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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Re:펠라기우스 논쟁

어거스틴

by 김경호 진실 2011. 12. 2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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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 논쟁 (서기 410년~420년)




1. 펠라기우스는?

   그는 켈트족 출신의 수도사로서 경건(敬虔)과 지성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가 400년 로마시를 방문하였을 때 소위 기독교 문화의 윤리적 붕괴를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즉각 의로운 책임을 호소하는 강력한 설교를 행하기 시작하였다. 일단의 유력한 시민들이 그에게 적극 지지를 표하였고, 그는 얼마 안되어 유명인사가 되었다.


2. 원죄를 부인하는 펠라기우스

   펠라기우스는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고, 또한 거듭하여 죄를 범하는 존재이나 이는 각 개인들의 선택의 문제”라고 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각 개인들은 각자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만 책임이 있을 뿐이다. 아담은 죄인이었으나 거기서 그의 범위는 끝난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법을 어긴 개인에 불과한 것이다. 인류 전체가 그와 함께 타락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은 처음 창조주의 손에 의하여 생성된대로 훼손받지 않은 채 남아있다. 따라서 인류는 기본적으로 선하다. 타락한 인류란 있을 수 없다. 다만 개인적인 죄인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펠라기우스가 볼 때에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대속이 아니고 단지 영감이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구세주가 아니라 하나의 교사요, 모범으로서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모형 즉 모든 인간들을 위한 도덕적 본보기가 되신다.


   펠라기우스는 교회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기능과 역할을 부여한다. 세례를 통하여 기독교 신자들은 중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상한 삶을 얻는다. 그리하여 성례는 인간이 그 내부 속에서 할 수 있고, 스스로 해야 할 일의 상징이 된다.


   인간의 원죄와 유전적 죄성을 부인함으로써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이 죄의 결과 또는 이에 따른 처벌이 아니라 그저 자연의 일부라고 하였다. 영적인 죽음은 아담의 죄가 유전된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의 능력을 잘못 사용하는 개인들에게 오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은 이들의 자유 의지에 따라 의롭지 못한 결정을 회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의 자유 의지와 도덕적 책임을 사용함으로서 인간은 인간의 선행에 따라 부여되는 하나님의 은혜를 도울 수 있다.


   어거스틴과의 끝없는 논쟁과 토론을 일르킨 불씨가 되었던 것은 펠라기우스가 413년 데이트리아스 수녀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즤 편지 내용 중에 “인간은 완전을 이룰 수 있으니, 이는 또한 우리의 의무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3. 어거스틴의 반박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주의깊게 들은 어거스틴은 즉시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과연 어떻게 죄인들이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시행할 수 있단 말인가? 어거스틴은 펠라기우스가 자주 언급하였던 마지막 심판의 공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지옥을 두려워하는 자는 죄 짓기를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옥을 증오하듯이 죄 자체를 미워하는 자야말로 죄 짓기를 두려워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반면 여기에 부수되는 무서운 책임이 함께 한다. 인간은 그 제자가 되기에 부족한 각 행동, 모든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응답하여야 한다. 이보다 덜하는 것은 하나님을 고의로 경멸하는 죄를 범하는 것이다. “많은 죄들이 교만을 통하여 저질러지나, 모두 교만스럽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많은 경우 이들은 무지 혹은 인간의 약함 때문에 저질러진다. 많은 죄들이 절망 속에서 울고 한숨짓는 이들에 의하여 범해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고통하고 애통하는 가운데 있는 자들, 피흘리며 비틀거리는 인류들을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받은 기관이었다. 은혜란 무엇인가? 사랑에 넘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하여, 바로 죄인들을 위하여 주어진 바 이들을 치유하는 良藥이었다. 그는 말하였다. “인간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상실되었다. 그러나 神-人은 이들을 해방시키는 은혜로서 오셨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의 구원에 관한 실제적인 진리를 흐리는 자를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못하였다. “의약의 유익을 찬양하는 행위가 곧 이러한 의약이 치유하는 상처와 질병의 유익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의약에 대한 우리의 찬양과 칭찬이 높으면 높을수록 이러한 의약이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악한 질병과 고통에 대한 우리들의 혐오감이나 예방조처는 더욱 더 철저해야만 한다. 따라서 은혜를 찬양하고, 설교하는 것은 곧 죄악들을 혐오하고, 이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행위이어야 한다. 인간은 그의 질병의 심중(深重)함을 깨달아야만 한다”


4. 펠라기우스의 이단 정죄

   415년 디오스폴리스에서 14명의 감독들이 모여 펠라기우스의 의견을 청취한 후 그의 주장이 근본적으로 건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거스틴은 이를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오로시우스를 제롬에게 파견하여 펠라기우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416년 오로시우스는 당시 종교회의가 열리고 있던 카르타고로 귀환하여 자세한 내용을 보고하였고, 이어 밀레비스에서 제2차 종교회의가 소집되어 이 곳에 회집하였던 399명의 감독들이 만장일치로 펠라기우스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 회의 결과가 당시 교황 인노센트에게 발송되었다. 이들의 잘못된 오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아담은 원래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그의 범죄 여부와 관계없이 어차피 한 번은 죽을 것이라는 주장

   (2) 아담의 죄는 아담 자신만을 훼손하였으며, 인류 전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주장

   (3) 새로 태어난 아기는 아담의 타락 전과 동일한 상태에 있다는 주장

   (4) 아담의 죄나 그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인류 전체가 죽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류 전체가 생명을 얻는 것도 아니라는 주장

   (5) 복음뿐 아니라 율법도 인류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주장

   (6)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전혀 죄가 없는 인간들이 존재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인노센트 교황은 417년 3월 임종하고 말았다.


   417년 새로운 교황 조시무스는 오히려 펠라기우스와 카일레스티우스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런데, 당시 로마에서 난동들이 발생하였는데 펠라기우스파 추종자들이 나이가 많은 로마 관리를 공격하는데 합세한 사실이 밝혀졌다. 분노한 황제 호노리우스는 418년 칙령을 발하여 그들을 공공질서를 교란하는 자로 비난하고, 그 후에 그 두 사람을 로마에서 축출하여 버렸다.


   418년 조시무스가 임종하자, 젏은 에클라눔의 쥴리안의 주도하에 펠라기우스에게 새로운 재판의 기회를 주려고 하였던 시도가 어거스틴 등에 의해 봉쇄되었다. 어거스틴은 그들을 “헛된 망상을 좇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5. 어거스틴의 저서 “영과 의문”

   이처럼 장기간 계속되었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을 통하여 ‘영과 의문(The Spirit and the Letter)'이라는 저술이 탄생되었다. “우리들은 인간이 성결한 생활의 규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으로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고 확신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행위나 율법으로서가 아니라 영에 의하여, 선행이나 행위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향의 축복이라고 정의하였던 그의 은혜의 개념을 정리하였다. 인간은 그가 할 수 있는 일체의 선행을 시작하고, 유지하고, 완성시키기 위하여는 계속 은혜가 필요한 상태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은혜는 이를 이루기 위한 유일한 방도이다. 인간이 은혜를 간구함은 아직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지는 모르지만 이미 그 속에 은혜가 임재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은혜를 찾고 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은 주어졌다. 그리고 율법을 완성시키기 위하여 은혜가 주어졌다. 율법이 완성되지 못한 것은 율법 자체의 흠이나 잘못이 아니라 인간의 못된 정욕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약함과 악함은 율법에 의하여 전시되고, 은혜에 의하여 치유되었다.”


6. 맺는 말

   어거스틴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펠라기우스의 자유주의 속에서 인간의 자연적인 善性에 대한 위험한 집념을 감지하였다. 어거스틴은 이미 눈물과 고통과 피를 맛 본 사람이었다. 어거스틴은 아무런 그늘이 없는 양심으로 이러한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었다.


   “사랑하고, 그 후에는 원하는대로 하라. 사랑 속에서 평화를 지키고자 하면 평화를 지키라. 사랑 속에서 외치고자 하면 외치라. 사랑으로 고쳐주고자 하면 고쳐주라. 사랑으로 그렇게 않고자 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 단지 사랑의 뿌리를 깊이 간직하여라. 이러한 뿌리로부터는 선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나올 수가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그리하여 신자의 생활은 감사의 생활이다. 원래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지성은 기억하고, 이해하고, 의지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들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들이 올바르게만 사용된다면 그 진정한 자아는 그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존재의 진정한 질서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서는 죄가 이러한 자연적 능력을 사로잡고 있으나, 이를 완전히 파괴할 수가 없다. 바로 여기에 은혜의 역사를 볼 수 있다. 은혜는 인간 속에 잠재하는 능력을 일으키어 자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만든다. 즉, 하나님의 형상 속에서 스스로를 보도록 만들어 준다. 이제 죄에 의하여 흐려진 이러한 형상의 발견, 하나님 모양의 회복은 오직 은혜의 영향 속에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그 효력을 발할 수 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서만 인간이 악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생각이나 의지나 혹은 감정에서 아무런 좋은 것을 이룰 수가 없다. 이는 이를 통하여 인간들이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이보다 더 나아가서 이들이 하는 것들을 사랑으로 하기 위하여 더욱 더 필요한 것이다.”






  <참고 도서명>


   워렌 토마스 스미스 지음. “어거스틴-그의 생애와 사상” 박희석 옮김. 1994. 아가페문화사

출처 : 믿음과 삶이 하나되는 경건생활
글쓴이 : 고경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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