가의 문제)을 성찬에 적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성찬을 받는다는 것은 말씀을 받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 그분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가 교회의 유익으로 옴을 말하며 그리스도 안의 공동체로 합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설교(말씀)중심만의 교회로는 부족합니다. 설교가 하나님 말씀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전달되는 경우 설교가 관념화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은 말씀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집단을 교회로 돌이키십니다.


칼빈은 성만찬을 합당하게 받게 하기 위한 목회에 주목하였습니다. 칼빈이 이해만 목회란 어떤 원리나 기술에 의한 정신 지도가 아니라 개별적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적용이었습니다. 말씀의 지배와 죄용서의 확립인 것입니다.


칼빈의 목회사상에서 눈여겨 볼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호목회’라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서로’ ‘상호’ ‘교대로’ ‘번갈아가면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오히려 유익한 것이다라고 합니다. 오늘날 개혁되어가는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 같습니다.


다음은 성찬을 잘 받게 하기 위한 상호훈련(권징)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교회의 표지에서 권징을 제외한 이유는 칼빈이 생각한 교회의 실질은 그리스도와의 사귐인데 이 사귐은 그리스도의 전달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인데 상호훈련(권징)은 그리스도의 전달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상호훈련(권징)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집의 질서입니다. 즉 하나님의 집의 가족으로 양육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호훈련(권징)은 교회라는 사회의 경찰권의 발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형제에 대한 사랑의 책임 때문에 상호훈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배병순서에서 칼빈은 목사, 집사, 모든 성도 순이고 배병을 행하는 이는 집사가 이를 담당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좀 낯선 것이어서 지인을 통해 현지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와 캐나다의 개혁교회의 배병을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는 배병을 행하는 이는 집사가 아니고 장로가 합니다. 그것은 그 일이 영적인 것과 관련되어서 장로가 행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었고 캐나다의 개혁교회에서는 집사가 하거나 아니면 앞에 진설해 놓고 전 교우가 차례로 나와서 행하기도 하는 사례를 들었습니다. 개혁교회에서 배병을 집사가 하는 이유는 집사의 직무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돌아봄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로 세움에 있는데 칼빈은 이 때문에 배병이 집사의 직무로 이해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저희 교회에서는 종교개혁기념강의로 ‘이성교제’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칼빈은 결혼을 교회형성의 한 요소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콘시스뜨와르’(결혼지도기관으로써 설교자 2명, 소의회 3명, 대의회 2명으로 구성)가 결혼에 깊이 관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즉 장로들이 결혼을 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서 결혼은 교회에 의해 보호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결혼의 유효성의 근거는 당사자 간의 진실한 약속에 기인하는 언약에 있는데 이 약속이 진실된 약속이 되게 하기 위해 ‘콘시스뜨와르’가 관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거룩한 질서로서 당사자들 간의 약속으로 묶여지고 콘시스뜨와르와 증인으로서의 교회 앞에 묶여지고 하나님 앞에 묶여짐으로써 삼중으로 묶여지는 것으로 사람이 절대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제3부 교회의 형성>에서는 교회의 법과 회의, 교육과 학교, 그리고 국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전체교회의 질서가 형성될 때 법질서가 필요한데 법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바로 회의라고 합니다. 교회의 표지를 실질화 하기 위해서는 법재화가 필요합니다. 법 아래에서 자기를 억제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교회법의 개혁이기도 합니다. 교회법을 무시하는 경향은 19세기에 경건주의적 흐름을 띤 각성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교회를 법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법의 세목과 준수의 차원이 아니라 복음의 지배적 질서의 차원에서 그렇습니다. 복음의 지배적 질서는 죄의 용서를 나누어 주는 질서(교직문제, 설교와 성례전문제, 사법권문제)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말씀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은 복음이 복음으로서 기능하고 교회의 구석구석까지 복음의 권능이 확립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미니스테리움(직분)에 의한 공적 설교와 사적인 복음전달로 수행되는데 단독수행이 불가합니다. 그러므로 회의체가 요구되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직분의 권능은 오직 회의를 통해서만 발휘될 수 있습니다. 질서로서의 회의는 미니스테리움의 권능을 체크합니다. 회의는 그곳에 제출된 견해가 복음에 합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검토, 올바른 것을 시인합니다. 칼빈은 회의도 역시 그리스도의 임재 아래에서 영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교회는 단일 예배공동체로서 교회에 대한 필요한 미니스테리움을 완전히 갖추고 있지만 상위 회의체가 필요한 이유는 미니스테리움의 사역자들의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교회의 미니스테리움의 권능이 무한히 증대되는 것을 억제하는 기능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교육인데 칼빈이 교육을 중시한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교회가 구약이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역사를 이어받아 갈 때 그 계승을 짊어지는 중요한 사역이 바로 교육이라는데 있습니다. 교육이 안되면 교회가 황폐하여지고 맙니다. 교회의 교육은 반드시 교회의 질서 아래에 놓여져야 합니다.



교육 다음으로 학교에 대해서 논하고 있습니다. 칼빈의 생각으로는 학교는 ‘개혁된 교회’의 내일을 위한 공장이라고 여겼습니다. 칼빈 사후에도 종교개혁에 있어서 제네바가 주도적 입장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정신이 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제네바의 커리큘럼은 다른 학교의 문학편중의 경향을 탈피하려고 했었는데 칼빈은 단순한 교양인을 교육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교인을 양육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교육관의 기초는 교회관이요 그 교회는 언약을 계승하는 공동체입니다. 칼빈의 경우 교육관을 그 근저에서 지탱하는 것은 구속사적 신학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의 책임을 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칼빈은 목표로서의 인간상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교육을 파악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상을 창출해내는 것은 말씀이지 교육이 아닙니다. 교육은 말씀을 향하여 인간을 양육하는 그 이상의 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에 보면 노부오 목사님은 칼빈의 교회론이 존재론적으로 교회의 존재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역사로 파악되고 있다는 것을 밝혀 왔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구속사적 전망 가운데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말일 것입니다. ‘구속사 가운데 존재하는 실체’로서 교회는 구속사의 전 시대의 모든 교회가 바라본 종말론적 전망을 동일하게 가지면서 이 시대를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성찬 없이 말씀만이 선포되어질 때 교회가 관념화에 빠질 우려가 있듯이 건전한 교회론적 기반 없이 묵상하는 신론이나 기독론이나 인간론이나 구원론이나 종말론은 관념화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신학 전반에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은 교회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곧 신학의 출발점이며 “교회 없이는 신학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쪼록 건강한 교회에 속하여 교회로부터 신앙을 훈육 받으며 경건의 훈련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요하심을 알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 귀한 책의 일독을 꼭 권하는 바입니다.

(이 책과 함께 읽었으면 좋을 책은 칼빈의 <기독교강요>와 김홍전 목사님의 <교회에 대하여1,2,3,4>입니다. 혹 관심 있는 분들은 같이 읽으시면 유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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